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마지막 본 지 족히 20년은 넘었다. 그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잠시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녔지만 거의 마주치지 못했고, 얼마간 같은 교회를 다녔음에도 연배가 한참 위인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과,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나와는 달리 복음주의적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민중신학자인 안병무·박성준 선생을 존경해서 그분들의 가르침에 꽤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에 관한 전부다. 물론 피상적이지만 그의 부인도 알고 있고 아들도 안다. 그의 집도 여러 차례 갔었고 그가 경영하는 안경점에 간 적도 있다. 또 내게 꽤 값비싼 안경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교회를 떠났고 어디선가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그가 떠난 지 몇 년 후에 그 교회의 전임사역사가 되었지만, 교계와는 발을 끊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민중신학 관련 활동을 하지 않았고, 나는 기독교권 밖에서 민중신학 연구자로만 활동했다. 그러니 그와 마주칠 일이란 거의 없었다.

20여 년 만의 만남이 어색할 것 같았다. 아니 실은 그의 얼굴을 알아볼지조차 걱정스러웠다.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 한때 절친했던 이조차 못 알아본 일이 허다했다. 다행히도 실수하지 않았다.

▲ <기독교의 본류를 찾아서 -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 이정만 지음 / 한들출판사 펴냄 / 462쪽 / 2만 2,000원

그리고 어색해할 틈도 없이 밀도 깊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그와는 처음 나누는 깊은 대화다. 살아온 이야기, 아들 이야기, 그리고 교회 사역 이야기 등등.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가 썼다는 두툼한 원고 뭉치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책이 된다면 거의 1,000 쪽에 달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한 주제로 이만큼 분량의 글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대가들에게서는 흔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로 큰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아니 실은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는 탤런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글쟁이도 아니고 능력도 많지 않지만, 나름 여러 권의 책을 썼고 글쟁이로 20여 년간 살아온 짬밥으로 이야기한 몇 가지 조언 가운데 첫째는 분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렇게 말하고도 책으로 출간되기는 쉽지 않다고 보았다. 요즘처럼 출판계의 불황이 깊을 때 지명도도 스펙도 없는, 더구나 트랜디한 주제도 아닌 책을 내겠다고 할 출판사가 어디 있을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 그로부터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추정해 보면 출판사 대표가 그의 원고에 설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내 조언대로 분량을 거의 절반으로 축약했다. 책을 받은 뒤에 검토해 보니, 원래의 원고가 다 수록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글의 집중성이나 구성상의 짜임새가 좀 더 탄탄해진 느낌이다. 하여 감히 내가 판단해 보건대 글의 분량을 축약하기 위해 심사숙고하면서 책의 완성도가 한결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우선 이런 내용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게 흥미로웠고, 무엇보다도 책을 출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출판사 대표에게 가능성을 보게 했던 그의 유일한 무기인 내용의 힘은 무엇일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 논지는,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기독교의 본류는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을 연구하는 내게 '본류'라는 말은 거슬리는 표현이다. 어떤 종교든 어떤 국가든 그 체제가 담고 있는 핵심적 진리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발견되고 발전된 결과다. 그런데 '본류'라는 말은 착시를 일으킨다. 마치 처음에는 그랬는데, 전개 과정에서 왜곡되었기에 처음에 대한 새삼스런 탐구가 필요하다는 어법이다. 하여 그는 이 새삼스런 탐구를 예수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책 부제가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또한 이 책의 후속편으로 그가 기획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하여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본류'인 예수와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에 있음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본류'라는 표현에 거리낌이 있는 나의 방식대로 이야기하면, 예수와 바울은 기독교의 본류가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원자료다. 이 원자료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담고 있는데, 그중 저자가 포착한 것은 사랑이다. 요컨대 그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예수에 대한 해석학적 코드는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을 키워드로 해서 1,000쪽에 달하는 원고를 썼고, 그것을 축약해서 500쪽에 달하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바울에 관해서도 사랑을 키워드로 하는 그만큼의 책을 쓰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독서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의 하나는 그가 주장하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렜던 시절에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설레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은 입에 발린 상투적인 말에 지나지 않다. 역사를 훑어보면 더욱 그렇다. 기독교만큼 피에 굶주린 독선의 역사를 가진 종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는 어떤 이들처럼 신께서 그대들을 그토록 사랑하는데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완악함 때문에 이른바 땅 밟기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어느 목사의 주장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그 사랑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여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 책을 보면 비판적 선입견이 생기고, 자연 까다로운 눈알을 휘날리며 다소간 전의에 불탄 채 책을 살핀다.

