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6일 미국 대법원은 교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동성 결혼은 미국 헌법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합중국인 미국은 그동안 워싱턴 D.C.와 36개의 주에서만 주법으로 동성혼을 인정해 왔지만, 연방 차원에서 합헌 결정을 내리게 되어 이제는 미국령 전 지역에서 동성혼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2001년 세계 최초로 인정한 이래 미국까지 이러한 조류에 참여해, 지금은 세계 21개국이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상태다.

이러한 결정은 성경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생각이 달라진다 해도 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믿는 우리로서는, 세계가 계속해서 불신앙의 길로 달려가고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는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척 실망스럽다.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이 미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이런 결정이 이루어진 데에는 미국 사회의 의식 변화를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예전에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는데, 지금은 동성애에 대하여 용인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60%가 넘는 사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사회에서 보수적인 신앙이 퇴락하고 교회 내에서조차 동성애를 용인하는 자유주의적 분위기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당연히 성경을 그들의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성애에 대해 "그게 도대체 왜 나쁜 거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성경적인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한 것이라고 항변하였지만,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었다. 동성애가 가져오는 폐해에 대하여 선전했지만, 대부분 동성애자는 그러한 주장들에 반박할 만한 나름대로의 논리를 개발했고, 더 나아가 성 소수자들이 부당하게 차별받는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 됨(e pluribus unum)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미국 사회에, 동성애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냥 다른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때에야 미국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결과일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수를 따르지 않는 소수를 이단자로 생각하고 심지어 왕따 시키는 문화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발을 붙일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다양성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인정하게 될 날이 멀지 않다. 동성애 지지자들이 이러한 가치 속에 동성애를 인정받으려고 할 때, 비록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용인하려는 태도가 생겨나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을 따라갈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동성애 운동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오늘날 기독교 일각에서 벌이는 동성애 반대 운동은 동성애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동성애가 퍼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성애에 동정적인 여론만을 만들어 내는 역효과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퀴어 축제가 열릴 때, 그것을 물리적으로 방해하거나 정치적인 또는 행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축제 자체가 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퀴어 축제를 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동성애 흐름을 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저들은 자신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홍보하면서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자 편이니까 말이다.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떠드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퀴어 축제를 하든 말든 무슨 짓을 하든 말든 크리스천들은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불신자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5:12). 불신자들의 악행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했다(고전 5:13). 물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죄악을 범할 때, 하나님은 그 죄악을 심판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이방인과 음란의 죄를 저지르던 사람을 죽여 염병을 그치게 한 적이 있었다(민 25:7-8).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길 때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우상을 찍었다(삿 6:25).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하나님의 신정국가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정국가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되 무례하지 않게(고전 13:5) 전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동성애가 죄악임을 우리는 교회 내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죄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외침이나 반대 집회가 아니라, 우리의 성결하고 구별된 삶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주변의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신교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유일신 종교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음란하고 더러운 삶을 살던 사회 속에서 유대인들의 구별된 삶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다들 술과 담배에 찌들고 흥청망청거리며 살아갈 때, 크리스천들은 금주 금연을 실천하며 단정한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영향력이 없는 것은 우리가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처럼 기독교적 주장이 널리 들리고 있는 때는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음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탐욕 가운데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습에 불신자들이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성경적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면, 이것처럼 매력적이고 이것처럼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동성애는 아무런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삶은 잠시 잠깐 즐거워 보이지만 결국에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을 사랑으로 기르는 아름다운 가정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반동성애 운동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미국과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는 일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 있다. 사회의 법은 성경적 가치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혼과 간음을 금하고 있지만 사회의 법은 용인하고 있으며, 성경은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금하고 있지만 사회의 법은 규정 자체가 없고, 성경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사회의 법은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어쩌면 동성애 문제도 사회의 법으로 용인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경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선출하여 사회의 법도 성경적인 가치관을 담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겠지만, 이러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신실하게 사는 것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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