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희년'(Jublee)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희년'은 애굽에서 해방된 유대인 공동체가 지키던 관습이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가면 희년을 선포했다. 희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하고 채무를 면제하며 토지를 원래 소유대로 회복하게 돼 있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 희년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성남시의 도움으로 부채를 탕감받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한 수혜자의 이야기다.

▲ 8월 27일 '주빌리은행'이 출범했다. 오래된 부실채권 때문에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다. 이 은행은 앞으로 부실채권을 매입해 채무자의 능력에 때라 전액 변제 또는 일부 변제하는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저는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남편은 트럭을 할부로 구입해 운전을 했죠. 일이 좀 잘되는 것 같아 5톤 트럭 두 대를 더 구입했습니다. 운전기사 두 명을 쓰면서 사업하던 남편은, 사업이 예상대로 성장하지 않자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그 후 뇌출혈로 쓰러져 침대에만 누워 있는 상황이 됐어요. (중략)

두 자녀와 살아가려면 제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픈 제가 일을 해도 벌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친정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어, 남편이 진 빚의 이자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저는 카드를 돌려 막는 생활을 했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덕일 때 성남시의 도움으로 부채를 탕감받고 조금이나마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성경에서 발생한 개념인 '희년'을 실천하는 건 교회가 아니다. '롤링주빌리(Rolling Jublee)'는 희년과 연계된 개념의 부채 탕감 운동이다. 사회적 기업 희망살림(김재욱 대표)이 시작하고 기독교 단체인 '희년함께'도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약 1년 동안 진행된 한국판 부실 채권 탕감 운동이었다. 

이들은 2014년 4월, 1차 부채 탕감을 시작으로 올해 1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약 51억 원어치의 부실채권을 소각했다. 이로써 총 792명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던 부실 채권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 운동의 한 축이었던 희망살림이 8월 27일 주빌리은행(공동은행장 이재명 성남시장·유종일 KDI 교수) 출범식을 개최했다. 주빌리은행은 희망살림 주도하에 지방자치단체, 사회·종교계가 힘을 합쳐 만든 단체다. 일반 은행처럼 돈을 빌려주고 빌린 금액에 해당하는 이자를 받는 곳은 아니다. 대신 시민들의 모금을 바탕으로 부실채권을 사서 채무자를 구제하는 일을 한다. 채권자의 편이 아닌 채무자의 편에 서는 은행이다.

▲ 주빌리은행은 이재명 성남시장(사진 가운데)과 유종일 KDI 교수(사진 왼쪽)가 공동은행장을 맡는다. 이재명 시장은 "빚 때문에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읽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주빌리은행은 금융권이 부실채권을 대부 업체에 파는 것에 주목했다. 대부 업체 대신 주빌리은행이 부실 채권을 매입할 계획이다. 대부 업체에 돌고 있는 부채를 사서 채무자가 전혀 갚을 형편이 안 되면 전액 탕감해 줄 예정이다. 갚을 의지가 있는 채무자에게는 원금의 7%만 받고 채무를 변제하고, 받은 돈은 또 다른 부실 채권을 사는 데 사용된다. 

'롤링주빌리' 초기부터 이 운동을 이끌어 온 제윤경 희망살림 상임이사는, 주빌리은행이 빚지는 사회를 끝내기 위해 시작됐다고 했다. 제 이사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제도적 문제다. 한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대출하게 만들어 더 깊은 금전적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출 심사는 부실하게 해 놓고 모든 책임을 채무자에게 전가하는 시스템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 노숙인을 예로 들었다. 이 노숙인은 2000년부터 길거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으로 은행과 카드 회사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다. 노숙 생활을 하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금융권은 대출을 허락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 노숙인은 자활의 의지가 있지만, 발목을 잡고 있는 부실채권 때문에 희망을 잃었다고 했다.

주빌리은행은 시민 단체 중심으로 진행되던 '롤링주빌리'에 성남시가 합류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성남시는 금융복지센터를 개설해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채무를 변제할 수 있는 방법을 상담해 왔다. 동시에 성남시기독교연합회와 대한불교천태종 대광사 등 지역 종교계의 금전적 도움을 받아 부채를 탕감하는 데 쓰기도 했다.

▲ 출범식에는 4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100억 원어치의 부채를 소각해 없애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출범식은 참석한 사람들이 부실채권을 태우는 퍼포먼스와 함께 마무리됐다. 은행에서 팔려 제3금융권을 떠돌던 부실채권 100억 원어치가, 주빌리은행을 준비해 온 이사들과 이재명·유종일 공동은행장의 손에서 불타 없어졌다. 

주빌리은행은 함께할 단체들을 계속 모집 중이다. 희망살림의 백미옥 활동가는 성남기독교연합회가 도와준 것처럼 앞으로 교계가 채무에 짓눌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 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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