생트집의 전문가인 나를 그는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 나의 귀를 솔깃하게 했던 것은 그가 사랑을 설명하면서 강조해 마지않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을 도덕주의와 대립하여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아니 실은, 내가 보기엔, 이 주장은 몇몇 대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를 꿰뚫는 저자의 주요 논지다. 그것은 오랜 동안 기독교가 사랑을 도덕주의와 혼돈했고 심지어 도덕주의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하여 수많은 논증을 다양하게 펴면서 끝내 그가 강조하는 핵심 논지는 바로 이것이다. 하여 도덕주의의 옷을 벗겨 낸 사랑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예수를 집요하게 살핀다. 이 책이 시종 탐구하는 예수의 사랑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잠시 곁가지로 빠지면 그가 복음서의 예수 텍스트를 읽는 시각은 꽤 흥미롭다. 해석의 방식도 기발하고 해석의 태도도 날카롭다. 성서 해석의 문법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때로 날래 보이기까지 하다. 잠시 스쳐 간 불온한 생각이지만 설교자들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교집을 독서하기보다 이 책의 예수 해석들을 활용하면 교인들이 퍽 맘에 들어 할 것 같았다. 물론 설교는 설교자가 스스로 읽은 성서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참고 자료는 말 그대로 참고만 해야 한다는 걸 짚어 두어야겠다.

아무튼 그가 내리는 결론은 도덕주의의 왜곡된 신앙의 장치들을 제거한 예수의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본류라는 것이다. 이때 그가 말하는 도덕주의는 시시비비에 경도된 신앙이다.

흔히 바리새주의 운운하면서 기독교도들이 유대주의를 비난하는 상투어법의 하나는 그들을 도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가끔 그런 함정에 빠진다. 비판하는 상대방의 논지를 파악할 때 그들 자신의 얘기를 들어 보는 것은 상식이다. 한데 기독교는 오랜 동안 경청의 미덕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냥 성서가 그렇게 말했으니 저들은 그런 자들이라고 단언해 왔다. 성서가 말하는 바리새인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동일한지조차 묻지 않았고, 성서의 여러 텍스트에 사용된 바리새인이 모두 동일한 강령의 집단을 가리켰는지를 의심하지도 않은 채 성서를 읽었다. 또한 성서의 바리새인이라는 표현과 유대인이라는 표현도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성서가 얘기하는 것은 자명하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이런 독서는 반칙이다. 한데도 저자뿐 아니라 나조차도 그런 방식의 주장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심코 그런 식으로 말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유대주의 대 예수'를 '도덕주의 대 사랑'으로 등식화하는 저자의 몇몇 표현은 우리가 종종 범하는 실수의 하나라고 보는 게 좋겠다. 독자들도 이런 대목에는 유념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저자가 얘기하는 도덕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의 문제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주장은 시적이다. 논리를 펴기보다는 시적인 단언투의 말로 대답한다. 즉 "도덕주의는 강자의 논리다"라고. 안병무와 서남동 선생이나 내겐 익숙한 주장이지만 어떤 독자들에게는 혼란이 될 만한 어법일 수 있다. 안병무와 서남동은 저자처럼 "죄는 지배자의 언어이고 민중에게는 그것이 한(恨)"이라고 강변했다. 반대 논자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을 해체하면 도대체 사회는 어떻게 공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판자들은 이런 해체론적 죄 해석을 무책임한 주장으로 간주하곤 한다.

