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사역지야 연말마다 들고 나는지라 괜찮지만, 전임 사역지는 여전히 구하기 녹록지 않은 시절이다. 물론 담임 사역지는 훨씬 어려운 상황이다. 사역지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이 다각화되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주창되었고 나름의 결과물도 있었지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그대로다. 마치 한정된 목초지에 여러 목장들이 경쟁적으로 규모를 확장하는 바람에 파국을 맞게 되는 '공유지의 비극'과도 같은 상황이다. 형국이 이렇다 보니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곳에 정착해 안정된 목회를 펼치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위임을 받는 목회자들의 표정에는 하나 같이 사역의 세월을 추억하는 흔적이 묻어난다. 이와 같은 위임은 소신 있게 자신의 목회 철학을 펼칠 수 있는 기회와 장을 제공받는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아울러 위임의 자리에 오기까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구축했다는 것이 전제되기에, 이는 신뢰에 대한 상징성을 지니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이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한 목회 철학을 펼치는 미담들을 전해 듣는다.

그러나 못지않은 빈도로 '신뢰의 상호 관계'가 '권력의 상하 관계'로 역전되는 사례를 접하기도 한다. 이는 위임받은 목회자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관계적 역량을 기반으로 목회를 수행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 현상이다. 심지어 이를 마치 새로운 사역지에서 적응하고 목회 역량을 펼칠 때까지의 정석적인 과정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구축될 때까지는 마찰을 일으킬 만한 변수를 제안하지 않다가, 막상 신뢰 관계가 구축됐다고 생각하면 마찰의 소지가 있는 변수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목회 철학이니 이해해 달라며 강행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설득의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신뢰라는 이름의 '프리 패스 카드'를 활용했으니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수긍하고 따르는 입장에서는 찝찝함이 남는다. 사실 성도의 입장에서 인지하는 신뢰는, 목회자가 목회적 자취에서 보여 준 흔적에 대한 공감과 지지의 차원이지, 매 순간 다양하게 직면하는 의사결정의 맥락과 국면에서 목회자가 제안하는 바에 대한 전적인 동의를 표하는 차원이 아니다. 즉, 신뢰라는 가치를 바라보는 상호 간의 관점의 차이가 간극을 만드는 셈이다.

영국의 사회 혁신가로 알려진 제프 멀건(Geoff Mulgan)은 그의 책 <Good and Bad Power: The Ideals and Betrayals of Government>를 통해 권력의 근원인 '폭력·금전·신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때 그는 세 가지 근원 중 권력 행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뢰를 발생시키는 사고를 지배하는 권력'을 지적했다. 즉 '신뢰'란 강력한 권력의 근원으로서 기능하는데, 사고를 지배하는 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작동되는 산물로 본 것이다. 물론 기계적으로 사고에 대한 권력화 과정이 늘 앞선 단계고 신뢰가 뒤 이은 단계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신뢰가 구축된 관계 속에서는, 신뢰라는 송수관을 통해 상대방의 사고에 대한 권력화 과정이 반복적으로 수행된다. 때문에 신뢰는 분명 상대방에게 행사하는 권력으로서의 한 단면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뢰를 구축했으니 설득이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자신의 의지를 내비치지만, 사실 설득에 이면에는 권력이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이러한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자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신뢰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에 담긴 배신감은 어쩌면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신뢰했다는 것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는 언제나 권력의 작동을 야기한다'는 식으로 신뢰와 권력 간의 관계를 단선적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뢰의 가치를 부여해 준 이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의도적으로 신뢰를 들먹이는 경우는 명백한 권력의 작동이다. 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수평적 관계를 의지 관철을 위한 수직적 관계로 전복하는 행위다. 즉,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이야기한 '헤게모니'의 개념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 앞서 언급한 목회 현장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애초부터 권력을 작동하기 수월한 수직적 관계를 구축하고자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쌓아 나간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다수는 그렇게 농후한 의도성을 갖고 이와 같은 맥락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회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신념에 따라 사역을 하면서도 때로는 효율성이라는 심리적 압박 앞에 직면하면서 신뢰를 기저에 둔 권력의 작동을 이따금씩 활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맥락을 취한 이들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 성찰의 측면에서는 분명 시사하는 점들이 있다. 다시 말해 적어도 올곧은 목회의 흔적을 남기고자 애쓰는 이들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옷깃을 여밀 만한 단초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를테면 신뢰의 가치를 권력의 작동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 양 재촉하는 효율성의 유혹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도록 제어하는 힘이 하나요, 신뢰를 등에 업고 프리 패스를 남발하며 질주하는 동역자들의 속도감 앞에서도 자족하는 자신의 모습을 찾는 힘이 또 다른 하나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론적 성찰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이 죄에 대한 인식론적 직면과 돌이킴에서부터 출발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또한 나름의 의의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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