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복음주의'라는 낱말은 언제나 혼란을 조장한다. 한창 신학을 접하면서 신앙의 변화를 겪을 무렵, 한 후배는 나에게 물었다. '형, 이제 복음주의를 떠나신 건가요?'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내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디쯤에 있는지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복음주의'라는 낱말이 모호해서였다. 도대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괜스레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또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다양한 정의들, 다양한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그 어떤 것도 '복음주의'를 규정해 주진 못했다.

도대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나와 같은 의문을 갖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밑그림을 그려 줄 책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뛰어난 복음주의 역사학자 브라이언 스탠리에게 사사받은 이재근 박사의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복음주의'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을 제공한다. 그가 던져 주는 통찰을 한번 따라가 보자.

복음주의의 세계화

▲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 이재근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292쪽 / 1만 3,000원

저자의 스승 브라이언 스탠리는 'Centre for the Study of World Christianity'의 디렉터로 있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저자 또한 복음주의를 다루면서 '세계화'라는 주요 주제를 먼저 언급한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영미권에서 발생했다. 저자도 본 책에서 이를 언급하는데 '18세기 초',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조지 윗필드'와 같은 이들에게서 기원한다고 밝힌다. 화석화되어 버린 개신교 정통주의, 국교 세력, 세속화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이와 같은 '복음주의 운동'은 근본주의와 대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와도 대립각을 세워 나간다. 이와 같은 대립 역시 '영미권'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치열한 대립을 통해 '복음주의'가 정립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영미권에서 타 권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바로 복음주의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전혀 달랐다. 또한 기독교 세계라고 불리던 지역 내에서는 기독교라는 종교적 분위기가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신 없는 사회, 신이 죽은 사회'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유의 기독교 세계라고 불리던 서구 세계와는 달리, 아프리카·아시아·남미에서는 기독교 신자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특히 마크 놀의 저서 <세계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 미국의 경험이 어떻게 세계의 신앙을 반영하는가>라는 책의 내용을 몇 가지 인용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서양 종교가 아니라 '세계종교'임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다음의 저자 말은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하게 만든다. '1800년에 전형적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영국에 사는 29세 백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전형적 기독교인은 남아메리카 혹은 아프리카의 젊은 여성일 것이다(61쪽).'

덧붙여서 이러한 복음주의의 세계화와 함께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의 탈서양화는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기독교의 독특한 특성을 부각시켰다. 이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성장하지 않은 이들이기에 독특한 회심 체험이 있으며, 십자가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이는 책 앞부분에 저자가 기술한, 복음주의 사각형의 중요한 특징 두 가지다.) 또한 이러한 비서양 기독교의 급성장과 이들이 가진 신앙적·신학적 보수적 색채는 결국 세계 기독교의 방향 또한 바꾸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유의 '복음주의의 세계화'는 결국 비서양에서 유럽을 향한 역선교로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처럼 먼저 저자는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생태계가 현재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그려 내며 이를 볼 수 있는 하나의 렌즈를 제공하고 있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렌즈를.

