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전도유망한 청년이 있다. 존 쉴림은 하버드대학 석사 출신이다. 교사 자격증만도 두 개나 된다. 그러나 매번 좌절을 경험한다. 맥주를 활용한 요리법을 담은 책을 발간하려고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지만 매번 거절 편지만 받는다. '주춤거리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존 쉴림의 인생은 주춤거리는 정도가 아니고 영 진도가 안 나간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자리가 없다. 할 줄 아는 일도 많은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고향의 고등학교에서 병중에 있는 교장 선생님의 빈자리를 메우는 임시 교사다. 정식 교사 지원서를 넣는데 정치에 밀린다. 존은 채용되지 않은 이유가 교장보다 더 잘 가르쳐서라고 생각한다.

노력에 비해 되는 일이 없다. 능력에 비해 알아주는 이가 없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그리 독특한 게 아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생각은 아닌가.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존 쉴림이 그랬듯 당신도 애인을 만나면 되니까. 우리의 주인공 존 쉴림은 그 생애 최고의 연인을 만난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 <천국에서 보낸 5년> / 존 쉴림 지음 / 김진숙 옮김 / 엘도라도 펴냄 / 352쪽 / 1만 3,800원

서른 총각을 깨운 아흔 살 애인의 사랑

그런데 상대가 수상하다. 아흔 살의 처녀다. 이름은 '아우구스티노',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따왔다. 애칭은 '거시 수녀님'이다. 수녀와 사랑에 빠진 한 전도유망한 청년의 연애 수첩이라고나 할까. 책 <천국에서 보낸 5년>(엘도라도)은 애잔하면서도 진솔한 둘의 사랑과 인생 담론을 담은 에세이다.

이해인 수녀는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과 잔잔한 감동"이 있다며, "지상에서 미리 체험하는 천국" 이야기라고 말한다. 책에는 인생과 종교에 대한 둘의 진한 사랑의 고백들로 가득하다. 종교적 담론을 싫어하는 이들이라도 마음을 열고 들어가 보면 둘의 인간적인 면모에 흠씬 빠질 수밖에 없다.

고향에 오래된 성 요셉 수도원이 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존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시설이다. 그러나 친구의 소개로 처음으로 수도원 안에 도예 공방이 있다는 것을 안다. 거기에서 존의 운명을 바꿀 한 처녀를 만난다. 그가 그곳에서 40년간 도자기를 구워 온 거시 수녀다.

"뒤에서 비추는 빛을 받으며 150센티미터 남짓 되는 키의 약간 구부정한 수녀님이 서 있었다. 안경을 낀 수녀님은 오래된 수녀복을 입고 계셨다. 길고 까만 베일, 하얀 두건, 중간에 벨트를 맨 까만 상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나무 묵주 그리고 수수한 까만 신발, 다만 한 가지 특이하게도 물감이 여기저기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 <천국에서 보낸 5년> 본문 중

존이 처음 만난 수녀의 인상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하다. 그들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시 수녀에게 배운 인생은 그 이전의 어떤 교육보다 값지다. 없어도 행복한 삶, 실패를 감당하는 삶, 용서하는 삶, 한계를 깨닫는 삶, 행복을 느끼는 삶,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배운다. 거시 수녀의 삶과 말이 바로 교육 시스템이다.

책은 거시 수녀가 죽기 전까지 5년 동안 공방에서 나눈 대화와 깨달음을 적고 있다. 설교가 없는데 진정한 설교가 있다. 성경을 들먹이지 않아도 진정으로 성경이 살아 있다. 40년을 한결같이 도자기를 구웠을 뿐인데 거기 참인생이 있다. 이룬 것이 없는데 성공한 삶이 있다.

행복으로 가는 '황금 입장권'

존은 삶의 무게가 목을 옥죄어 오던 때에 만난 '황금 입장권'이라며 고향에서 "처치가(수도원)와 마우러스가(존 쉴림의 가문)가 만나는 곳에 있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독자라면 가까운 곳에 '황금 입장권'이 있을지 모른다. 찾아보라.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건 대부분 독자들의 행동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중요 글귀들을 분홍 글자로 짚어 주고 있다. 참 친절하다. 너무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아서 다 적을 순 없다. 내가 감동을 얻은 글귀들을 적지 않고 이 책에 대해 말한다면 나를 속이고, 독자를 속이는 것 같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몇 구절은 아래에 옮겨 적는다.

