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회심과 거듭남을 경험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회심 직후 교회 생활에 엄청난 열심을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안에서 '믿음 에이스(?)'로 등극했다. 그 행진은 당연히 신학대학교로 이어졌다. 신학대학은 '큰' 교회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신앙 면에서는 에이스라는 '신앙부심'(신앙과 자부심을 합성한 말–기자 주)을 가지고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의 부르심 다음으로 강한, 나라의 부르심을 받고 군대에 갔다. 누구보다 신앙으로 군 생활을 잘하리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오히려 신앙의 '모호함'에 헤맸다. 우여곡절 끝에 군대 제대 후 복학하고 교회와 신학교라는 틀 안으로 들어오니, 이전의 경건해보이던 모습들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강력한 '믿음 에이스'가 되어 돌아왔다는 신앙부심이 넘치기 시작했다.

강력한 '믿음 에이스'로 회복되었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와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도 경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가지 않기 시작했다. 특별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 집사님·권사님들을 보면 답답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어 보였고, 전부 현실 속에서 타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이리저리 약함으로 핑계를 대면서 온갖 악함을 행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너무 바빠서 그렇고, 기도하고 싶어도 직장 생활에 치여서 그렇고, 결혼하니까 홑몸이 아니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힘들다는 등, 다 싫었다. 그냥 내 눈에는 오직 '믿음 없음'이었다.

그런 '믿음 에이스'로 살아가던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앞서 말했던 많은 오만과 편견이 산산 조각났다. 이제 내 신앙은 하늘로 솟은 빌딩 같은 '명확함'의 승승장구밖에 없을 테고, '모호함'의 바닥으로 내리 꺼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새로운 바닥을 갱신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 10층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내 안에는 믿음이고 신앙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책상에 앉아 있는 우물 안 성도였을 뿐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신앙의 바닥

신혼 초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의 믿음은 더욱더 새로운 바닥을 갱신했다. 두더지라도 된 듯이 파고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좋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특별히 돈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았다. 그야말로 '모호함'의 절정이었다. 혼자 살고 돈이 있을 때는 내가 바닥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홑몸이 아니고 돈이 없으니 그제야 내 믿음이 바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게 죽을 만큼 싫었다. 먹고 싶은 거 먹지 못하고, 사고 싶은 것 사지 못하고, 가고 싶은 데 가지 못하는 것이 돌아 버릴 것 같이 불편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사치가 좌절된 게 아니라 김밥천국 가서 김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책 한 권, 티셔츠 한 장 살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겪어 보지 않았을 때는 당연히 '왜 돈 걱정을 해?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어련히 채워 주실 텐데. 믿음이 그렇게 없어서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믿음이 없는 나날을 사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돈 없는 나날을 사는 것은 정말 힘겨웠다. 채워 달라고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 같은 멜로디가 되는 것을 느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아 진짜…XX'라고 욕이 나올 쯤에야 간신히 채워주실 때가 있었고 그것 마저도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채워 주시는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를 만큼 애매하기 짝이 없는 액수도 있었다.

돈 문제 뿐이 아니었다. 책상에서 몇 시간이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매일매일 순간순간 같이 사는 존재인 아내에게 꾸준히 사랑으로 대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연애할 때는 전혀 몰랐다. 충분한 여백이 별거 아닌 그림을 치명적이게 아름답게 만들어줬는데 비해, 결혼은 여백이 거의 없고 모든 부분을 잘 색칠해야 하는데 내 안에 그만한 물감이 없었다. 혼자 지낼 때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는 존재의 바닥에 얼마 안 가서 구멍이 뚫리고 그 속에는 버뮤다 삼각지대와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타임머신 같은 것이 있다면 결혼을 취소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얼른 덮어놓고 감추어 보려고 했으나 금세 다시 드러나고 또 아내를 힘들게 했고, 나 자신도 힘들게 했다.