영미에서 태동한 복음주의

오늘날 통용되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물론 유럽에서도 쓰이고 있긴 하지만) 영미 기독교 세계 안에서 태동된 단어이다. 저자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기술한 이후에,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어떤 배경 속에서 탄생했는지를 해설하기 위해 '영미 기독교 세계'를 천천히 기술한다. 미국에서는 1945년 전쟁 이후,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분리가 극심해졌다. 학문을 선택한 자유주의냐, 혹은 신앙을 선택한 근본주의냐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복음주의는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운데 길을 어떻게든 걸어가려 했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는 칼 헨리라는 신학자, 해럴드 오켕가라는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부흥사, 그리고 풀러신학교와 <크리스채너티투데이>라는 잡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근본주의'가 가진 비합리성에 도전하고, '자유주의'가 가진 비신앙성에 도전했던 계보들을 훑는다. 이른바 미국식 복음주의의 태동 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몇몇 학자들이 미국 기독교의 이야기가 나오면 매번 하는 말들이 있다. '역사가 없기에 자주 흔들리는'이라는 수식어. 실제 미국 기독교는 그런 면이 있다. 극단으로 갈라지고, 또한 새로운 것이 만들어져 가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영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와는 달리 '장구한 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국 기독교는 '중도적'이라 불린다. 저자 또한 이 점을 찬찬히 짚어 간다. (저자가 영국에서 공부를 했기에 그 특성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영국 교회는 미국 교회같이 뜨거운 이슈에 대하여 갈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상과 색깔이 서로 다른 이들과의 동거 속에서의 합리성과 온건함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국 복음주의의 이미지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 유명했던 로이드 존스와 스토트의 분열에 관한 이야기도 저자는 언급한다. 영국 내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로이드 존스는 국교회가 아닌 '칼뱅주의 감리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며 이른바 미국적인 분리주의적 색채를 갖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복음주의'의 보수성을 위해서 '분리'를 주장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반면 성공회 출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분리주의적 색채와 영국이 맞지 않음을 직시하고 있었던 인물임을 이야기한다. 실제 영국 전체의 분위기상 로이드 존스의 판단보다는 존 스토트의 판단이 맞아떨어졌고, 후일에 영국 복음주의에 대한 영향력은 실상 존 스토트가 가져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느낌(?)은 '세계화된 복음주의의 흐름' 안에서도 서로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진다. 미국식 복음주의는 에큐메니컬과의 대척점 아래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대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켜 내는 한도 아래에서만 활동하는 한계 안에 갇혀 있다. 반면 영국식 복음주의는 온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적 능력을 복음주의 성경 연구에 쏟아 낼 수 있었다. 실제 IVF에서 출발한 틴틀성경연구회는 ‘복음주의는 어떻게 반계몽, 반지성 딱지를 뗄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고, 그 결과로 성서학이 영국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유명한 학자들인 F. F. 브루스, N. T. 라이트, 하워드 마샬, 브루스 메츠거, 조지 레드 등등이 어린 영국식 복음주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나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탁월한 성서학을 배경으로 미국식 복음주의 학교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식 복음주의 학교는 '보수'와 '진보'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학문성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특별히 그들은 '성경무오설' 같은 교리를 지켜 내기 위한 투쟁에 신경을 쓰느라 실제 성경에 대한 연구를 놓치곤 했다. 저자는 이러한 미국 복음주의권 아래에서 일어난 학교의 사례들을 언급하며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의 느낌을 비교해 나간다.

'계몽주의'와 '복음주의'의 불편한 동거

저자는 이어서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충분히 불편할 만한 동거인인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다룬다. '계몽사상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적 사조가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를 분석한다. 이를테면 '계몽주의'라는 사조에 대한 반발로써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또한 공적 신앙에서 후퇴한 아미시(Amish)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 그룹의 변종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합리주의, 이성주의라는 계몽주의의 사조 아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이성'이란 무기를 취한 복음주의 역사의 한 결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개혁파 신학'이라 할 수 있는 19세기 구프린스턴 신학은 나름의 계몽주의 체제 아래에서 변증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찰스 하지는 '성경은 모든 정보의 창고'라는 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계몽주의 아래에서의 복음주의의 변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견 계몽주의 방법론을 들여온 계몽주의 체계 아래에서 '복음주의'가 살아가기로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계몽주의의 방법 아래에서 신학하기를 시도했던 흐름들도 있지만 저자는 '계몽주의와의 동거'를 시도했던 복음주의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18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시발이라고도 볼 수 있는 1차 대각성 운동과 감리교 운동은 어떨까? 저자는 계몽주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운동이라 할지라도, '계몽주의와의 동거'라는 관점에서 관찰한다. (이 맥락을 읽으면서 닫혀 있던 눈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조너선 에드워즈의 경우도 감정을 강조했지만, 감정을 신학과 철학으로 분석한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이 그 예다. 웨슬리와 윗필드 또한 홀리클럽,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철저한 경건 생활을 하던 그룹에서 나온 인물인데, 이 또한 '자기 목표 실현 의지'라는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을 나름 신앙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뿐일까? 복음주의 세계화의 초석이 되었던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의 경우 또한 '세계로 나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인간의 발전과 성취를 과시하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욕망 아래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후에 한국 선교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SVM 운동 또한 계몽주의의 '낙관적인 세계관' 지배 아래에 있었다. 저자는 온갖 선교 단체를 비롯한 선교 운동의 발흥과 급성장을 계몽주의의 '낙관적인 세계관' 영향 아래에서 조망한다. 이뿐인가? 당대의 종말론 또한 이러한 '낙관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에서 '천년왕국' 이후에 종말이 온다고 하는 '후천년주의' 종말론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종말론 또한 선교와 복음주의 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다.

그 외에도 이러한 계몽주의 사조 아래에서 일어난 '변증'에 대해서도 저자는 짚고 넘어간다. 반틸, 카넬, 칼 헨리, 쉐퍼 등등의 사상가들은 미국 복음주의의 사조 아래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칼뱅주의 개혁신학을 보수적으로 수용하고, 극단적으로 세상의 사조와의 경계를 만들어 낸다. 일종의 '계몽주의' 합리성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계몽주의'가 형성해 나가는 반기독교적 분위기에는 일침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자는 미국이 아닌 영국으로 눈을 돌리며 영국 내에도 레슬리 뉴비긴, C. S. 루이스와 같은 변증가가 있었음을 소개한다. 이들은 사실 미국 복음주의 변증가들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동일한 대적과 상대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어쨌건 영국 복음주의가 지닌 보수적이고, 합리적이고, 따스한 변증 분위기를 보여 준다고 소개한다.

