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딸 다윤이… 가정 예배드릴 때… '엄마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했던 딸입니다. 1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실종자 가족들 하루하루 피가 마르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가족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5일 광화문광장서 열린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2015 부활절 연합 예배' 때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가 한 말이다. (관련 기사: 세월호 잊지 않은 기독교인 500명, 광화문광장서 부활절 예배)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어디에서 다윤이를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안에 다윤이를 비롯한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 그래서 이들을 지칭하는 말도 실종자에서 미수습자로 바꿨다. 행방불명된 게 아니라,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데 수습이 안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4월 22일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했다. 봄이 지나고 한여름이 찾아왔지만 세월호는 아직도 9명의 미수습자와 함께 바닷속에 있다. 온전한 선체 인양은 언제 이뤄질지, 미수습자 가족들은 뼈 한 조각이라도 건져 자신들도 유가족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속이 타 들어가요. 좋은 날씨는 계속 가고 있는데 아직 정부의 인양 작업이 더디기만 해요. 이제 인양에 참가할 업체 공개 입찰이 끝났어요. 이 속도로 진행되다가는 내년 2월, 친구들 다 졸업할 때까지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에요."

7월 14일, 서울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다윤이 엄마 박은미 씨를 만났다. 다윤이 아빠 허흥환 씨도 함께였다. 두 달 전부터 광화문광장에서 노숙하는 아빠는 오랜만에 안산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부부는 지난 2월 16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11시 30분, 청와대 분수 광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 중이다. 

"대통령님, 마지막 한 명까지 구조한다 하셨잖아요"

▲ 매일 아침, 청와대 분수 광장에 도착한 다윤 엄마가 하는 일은 피켓에 쓰인 숫자를 고치는 일이다. 숫자는 매일 하나씩 더해지는데, 다윤이는 아직도 세월호 속에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청운동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골목을 지키는 경찰도 다윤이 부모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별다른 제지 없이 청와대 분수 광장까지 들어갔다. 박은미 씨가 한쪽에 서서 피켓을 펼쳤다. 박 씨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피켓에 있는 숫자를 고치는 것이었다. 다윤이가 수학여행을 떠난 지 벌써 455일(7월 14일 기준)이 지났다. 엄마는 마지막 4를 지우고 5로 고쳐 썼다. 

먼저 피켓을 들고 선 것은 다윤 엄마다. 엄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위태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실 다윤 엄마 머릿속에는 작은 종양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있기 2년 전 '신경섬유종'이라는 병을 진단받았다. 그 후,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종양의 크기와 상태를 점검받는다. 참사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뇌압이 상승해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다윤 엄마는 서 있는 것도 힘들지만 매일을 '깡다구'로 버틴다고 했다.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 딸을 찾기 위해서다. 

▲ 박은미 씨는 피켓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는다. 2년 전 진단받은 '신경섬유종'이 몸을 더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해가 점점 뜨거워졌다. 힘든 엄마를 대신해 다윤 아빠 허흥환 씨가 피켓을 대신 들었다. 허 씨는 작년 세월호 사고 이후 생업도 마다하고 진도에서 다윤이를 기다렸다. 아이를 찾아 돌아가는 부모들 사이에서, 아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지난 11월 정부는 실종자 수색을 종료했고, 부부는 안산으로 올라왔다. 지난 2월부터는 다윤이 엄마와 함께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 오고 있다. 

"작년 12월 말을 기점으로 회사를 그만뒀어요. 지금도 회사에서는 돌아오라고 전화가 오지만 갈 수가 없어요. 자식도 못 찾고 어떻게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태풍이 막 지나간 후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늘도 없이 온 몸으로 직사광선을 받아 내던 아빠는 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아무리 더운 날씨라고 해도 시위를 건너뛸 생각은 전혀 없다. 실제로 비바람이 몰아쳐도 쉬어 본 적이 없다. 허흥환 씨는 오히려 비 오는 날이 시위하기 편하다며 웃었다. 

얘기하던 중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단 여성이 지나갔다. 여성은 피켓을 든 다윤 아빠를 보고 잠깐 멈춰서 눈인사를 나눴다. 다윤 아빠는 갈 길을 마저 가던 여성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는 "저렇게 세월호 리본을 단 사람을 보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요. 없던 힘도 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 정오가 다가오면 다윤 아빠 허흥환 씨가 피켓을 이어 받는다. 지난 2월부터 벌써 5개월째 청와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지만, 정부의 인양은 더디기만 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다윤 엄마는 6월 초부터 메르스 때문에 관광객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지난주부터 한국 관광객이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중국인들도 제법 눈에 보였다. 다윤이 부모님의 피켓에는 중국어도 써 있다. 세월호 사고를 설명하고 딸 다윤이가 바닷속에 있다는 내용이다. 이날도 두 명의 중국인이 다가와 유심히 피켓을 읽어 보고 갔다. 다윤 아빠는 중국 사람들이 와서 자신과 피켓을 번갈아 가며 쳐다 볼 때면, 처음에는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속상했다고 했다. 피켓 들고 자리를 뜨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세월호에 있는 다윤이를 생각하면서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1시간이 흘러 부모님은 피켓을 접고 다시 청운동 주민센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른 희생 학생들의 어머니가 피켓을 들고 있었다. 한 어머니는 길 가던 어르신이 수고한다며 주고 간 에너지 드링크 세 병을 들어 보였다. 엄마들은 이런 작은 행동 하나에 큰 힘이 난다. 

