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는 얼마일까? 당연히 2+2=4라면서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런데 저 멀리 한 아이가 2+2=5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또 다른 아이는 2+2=22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배운 어른이라면, 기상천외한 대답들을 내놓는 그런 아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 <왕비와 수도사와 탐식가> / 샤피크 케샤브지 지음 / 김경곤 옮김 / 궁리 펴냄 / 428쪽 / 1만 8,000원

하지만 인생사는 다르다. 인생에 대한 정답은 어느 누구도 하나로 귀결할 수 없다. 영과 물질,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부와 가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그것들에 관한 질문들을 어찌 수학 공식과 답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샤피크 케샤브지의 <왕비와 수도사와 탐식가>(궁리)가 그런 점들을 대변한다. 이 책은 유물론, 일체론, 일신론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세 사람의 '신념 토론 대회'를 보여 준다. 무신론자인 생물학 교수, 동양의 지혜를 전하는 요가 수행자, 신앙심 깊은 여성 수학자요 신학자가 각각 토론장에서 3일 동안 설전을 벌인다.

물론 그들 세 사람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 책에는 왕과 수도사의 관계, 왕비와 탐식가의 관계, 그리고 공주와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 등,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한데 얽혀 있다. 그만큼 단순한 토론 과정을 넘어, 왕의 시해 음모 사건, 공주의 건강 문제 등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왜 그렇게 복잡한 추리소설 형식으로 썼을까? 신념 토론 대회의 토론자로 나선 세 사람뿐만 아니라 그 토론회에 참석한 왕도, 왕비도, 공주도, 그리고 수도사와 탐식가나 광대도 실은 인생의 복잡한 그물망과 같은 구조 속에서 각자의 인생사를 정리하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세 가지 신념들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알리고자 함에서다.

이른바 세상은 과학적 원리로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샤를르 생물학 교수도, 또 세상을 일체론으로 바라보는 인도 철학자 겸 요가 수행자인 라다도, 그리고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겸 수학자인 아나스타시아도,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주장의 사고 패턴을 가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만큼 삶의 다양한 변주곡들을 경험하면서 자기만의 철학으로 귀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요가 수행자인 라다도 그렇다. 그녀는 탐식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의 어려움과 고민들을 털어 놓았다. 7년 동안 티벳 불교에 빠져 라마의 가르침을 따르며 수행자의 삶을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그 스승과 실제적인 성관계를 갖는 걸 육체의 정화요 산화요 의식의 해방으로 여긴다는 것 말이다. 그를 통해 그녀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아나스타시아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 남동생과 관련한 불량배들에게 당한 성폭행으로 인해, 장시간 수술까지 해야 했고, 남자 친구와 이별하는 아픔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런 고통과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신앙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삶이 단순한 분자의 합이라면 어찌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으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을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신 존재의 근원에 더 한층 그녀가 다가섰다는 뜻이다.

"그는 금속 통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 손잡이가 달린 고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단상 위를 걸으면서 엄청나게 큰 비눗방울을 만들어 냈다. 비눗방울이 천장을 향해 올라가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기뻐 날뛰었다. 그리고 방울이 터지자 머리를 푹 처박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광대는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삶이란 생겼다가 날아가고 또 사라져 버리는 그런 덧없는 의식의 방울이랍니다.'" (163쪽)

토론회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익살스런 광대의 모습을 그려 낸 부분이다. 3일 동안 진행되는 세 사람의 신념 토론 대회가 무겁게 진행되지 않도록 그런 장치를 끼워 넣은 것이다. 400쪽이 넘는 이 책을 무료하지 않고 재밌고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추리소설 형식의 이야기 전개가 그만큼 박진감 넘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위 그림은 그 유명한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C. 에셔)가 그린 것이다. 이 책 속 세 명의 토론자 중 아나스타시아가 인용한다. 그녀가 왜 이 그림을 인용했는가? 논리학자의 대가인 괴델의 수학 체계 안에도 결정할 수 없는 것과 입증할 수 없는 것이 담겨 있다는 걸 이 그림으로 설명코자 함이었다.

그만큼 이 책을 읽다 보면 세계적으로 뛰어난 논리학자와 과학자와 수학자, 동서고금의 고전들도 마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책을 쓴 샤피크 케샤브지의 지식 체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스위스 보 주(州)에서 개신교 목사직을 15년간 역임했다는 그의 학문 탐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목회자도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욱 도전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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