로잔대회, 그리고 사회참여

사실 지금까지 기술된 저자의 이야기들이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렌즈들 중에 하나였다면, 지금부터 다룰 주제인 '공공성'과 '오순절'은 오늘날 한국교회 현실과도 상당히 맞닿아 있는, 일종의 시의성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두 주제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 속에는 전혀 들어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영국에서 수학했던 동양인이기에 얻을 수 있는 통찰이 꽤나 있다. 참고로 이 두 부분이야말로 본 책의 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어쨌건 오늘날의 복음주의 생태계를 조망할 수 있는 두 렌즈인 '공공성'과 '오순절'에 대한 저자의 기술도 따라가 보자.

'로잔대회', 그리고 '로잔언약'에 대해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점을 이야기하고자 할 적에는, 기점을 둘러싼 배경을 충실히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로잔대회'를 둘러싼 전후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충실히 들려준다. 미국에서 복음주의는 본디 기독교의 보수성을 지켜 내자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성을 지켜 내자는 흐름 속에서 그들이 놓친 것이 바로 '사회참여'라는 사실을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그러한 것에는 일단의 맥락이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에서 탄생한 '사회복음'에 대한 미국 복음주의의 반발이다. 하지만 칼 헨리의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셔우드 워트의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양심>, 짐 윌리스의 <더소저너스>라는 잡지를 거치면서 복음주의 또한 사회 행동을 강조해야 한다는 기조들이 자리 잡혔다.

이러한 배경들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다. 1968년 에큐메니컬 진영의 스웨덴 웁살라 WCC 대회는 '인간화'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구원을 설명하자고 했다. 이러한 에큐메니컬 맥락에서의 '인간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복음주의자 빌리 그레이엄은, 나름 복음 전도에 중심을 둔 선교 대회를 열기 위해 노력한다. 이 대회가 바로 '로잔대회'이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존 스토트의 참여도 이끌어 내고, 유럽을 넘어서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초청하여 거대한 대회가 드디어 성사된다.

실제 빌리 그레이엄은 이를 통해 '세계 복음화'와 '미전도 종족'이라는 당대 복음주의의 보수적인 주제를 갖고 회의를 이끌어 나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올란도 코스타스는 미국식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오히려 기독교는 지금보다 더 급진적인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또한 기독교의 복음은 물리적, 사회적 의미를 포괄해야 한다고 힘써 주장했다.

또한 미국의 선교가 미제국주의의 수탈과 다름없다는 폭로도 있었다. 그뿐이었을까? 아프리카의 존 가투는 서양 선교사들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더 이상 현지에서 선교 사역을 하지 말고, 토착화된 교회들에게 주도권을 이양하라고 말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존 스토트가 영향을 발휘한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보수적인 주제들과, 제3세계 복음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주제들을 '따스하고, 포용력이 넘치고, 온건한' 영국 복음주의의 관점으로 잘 녹여내서 포용한다. 실제 그는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며, '새의 양 날개, 가위의 양날, 검의 양날'이라고 설명하며, 복음주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합한다.

로잔대회의 성과는 계속 이어진다. 사회적 행동이 복음주의가 취할 마땅한 자세로 자리매김되었다. 존 스토트와,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의 노고로 '복음 전도'라는 개념 자체가 더욱 포괄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뿐일까? 로잔대회에 파장을 불러온 비서구권 기독교 지도자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독교가 서구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실례가 되었다. 저자는 본 책에서 이와 같은 로잔대회를 둘러싼 온갖 이야기를 서술하며, 로잔대회를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오순절과 복음주의