여기서 비판자들은 흔히 안병무나 서남동의 말이 '도덕', 그것이 담고 있는 말 자체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가령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 '살인하지 말라'는 것, 그런 도덕적 계명을 해체하면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는 얘기다. 가령 일부 목사들이 민중교회를 비판하면서 그 교회들의 목회자들이 민중신학의 가르침대로 교인들에게 죄론을 강조하지 않은 결과 민중교회는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데 그이들은 안병무와 서남동을 오독했다. 실제로 안병무와 서남동의 무수한 글들은 사회를 향해, 혹은 교회를 향해 비도덕 혹은 몰도덕적 행태를 꼬집으며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럼에도 어느 대목에서 안병무와 서남동은 도덕이 강자의 논리임을 문제 제기했다. 얼핏 보면 안병무와 서남동은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병무와 서남동의 죄 해체론적 주장의 요체는 도덕론이 일으키는 담론의 효과에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은 필요하지만 그런 분별의 논리가 종종 그 담론과 제도가 작동되는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묵살하게 되는데, 도덕의 담론과 제도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작동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도덕은 대체로 강자에게 유리하게 제도화했고 죄인은 대게 약자를 색출하는 방식의 담론으로 작용해 왔다. 그런 점에서 강자의 논리가 되어 버린 도덕에 대한 비판은 현존하는 도덕의 제도와 담론의 작동 양식에 대한 비판이고, 그것의 해체론은 도덕 없는 제도, 도덕 담론 없는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담론을 절대시하는 인식틀에 대한 성찰적 토론의 요청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기엔 기독교의 본류가 사랑이라는 저자의 주장의 요체는, 도덕의 해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자 중심의 제도를 지양하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가설적 제안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사랑은 현존의 제도를 문제 제기하는 비판의 화두다.

이러한 논점은 특히 오늘에 오면 더욱 중요해진다. 가령 해방되고 국가가 세워지고 전쟁이 터지고 극도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사투하던 시절, 한국은 아직 사회가 짜임새 있게 작동하지 않았다. 한데 권위주의 정권의 타도를 부르짓던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표출되던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은 빠르게 사회가 제도화했다. 그 시기는 한국이 산업사회에서 소비사회로 이행하던 때다. 특히 1990년대 말에 이르면 소비사회의 작동 논리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급속하게 정착해 갔다.

사회가 제도화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군대나 경찰의 통제보다는 규범에 의한 질서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대중매체를 통한 사회적 합의의 형식을 띠며 규범이 형성된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그런 사회적 합의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부추겼고, 소비사회는 자기 자신의 주권은 상품을 소비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내면에서 속삭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질서에서 성공한 자는 더 유리하고 실패한 자는 더 불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가치를 주입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적 소비사회가 빠르게 사회를 형성하는 제도의 작동 원리로 정착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논리인 도덕의 체계는 노골적으로 강자 중심적으로 제도화하고 있고 그것은 군대나 경찰의 위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적 공모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새삼스런 기독교의 본류 운운하는 주장, 곧 기독교는 도덕주의를 지양하는 사랑의 종교이며, 그것은 강자의 논리가 되어 가고 있는 도덕주의적 제도를 비판하는 신앙이라는 주장은 우리 시대를 향한 날선 문제 제기로 어울린다. 생트집의 전문가인 나를 설득한 저자의 논지는 이런 시대적 적실성에 있다.

하지만 실은 더 결정적으로 비판적 시선의 나를 무장해제한 것은 그의 주장이 그의 목회 현장에 대한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데 있다. 요컨대 그는 하나의 새로운 진리 체계를 만드는 지식 생산자의 한 사람이기 이전에 자기 삶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 이 점이 여러 가지 나의 취향과 다름에도 그의 책을 탐독하게 했던 결정적인 이유다. 이것을 흔한 말로 대체하면, 나는 그의 글에서 그의 진정성을 읽었다.