주민센터 인근 국수집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다윤 어머니와 희생 학생 어머니 세 명은 서둘러 홍대입구로 향했다. 홍대입구역 인근에서는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가 진행 중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홍대입구역 인근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세월호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아 주세요.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 

▲ 홍대입구역 인근에는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오후 2시부터 홍대 인근에서 피켓을 들고 행인들에게 세월호를 알리고, 노란 리본을 나눠 준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박은미 씨에게는 유독 아이들이 눈에 띈다. 다윤이도 교복을 입은 아이였다. 맑고 순수한 성품을 지녔던 다윤이는 친구 좋아하고, 애완견 좋아하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소녀였다. 

서 있기가 힘든 다윤 엄마와 자리를 옮겨 근처 벤치에 앉았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다윤이 엄마는 교회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다. 혹시나 교회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다가 딸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될까 걱정했다. 그만큼 엄마는 하루 빨리 딸을 찾을 수 있기를 자나 깨나 바라고 있다. 

임직식 전 찍은 사진이 마지막 가족사진이 될 줄이야

박은미 씨는 다윤이의 교회 생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 다윤이 가족은 교회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일상처럼 지내던 시간이 추억으로 남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윤이는 교회 열심히 다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가정 예배 드렸거든요. 저희는 매번 식구 네 명이 돌아가면서 기도했는데요. 다윤이는 기도하는 거 싫어했어요. (웃음) '오늘 기도할 사람은 너야'라고 하면, 자기 성경책에 기도문을 미리 써 놓고 읽곤 했죠. 다윤이가 기도하면 내용은 짧아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더라고요. 교회에서 다음 주에 대표 기도하라고 하면, 제가 같이 써 주고 그랬죠.

지금 생각하면요, 평범하게 사는 게 참 힘들어요. 지극히 평범한 삶, 그게 정말 힘든 거였어요. 우리 다윤이가 잠이 많아서, 아침마다 깨워서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애 보내고 나면 저는 교회로 갔죠. 목장 리더 하면서 목사님들이랑 잘 지냈고,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 가 있었죠. 가족 모두가 평범하게 생활했는데요, 이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무너졌어요."

박은미 부부는 다니던 교회에서 임직을 받을 예정이었다. 임직식을 앞두고 교회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박은미 씨는 이 사진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사진 제공 박은미)

박은미 씨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 줬다. 부부와 두 딸이 정장을 차려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작년 사고가 나기 전 찍은 사진이다. 작년 4월 27일, 부부는 임직을 앞두고 있었다. 가족사진은 임직식 전에 교회에서 찍어 준 것이었다. 임직식을 열흘 남겨 놓고 사고가 났고, 그게 마지막 가족사진이 되었다. 

"세월호 사고 전에는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세월호 이후로 우리 삶이 송두리째 바뀐 거죠. 사고 후 진도에 내려갔을 때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교회도 못 갔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다윤 아빠랑 같이 예배에도 가고 기도도 하러도 갔죠. 수색 종료해서 안산에 올라오고 난 후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배 드렸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만난 목사님들이 저희가 미수습자 가족인 걸 아시고, 오히려 저희를 힘들게 한 경우가 많아요. 한결같이 비슷한 말씀만 하시더라고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위해서 기도하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 그것도 맞는 말씀인데, 기도 후에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게 기도 아니에요? 기도하고 끝났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 주셨으면 더없이 좋겠어요. 주보에 '세월호 속에 아직도 사람이 있습니다. 조속한 선체 인양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런 문구 하나만 넣어 줘도 좋을 텐데, 그런 부분이 참 안타까워요."

박은미 씨는 요즘 들어 자꾸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지난 3월 불교계에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오체투지 하는 걸 보는데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이후 진도체육관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대형 교회 목사 아내를 만났다. 박 씨는 그에게 "하나님은 뭐 하시는 거냐. 왜 교회는 가만히 있는 거냐. 저들은 저렇게까지 하는데, 왜 교회는 나서지 않고 골방에만 있느냐"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말을 전하는 그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제가 꼭 백 마리 중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처럼 느껴져요. 지금은 교회를 안 나가더라도 나중에 인양 문제가 해결되면 꼭 교회로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 같아서는 선뜻 간다고 말을 못 하겠어요. 세월호 유가족들 중에 교회 다니던 사람들도 거의 교회 다니던 못 가고 있어요. 세월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부모들이 원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게, 신앙인들이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진도에서 들은 하나님 음성, '딸아 미안하다'

교회와 목사에게 상처받았지만 이 어려움을 견디게 해 주는 것 역시 신앙이다. 