저자는 뒤이어 오순절이라는 주제로 건너간다. 실제 오순절은 현대 복음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 세력이다. 현 기독교인의 25% 정도가 스스로를 '오순절'로 칭한다. 이것은 필자 생각이지만, 오순절 밖에서도 오순절 영성을 힘입어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은사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면 아마도 '오순절'이라는 명칭은 현 복음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오순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벗겨 내는 한편, 오순절을 둘러싼 나름의 (한국 현실 속에서 유통되지 않았던) 관점들을 녹여내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오순절의 '다원기원설' 같은 경우에는 이전엔 들어 보지 못했다. 이는 오순절 운동이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나 세계로 번져 간 운동이라는 기존의 학설과는 다른 주장이다. 저자는 이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1905년 인도 묵티, 1907년 평양(물론 저자는 이를 오순절 운동의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 1908년 만주, 1909년 칠레, 1914년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노르웨이, 중국,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난 부흥들을 살펴보면 미국 아주사 거리만을 기원으로 두는 기존의 학설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오늘날의 SNS 시대와는 다른 당대의 시대 속에서 초기에 일어난 부흥이 세계적으로 '소문'을 통해 퍼져 나갔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오히려 '다원기원설'은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에 기원을 둔다. 어쩌다 보니 1900년대 초반에 세계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성 속에서 일관성을 지니며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실제 오순절 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이 아주사에 기원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제3세계 그리스도인인 걸로 볼 때, '다원기원설'은 '아주사기원설'에 비해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실제 '복음주의의 세계화적 맥락', 혹은 '복음주의의 탈서구화'에 관심을 둔 저자는 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오순절 운동을 종교개혁에 비견하는 제2종교개혁으로도 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저자는 복음주의의 정의 아래에서 오순절 운동을 조망하면서 그와 같은 견해를 일축한다. 하지만 분명 제2종교개혁으로도 볼 수 있을 만한 오순절 운동의 '개혁성'은 충분히 다루고 있다. 제2종교개혁으로 불리기에는 지나치지만, 분명 오순절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 아래에서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령 세례와 방언, 치유와 재림에 대한 강조는 기존의 복음주의가 간과했었던 부분을 부각했다고 말한다. (사실 복음주의 운동의 시발점인 웨슬리와 윗필드의 부흥 운동 속에서는 이런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순절은 여성과 흑인에 대한 인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방언과 성령 세례의 표증으로 여성과 흑인들이 차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이는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폐지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오순절은 또한 지식층의 종교, 중산층의 종교, 경전의 종교가 아닌 민중의 종교, 전승의 종교, 구전의 종교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외에도 그는 오순절 운동 아래에서 일어난 몇몇 모습들을 간략히 개괄하며 오순절에 대한 우리의 껄끄러웟던 선입견을 없애 나간다.

나오면서

저자의 책은 강의를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강의를 기반으로 저술되어서 그런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의 영향일까? 그의 책은 '경전성'보다도 '구전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쉽게 읽히며, 내용도 참 맛깔난다. 특별히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바라보고, 몇 가지의 개념어로만 이해하고 이야기했던 복음주의에 대해서, 오순절에 대해서, 부흥 운동에 대해서 풍성하고도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느새 우리 인식의 피상성과 마주한다.

물론 그의 책에도 분명한 단점은 존재한다. 때때로 한가지의 주제, 혹은 주장을 향한 흡입력, 몰입력이 살짝은 떨어진다는 느낌도 받는다. 또한 한 이야기에 대한 깊고도 충분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밑그림과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는 느낌 때문에 뭔가 감칠맛만 남기는 느낌도 든다. 본 책을 읽고 나면 '책 한 권을 정복했다'는 느낌보다는, '저자의 다른 책들이 더 기대된다!'라는 마음이 더욱 남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좋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논지를 갖고 프로페셔널하게 저술한 책들보다는, 교양을 위해서, 또한 전반적인 복음주의의 이해를 위해서, '재미있고도 폭넓은 저술'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또 한편의 교양 강좌를 듣는 것만 같은 느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딱인 듯하다. 필자도 본 책을 집어 들자마자 그 자리에서 한 큐에 다 읽었다. 그 정도로 재미있고, 가볍게 읽힌다. (사실 그러면서도 많은 생각의 단상들을 던져 준다. 아마도 그런 모습 때문에 저자의 다른 책들이 기대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을 '이재근'이라는 저자의 '출사표'로 읽고 싶다. 세계 복음주의에 대한 거대한 지형도를 밑그림으로 그린 다음에,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지형도를 그리고, 오순절에 대해서도 그리고,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또한 로잔대회와 그 이후의 그림에 대해서도 그릴 저자가 기대가 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라는 '이재근'의 출사표를 받아서 읽어 보시라. 그리고 그가 조망한 '복음주의 생태계'의 거대함을 함께 맛보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 다음은 그의 출사표에 대한 저자 자신의 설명이다. 읽어 보시라.

"필자의 책의 독자 대상은 신학자, 역사가 같은 전문 학자군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복음주의에 두고 있는 신학생, 목회자, 선교 단체 간사 및 리더, 기독 출판 및 언론계 종사자, 청년, 일반 성도다. 따라서 가능한 대중적인 언어로 20세기 복음주의 지형도를 그려 내되, 짧은 각 부의 논의 안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중요한 정보가 빠지지 않도록 압축적인 해설을 하려고 노력했다(11쪽)."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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