책 표지 앞날개에 소개된 저자 프로필에는 의아한 문구가 있다. '○○교회 2부 설교목사'. 별로 들어 보지 못한 표현이고, 얼핏 드는 생각은 이 문구가 그의 위상이 보잘 것 없어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저작을 낸 무명의 저자가 이렇다 할 내세울 다른 항목들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그의 위상을 격하되게 보이게 하는 항목을 표지에 넣은 것이다. 굳이 이런 것까지 밝힐 필요야… 이런 생각이 드는 문구다.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는 그렇다 치고, 그 교회 사정을 좀 아는 이들에게 이 표현은 더욱 문제적이다. 과거 엄혹하던 '5공' 시절 정권의 계략으로 당시 가장 강성의 반독재 투쟁가였던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이것은 반민주적 정권의 첨병 역할을 하던 경찰의 사주를 받은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벌인 일이라고 알려진 사건이었다. 그리고 추방당한 목사를 따르던 교인들이 수년간 경찰서 앞 노상에서 예배 모임을 가졌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이가 부러졌고 어떤 이는 팔에 골절을 당했고… 이런 피해의 담론이 설화가 되어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갈라진 지 거의 십 년이 지나서 교회는 다시 합쳤다. 더욱이 이 통합은 추방당한 이들의 정당성이 보상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진행 과정에서 양자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진중한 노력이 오랜 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하나의 이상적인 미담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름다운 통합이라고 해서 그 이면에 깔린 상처와 미움이 부작용 없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이 돌출해서 서로를 자극한다. 그리고 그럴 때 애써 봉합해 놓은 상처들이 다시 도지고, 증오와 원망의 소리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런 제자리걸음처럼 보이는 지리한 치유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너무나 서서히 상흔은 해소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의 아픔은 밖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해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더구나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정당한 자와 부당한 자를 가르고 심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정부가 낙인찍었던 오명이 벗겨지고 그것이 오히려 훈장이 된 이들이 아닌, 그 오명을 덧입은 이들은 통합된 교회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아마도 교회당을 같이 쓰기로 했음에도 일부는 따로 예배를 드려야 했던 모양이다. 바로 그 예배가 '2부 예배'다. 그리고 저자는 그 '2부 예배'의 설교목사라는 것이다. 그 직이 그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좋은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최악의 조건에서 상처가 도져 있는 이들, 그 아픔이 시대의 위로에서 배제된 이들, 누군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설교자로 사역했다. 물론 말했듯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외부인들에게 전혀 명예롭지 못한 직함이다.

그가 멈칫멈칫 털어놓은 목회 이야기는 상처들과 마주하면서 견뎌 낸 이야기다. 그리고 그 교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도덕의 칼날이 가장 번뜩이며 상처를 깊게 새겨 넣은 공간 한가운데서 신앙을 성찰해 온 이야기다. 겪어 본 이들은 알겠지만 상처 입은 사람과 진지하게 대면한 목회자는 그 상처를 자신의 몸으로 품는다. 거리 두기를 하고자 사력을 다해도 그 상처는 어느새 내면으로 파고 들어와 가슴을 파헤친다. 그의 사역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지내 온 이야기들이 한없이 그의 몸속에 생채기를 남겨 놓았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이 책은 그런 치열한 목회자의 자기 성찰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1,000쪽에 달하는 원고를 만들어 낸 괴력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그의 비범한 능력이 발현된 덕이라기보다는, 저 특수한 현장의 목회자로서 지내면서 너무나 아팠고 혼돈스러웠기에 사력을 다해 탐색한 진리 물음의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 무명의 저자가 쓴 책에 경의를 표한다.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 점이 적지 않지만, 목회자로서의 치열한 성찰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개인사 혹은 어느 특별한 교회의 역사에 관한 성찰을 넘어서 시대의 성찰로 재해석해 낸 생각의 사투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도덕주의의 옷을 벗겨 낸 사랑의 메시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판 담론으로 제격이다. 그의 일상의 사투는 시대의 사투로 번안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그의 다음 책도 바로 그렇기를 소망한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