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도 목사 365 묵상집 - 진리를 드소서> / 정재헌 편저 / 행복미디어 펴냄 / 1,064쪽 / 3만 3,000원

190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19년 경기도 개성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정치적 투쟁에 투신해 온갖 고초를 겪은 이가 있습니다. 1928년 끝자락부터 1930년 말까지는 강원도 원산과 황해도 재령과 평양 산정현교회는 물론, 위로 북간도 연길에서부터 아래로 경남 통영까지 범교단적 부흥 운동과 기도 운동을 벌였던 이죠.

이용도(李龍道) 목사가 바로 그입니다. 그는 1933년 10월 2일 그의 나이 33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예수님처럼 3년 동안 온 열정을 쏟아내 사역한 인물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흥 운동과 기도 운동에 그만큼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 또 있을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총독부에 정식 교단으로 등록한 '예수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으로 알려져 있죠.

산정현교회의 4대 담임목회자요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평양 형무소에서 47세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도 이용도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주기철 목사가 존재하기까지 아내 오정모 여사의 역할이 지대했죠. 정의여고 출신 오정모 여사는 학교에서 이용도 목사가 인도하던 집회에서 큰 도전을 받았고, 강규찬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그 시절의 이용도 목사 집회에서 성령님의 일사각오 신앙심을 불태웠으며, 그것이 옥고를 치르고 있던 주기철 목사에게 더욱 뜨거운 순교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죠.

"①고(苦)는 나의 선생. 고통이 올 때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평안할 때보다 더 배우는 것이 많으며 또 참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②빈(貧)은 나의 애처.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부보다 착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③비(卑)는 나의 궁전. 나는 높은 데 처하여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 처하여 있어야 됩니다." - <이용도 목사 365 묵상집> 494쪽.

정재헌의 편저 <이용도 목사 365 묵상집 - 진리를 드소서>(행복미디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용도 목사가 쓴 일기와 편지, 설교와 묵상, 여러 일화 등을 통해 그가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산 모습, 전국적인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모습, 그러나 억울하게 무교회주의자로 낙인찍힌 모습,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다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죠.

신비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이용도 목사는 어디로 보나 선생이자 학자다웠다고 하죠.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는 감신대의 전신인 협성신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영어 백과사전을 사랑했고, 일본어로 된 책도 읽었고, 학창 시절부터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고, 조선 각 교파들이 함께 쓸 성경 공과의 6개월 치를 영한 번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양은 물론 서양의 문사들까지도 섭렵할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왜 신비주의자의 옷을 입히게 됐을까요? 이 책을 보면 재령 집회 때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은 이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촉발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그 집회에 허름한 도포와 신발을 신고서 불같이 쏟아 내는 그의 설교에 도전받은 교인들에 반해, 그 지역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반감되는 걸 내다보고 그를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운 것이었죠.

"나는 창기에게서도 배움이 있는 자요, 난봉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무식한 자에게서나, 불교인에게서나, 무교회주의자에게서나, 누구에서든지 다 배울 바를 찾는 자이외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어떤 때 저희의 어떤 점보다 못한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겸손히 저희에게서 이를 배우지 아니치 못합니다. 인형, 우리는 삶에 거합시다. 설교, 문서 다 좋지만, 그 뒤에 우리의 삶이 없으면 이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외다. 우리 삶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게 합시다. 10월 20일." - 499쪽.

이는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몰아세운 데 대한 괴로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황해노회는 다섯 가지 문제점을 들어 이용도 목사에게 금족령을 내렸다고 하죠. 재령교회를 비방한다는 것, 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한다는 것, 불을 끄고 기도한다는 것, 교역자를 공격한다는 것,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청년들에게 선전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죠. 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도의와 상식을 넘어선 트집 잡기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트집 잡기는 평양노회에까지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용도 목사를 거짓말쟁이이자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이로,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이자 파괴주의자로, 심지어 그를 단에 세우면 본 교회 담임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 길이 막연해진다는 막말을 퍼트렸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읽어 나가는 사무엘상의 엘리와 사무엘을 대조해서 보는 것 같아요. 나이가 많아 노구(老軀)가 비대해질 정도로 비대해졌고 영적 침체기의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 엘리의 영성이 이스라엘 사회를 전반적으로 암울하게 하던 때였죠. 그러나 어린 사무엘은 그 속에서도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 시작했죠.

사무엘이 그렇게 하나님의 존중(삼상 2:30b)을 받게 된 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한나의 신앙심에 기인한 일이기도 하죠. 엘리와 두 아들 곧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달리, 한나는 하나님의 제사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책임과 의무를 신실하게 감당했고, 자신에게 주신 아들과 소유물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지 않은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죠.

하지만 엘리와 그의 두 아들 곧 홉니와 비스하스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존재하지 않았죠. 아니,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이가봇’(삼상4:21)의 상태였죠. 어쩌면 이용도 목사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은 게 그만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까닭이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한국교회 목회자들도 예배를 통해 정치적인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 주어진 책무를 겸손히 감당하고, 자식과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바꿔 말해 이용도 목사처럼 고난(苦)과 가난(貧)과 겸비(卑)를 스스로 취한다면, 한국 사회로부터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그 당시 고난과 가난과 비천함을 몸소 실천한 이용도 목사를 왜 감리교단은 보호해 주지 못했던 걸까요? 정통 장로교회에 비해 힘이 약했던 이유였을까요? 아니면 같은 교단 내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요? 그래도 66년 만인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3회 총회에서 그에 대한 명예 복직이 만장일치로 이뤄졌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이용도 목사를 바르게 알아 갔으면 해요. 그래서 오직 일사각오의 신앙 자세로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 그의 순수한 신앙심, 전국적인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을 주도한 그의 결사적 예수 신앙심, 불교인이나 무교회주의자나 그 누구에게서든 배울 바가 있다면서 기꺼이 겸손한 자세로 배운 그의 지성의 세계 등, 그의 순전한 신앙심을 올곧게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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