▲ 믿음 좋은 신앙생활을 하던 내가 '명확함'이라는 버스 대신 '모호함'이라는 버스를 타고 달린다. 나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은 아닐까. (그림 제공 이현숙)

이렇게 매일 새로운 바닥을 갱신하고 있는 모호함 속에서 아내의 몸에는 생명이 심겨졌다. 감사하고 기쁜 일이지만 사실 나는 끔찍했다. 나 같은 사람이 한 생명의 아비가 된다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쩌다가 "파전행전"이라는 것을 연재 하게 되어 '김파전'이라는 호(?)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그것 또한 끔찍한 무거움이었다. 내가 '아빠가 된다'는 사실과 '김파전'이라는 사실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뺑뺑 돌며 나에게 심각한 멀미를 주었다. 이 지겨운, 모호함이라는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키미테도 없어서 토할 것 같은 가운데서 이전에 탔던 명확함의 버스가 심히 그리웠다.

아내가 이것저것 아기용품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목록들을 말해주는데 돈이 정말 없었다. 올해 초 코엑스에서 열린 '베이비 페어'에 아내와 함께 갔는데 거기서 아내와 대판 싸웠다. 돈이 하나도 없는데 계속 '이건 꼭 필요한데, 저것도 꼭 필요한데'라고 중얼거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 폭발했다. 나 역시 아기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없는 무능력에 치가 떨리고 이가 떨리고 마음까지 떨려서 그렇게 싸우고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메이커 옷에 가려져 있었던 맨살

괜히 하나님이 몹시 싫어졌다. 남들은 믿음으로 만사형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 지경인지 서러웠다. 이제 다음 달이면 아내가 출산을 하는데 휴가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족끼리 휴가라는 것을 가본 기억이 없다.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와서 불편한 것을 몰랐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주 중에 어떤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복음과상황>에서 나와 아내의 인터뷰를 읽었다고 하시는 분이었다. 통화를 하면서 울먹거리셨다. 내 아내를 생각하니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했다.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것도 대견한데, 그렇게 힘든 삶을 잘 이겨 내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와서 당연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던 거다. 그래서 나와 다른 불편함을 아내가 꾹꾹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통화를 통해서 마침내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소주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한 지금 나의 삶의 명확함이 아닌 모호함의 연속성 속에서 깨닫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게 그럴싸했던 나의 모습들보다 더 '진짜'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메이커 옷에 가려져 있던 맨살을 이제야 발견하고, 그 맨살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럴싸한 김파전도 아니고, 타고난 로맨티스트도 아니며, 모든 일에 꿋꿋하고 의연하게 잘 이겨 나가는 아이언맨도 아니다.

이러한 모호함의 연속성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마침내 이웃을 돌아보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가끔 삶의 과정들 속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규칙들을 배우고, 그 규칙들을 통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기도 하며 우리는 인간이 되어가지만 그것으로 완전하지는 않다. 아니, 그것만으로 삶의 모든 변수에 대항하기에는 참 연약하기 짝이 없다. 매일매일 바닥을 갱신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아름답고 멋지고 긍정적인 내가 아닌 비참하고 찌질하고 연약한 나이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껍데기가 아닌 진짜 신앙과 믿음이 자라나게 된다. 그 절규와 한숨과 눈물 속에서 책상이 아닌 현실에서의 경건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흔들리는 모습을 그대로 나누기에 십분 솔직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거의 다 달려온 "파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한 번 더 솔직해지고 싶다. 난 그렇게 잘 살고 있지 못하고, 이게 내 맨살이고 쌩얼이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평범한 한 여자를 울리는 평범 이하의 가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가르치는 교훈이나, 권면 같은 것은 택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글을 썼던 것은, 그게 나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군가의 모습,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지식이 부족해 무엇 하나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시간들이 얼마나 더 나아질지,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날이 과연 올지, 태어날 아이 세음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과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함의 연속인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알지 못하나, 나를 아시는 그분을 미약하나마 신뢰하며, 아니 신뢰하지 못할 때도 나를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장그래처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언젠가 모호한 이 순간이 하나님의 명확한 신의 한수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신의 한수를 기대하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보다 나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멋진 계획이 있으실 거라 믿는다.

교회 미생 김파전이 교회 미생인 당신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금이나마 김파전의 찌질하기 짝이 없던 나눔이 작은 위로가 되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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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2030들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라는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 편집자 주  

*김파전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mukhyan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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