"내가 평생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기대했던 건 단 한가지였어요. '하나님 사랑 알고 싶다, 십자가의 그 사랑이 알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라는 의문이 드는 거죠. 처음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는 하나님 원망하고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더라고요. 우리 다윤이만 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요. 

진도에서 새벽 기도 가서 '하나님, 왜요? 딸 잃은 것도 죽을 것 같은데, 왜 우리 딸은 안 나와요? 왜 저에요?'라고 진짜 말 그대로 하나님한테 '땡깡'을 좀 부렸죠. 엉엉 울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그런 음성을 주시는 거에요. '딸아 미안하다.'" 

▲ 지난 7월 14일,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홍대입구에서 세월호 선체 인양 촉구 피켓 시위를 한 사람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다윤이 부모님을 돕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다윤이 엄마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수색 종료하고 안산에 올라와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하나님, 저 포기 못합니다. 다윤이 찾는 거 절대로 포기 못해요.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나도 다윤이 찾을 때까지 포기 안 하고 계속 기다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죠. 내가 교회도 못 가고, 예배도 안 드리고, 기도 생활도 못 하지만 나랑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걸 확신하니까 버틸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아파할 때 나보다 더 많이 아파하시는 하나님.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가 버틸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요, 버티다가도 너무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저 그냥 데려가시면 안 되겠어요?' 이렇게 중얼거려요. '그냥 하나님한테 빨리 가고 싶은데, 내가 진짜 죄송하기는 한데요. 내일 아침에 눈 안 뜨게 해 주세요.' 자기 전에 이렇게 기도한 적이 많죠."

흐르는 눈물을 닦던 박은미 씨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얘기했다. 한국교회에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지만, 아쉽다고만 할 게 아니라 자기가 더 도와 달라고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했다. 다윤 엄마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세월호에 아직도 9명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빠른 인양을 촉구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청와대·홍대·광화문광장에 와서 피켓 들라는 게 아니에요. 누구든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한 번만 더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는 거예요. 요즘 SNS가 워낙 발달해 있으니까, A4 용지에 '세월호에 아직 다윤이가 있습니다'라고 미수습자 이름 하나씩 써요. 여러 명이 그거 들고 사진 찍어서 올리고 릴레이로 이어 가는 거죠. 그렇게 하면 많이 퍼져 나가잖아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몰라요. 교회에 있는 분들도 모르는데요, 뭘.

대학생들은 방학도 했으니까, 젊은이들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같이 피켓 들어 주고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요. 그것까지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평소 자기가 생활하는 곳에서, 주변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세월호 문제를 알려 줬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청와대·광화문광장·홍대에서 드리는 예배

▲ 박은미 씨는 신앙의 힘으로 버티면서 딸을 찾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힘들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다. "하나님 그냥 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뉴스앤조이 이은혜

어느새 시계는 오후 3시 30분을 가리켰다. 다윤 엄마 일행은 다시 광화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화문에는 피켓 시위를 마친 다윤 아빠가 있었다. 아빠가 무슨 이야기 나눴냐고 궁금해한다. 신앙 얘기를 했다고 하니 허흥환 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저도 세월호 사건 전에는 뉴스에서 어디 사고 났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요. 사고가 난 현장에 직접 와서 여러 측면에서 이 일을 보게 되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교회도 현장에 와 줬으면 하는 거죠. 교회는 맨날 기도해 준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기도'만' 하는 게 문제예요. 그건 당연히 하는 거고 현장에 와서 손 한 번 잡아 주면 좋잖아요. 광화문에 유명한 목사님 모셔다 집회 열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한번은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자기한테 와서 기도 받고 가라고 하대요. 아니 내가 가서 기도 받고 오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나 데려다가 기도해 주고 사진 찍고 그러면 정부랑 다를 게 뭐 있어요. 그래서 나를 부르려고 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했어요. 영향력이 그렇게 크신 분인데, 영향력을 좀 끼쳐 달라고."

허흥환·박은미 부부는 앞으로도 매일 피켓을 들 예정이다. 오전에는 청와대 분수 광장에서, 오후에는 광화문광장과 홍대입구역에서 사람들과 만날 것이다. 다윤 엄마에게 피켓을 드는 일은 단순히 세월호의 인양을 촉구하고 사람들에게 리본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이다.

"사실 참사 이후 우리 가족은 교회에 못 가고 있어요. 피켓 시위를 쉬는 주일에 집에서 세 식구가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요. 저는 제가 피켓을 들고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실 거라고 믿어요. 그러면 그게 예배가 아닌가요. 길거리에서 드리는 예배."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