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하늘과 새 땅> / J. 리처드 미들턴 지음 / 이용중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492쪽 / 2만 3,000원

J.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새물결플러스)은 예수님의 재림 혹은 지구 종말과 더불어 임할 하나님의 나라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곧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나라를 이룩하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변혁적-총체적 종말론 되찾기'인 것도 그런 연유다.

나도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내세 지향적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막10:30, 눅18:30)을 견지하는 게 그렇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면류관(딤후4:8, 계22:12)과 권세(눅19:17, 딤후2:12)도 바라본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생'과 '상급'을 목적으로 하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없을까? 있다. 지극히 내세 중심적인 신앙생활만 하는 게 그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 이 세상에서부터 혈통적(요1:12)으로 법률적(갈3:26)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다시 말해 그 심령에서부터(눅17:21)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그의 삶을 영생의 일부로 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삶이 그것이다.

하지만 성숙치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저 하늘 나라만 동경한 채 이 땅에 주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세속적인 일, 곧 죄악으로 간주해 버린다. '주님의 기도'(마6:9~13)를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며 고백하면서도 그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할 꿈조차 품지 않는다. 그게 큰 문제이다.

"인간의 창조와 목적을 다루는 - 창세기 1~21장이나 시편 8편, 심지어 시편 104편 같은 - 성경 본문들을 살펴보면, 그중 어느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예배는 인간의 유일무이하거나 독특한 특징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세계관에 따르면 산과 별도 인간과 똑같이 하나님을 예배한다." (62쪽)

이는 1장의 '내세적 소망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문화적 소명'을 이야기한 그의 신학적 견해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데 있는데, 그것은 단지 예배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든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인간의 현세적 삶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의 유혹과 더불어 타락한 인간세계를 하나님께서는 중시조 노아를 통해 다시금 사명을 이어받게 하셨고, 그 후 바벨탑의 단일 문화 세계를 복잡한 다문화 세계로 흩으셨고, 그 속에서도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 문화를 잇도록 아브라함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아 전 세계와 가교를 이루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모세와 사사들과 왕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저자는 왜 구속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인간의 삶 자체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에 견줄 만큼 중요하게 다루는 걸까? 그것이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요, 이 땅에서부터 추구해야 할 영생의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가 토라만큼 지혜 문학에 비중을 둔 것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행함의 도'(마 7:21)를 강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지나친 현실 세계, 타락한 지상 세계를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자 한 게 문제점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고전적으로 그려 온 내세의 천국이나 낙원을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차용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고 있고, 성경에 나와 있는 '셋째 하늘'(고후12:2)이나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 계21:1)에 관한 본문들도 고전적인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들로 채우고 있는 까닭이다. 더욱이 믿지 않는 자의 심판과 형벌에 관해서도 '소멸'로 바라보는 관점이 신선하긴 했지만 나와 같은 이들에겐 생뚱맞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불가사의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온유한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5:5)에서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지막 심판이 우주적 상속권 박탈, 즉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로부터의 영속적인 추방과 비슷하다는 뜻인가? 이는 마지막 심판을 영원한 고통이라는 고전적 개념보다는 당사자의 소멸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311쪽)

그만큼 그는 저 천국이나 낙원, 지옥이나 음부보다는 지금 이 땅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논의를 위해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톰 라이트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세계의 하나님나라를 강조하면 그와 대비되는 천상 세계의 하나님나라는 필요 없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결되는 구원의 완전성보다 인간의 구원 능력만을 앞세우는 문제점이 남게 된다.

특별히 이 책 말미에는 '총체적 종말론' 곧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에 관한 교회사적인 흐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세대주의자인 존 넬슨 다비와 드와이트 L. 무디가 강조한 '휴거 예찬론'이 있는데, 이는 1970~1980년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 것이었다. 나도 그 시절에 '휴거'에 맹목적으로 빠져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바로 살아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숙한 목회자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재림이나 종말 후에만 가는 저 하늘나라로 국한하지는 말자. 언제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임할지 모르지만, 언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날 동안 '무천년설'에 입각하여 이 땅에 주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데 최선을 다하며 살도록 하자. 그것이 영생과 맞닿아 있는 삶이니 말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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