<천국에서 보낸 5년> 밑줄 긋기

"슬픔을 선물로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시간과 인내도 연습해야 한답니다. 연습한다고 해도 항상 잘될 수는 없지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나를 올바른 곳으로 이끌기 위해 일어났다."

"단순한 점은 마침표가 되어 가장 중요한 문장을 끝맺는 힘이 있어요. (중략) 작은 점 하나라도 모이면 별이 가득한 우주랍니다. 모래알만 한 소박한 점은 이렇게 강력하답니다."
"무엇을 꿈꾸든 구체적인 길을 아직 모를 뿐이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떠야 할 때 눈을 감는단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지."
"내 앞에 놓인 길을 잘 볼 수 있게 되더라도 실패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패가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살면서 겪는 모든 변화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단다. 우린 하루에 수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 너무나 사소해서 알아채지 못하는 변화들도 있지만, 분명히 변화는 일어나고 있어.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크고 힘든 변화지. 하지만 비극적이거나 슬프다고, 번거롭다고 여기는 변화는 새로운 시작일 뿐이야. 아흔 살인데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좋은 변화처럼 말이야. 변화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단다."

"두려움을 넘지 못할 두려움이라고만 본다면 막다른 길이 된단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퍼할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슬픔을 어떻게 감싸 안을 것인지 결정할 수 있지."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단다."
"결국 답을 찾아 주는 것은 질문이다."

"여든일곱 살까지만 해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단다. 삶에서 놀라운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언제나 새로운 교훈을 가르쳐 주더구나. (중략) 그게 인생이란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은 내가 떠난 뒤에 다른 사람이 완성하지."

막 시대와의 교류를 위하여 최고학부를 수료한 남자와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전통 깊은 수녀원에서 일생을 도자기와 함께한 수녀의 만남은 아무리 점수를 줘도 그리 후한 점수가 안 나온다. 그러나 둘 사이의 5년간의 사랑은 그냥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서로 보듬고 서로 위로하고, 더 나아가 인생을 공유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진다.

청년에겐 안 보이던 길이 보인다. 수녀에겐 알지 못했던 세상의 신비로움이 즐거움을 준다는 걸 발견한다. 청년은 수녀가 만든 공예품들을 보물처럼 여기며 자신이 전공한 홍보를 매개로 바깥세상에 알린다. 둘의 공존은 둘의 성공이 된다. 청년은 이지러진 꿈을 곧추 세우며 하나하나 성취되는 과정을 통하여 무엇 하나 내 맘대로 안 되는 도자기의 꿈을 반추한다.

"가마를 열기 전까진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도자기들이 내 기대대로, 내 기대 이상으로 예쁘게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도자기들은 손쓸 수 없을 만큼 깨지기도 한답니다. 어떤 경우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천국에서 보낸 5년> 본문 중

그랬다. 어느 인생인들 비가 내리지 않으랴. 어느 인생이든 자신의 뜻한 바대로 되랴. 그러기에 살아 볼 만하지 않겠는가. 뜻한 대로 되는 인생은 재미가 없다. 도자기 작업을 통하여 청년이 획득한 아이템은 세상의 학문이나 가르침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을 열고 "실패할까 봐 두려워요.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까 봐, 인생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던 존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교사로 일할 수 없었던 것도, 출판사들이 책을 출판해 주지 않는 것도, 수녀원의 벽처럼 넘을 수 없는 벽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넘지 못할 벽은 없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사랑을 본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나는 수녀님을 보며 생각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존의 표현이 이를 증명한다.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인생이 보인다. 88만원 세대, 백수 세대, 젊지만 희망이 없다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행복으로 가는 '황금 입장권'은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곁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랑이 있다. 가까이서 찾아보자.

※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길일 것 같아 그 길을 걸으려고요.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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