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현우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먼저 신현우 교수는, 퀴어 비평을 소개한 홍신해만 씨의 글을 성서신학적·윤리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관련한 글을 올라온 순서대로 링크합니다. 1. 예수가 백부장 동성 커플에게 던진 한마디(홍신해만) 2. 마태복음에 나오는 백부장과 하인이 '동성 커플'이라고?(신현우) 3. 성서 해석은 '개연성' 강조, 동성애에는 '개연성' 무시?(홍신해만) 4. 진정한 동성애 인권 운동은 동성애에서 해방하는 것(신현우) - 편집자 주

성서 해석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신학적 논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보든 보수든 성서 해석이 '완전히' 닫혀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아주 극단적인 '문자적 근본주의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특히 20세기 들어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성 소수자'에 대한 성서 해석의 논쟁은 더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데 신현우 교수의 글을 반복해서 읽고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의 글인데, '논리'나 '인권 감수성'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논박하고자 하는 상대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며 시작한다.

"개연성을 버리고 가능성을 택하여 마태복음 8:6의 '파이스'를 '동성 연인'이라고 해석하는 사이비 주해가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글은 자기 '전공' 영역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허점을 드러낸다.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전공 영역에서 논쟁의 상대에게 세웠던 칼날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을 참으로 긍휼히 여기려면 그가 그러한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다른 설명이 없다. 그냥 '동성애자들 = 중독'이란다. 근거가 뭘까. 최소한의 의학적 설명도 없다. '개연성'을 근거로 상대를 몰아붙이던 분이, '개연성' 없이 '추측'(가능성)을 근거로 말하기 시작한다. '동성애자들 = 중독'이라는 꽤 의학적이고 법적이며 사회적인 주장을 펼치면서, 개인의 추측이나 경험 또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하여 말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 그 뒤의 주장은 더 당황스럽다.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억울하게 피해당하고 차별까지 받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다. 이 땅에 가장 많은 약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들이다. 특히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는 어린이들이다. 본래 머리가 나쁘게 태어나서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공부 못한다고 구박당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들이 무슨 피해를 세상에 주었다고 차별당해야 하는가. 그들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있는가. 그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으니 정치적 고려 대상이 아니고 동성애자들에게는 투표권이 있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동성애자들 외에도 긍휼히 여겨야 할 이웃이 너무도 많다. 특히 안전 불감증에 빠진 한국 사회 속에서 피해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했는가. 그들을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여 두 번 죽이면서도 동성애자들에게는 너그러운 관용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성추행당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욕하고, 성추행을 한 사람들은 성욕이 강하게 타고 났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개연성을 버리고 가능성을 택하는 자들이 범하는 실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인권 운동은 정치적 운동이다

그는 인권 현장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없거나, 인권 현장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 같다.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청소년 인권 운동'의 현장에도 함께 하고 있는 걸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심지어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은 '투표권'이 있어서 신경을 쓰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는 '인권 운동'의 기본조차 모른다는 오해를 받기 좋은 말이다.

대부분의 '인권 운동'은 '정치적 운동'이다. 오늘날 청소년 인권 운동도 그가 말하는 것처럼 '보호'라는 관점이 핵심이 아니다. '투표 연령 운동'처럼 정치적 운동의 맥락이 훨씬 더 크다.

그뿐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 성 소수자들은 '남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인 것처럼 넌지시 '전제'하고 있다. 교수라는 분의 글쓰기가 비겁해 보인다. 더 나쁜 건 '피해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언급하며,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을 대치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현장'에는 한 번도 안 나와 봤거나, 나왔어도 그냥 다녀갔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가장 많이 '모욕'하며 '불온한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성 소수자 길벗'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묘하게 겹친다는 걸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그 현장에 나와 보시길 바란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불온한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을 살펴보시라.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을 망국의 길이라면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시라. 그들이 소속된 극우 보수적 종교 시민단체들의 이름은 겹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권은 차등을 둘 수 있는 게 아니고, 주장을 위해 동원되는 것도 아니다

그 뒤의 논리는 평하기가 힘들 정도다. '비유'라는 방식을 이용하여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이 너무 위태롭다.

"이것은 마치 성추행당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욕하고, 성추행을 한 사람들은 성욕이 강하게 타고 났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은 '성추행'당하는 사람이고, 성 소수자 길벗들은 '성추행을 한 사람들'이거나 최소한 '성욕을 강하게 타고 난' 사람이라는 식으로 배치하여 글을 마무리한다. 누군가의 인권이나 삶에 대해 말할 때에 쉽게 차등을 두는 방식이 왜 폭력적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저 본인의 교리적 입장을 더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인권이나 삶을 '동원'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가 힘들다.

그가 우리나라 개신교단 가운데, 가장 큰 장로교단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는 '인권'이 뭔지 잘 모르면서, '신약학 교수'라는 '자격'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며 규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권이라는 게 갖다 붙인다고 다 말이 되는 게 아니다. 천부인권 개념은 그렇다고 치고, 자유권과 사회권 개념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기까지 흘린 눈물과 피를 모르고 함부로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 이런 말까지 하는 나도 웃기지만 해야겠다. 나도 그렇지만,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성 소수자 길벗들 가운데, 그가 차등 짓고 '대비'시킨 수많은 인권 운동의 영역에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반대할 권리'를 말하려면, 최소한 그 반대가 '차이 존중'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혐오와 차별'을 말하거나 '선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기를 바란다. 많은 인권 현장에서 만나는 활동가나 법률가들이 늘 내게 묻는 게 있다. 왜 일부 보수 개신교인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천천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리 쉽게 왜곡하느냐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차별금지법은 모든 차이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한 언행을 예방하고 '선동'을 금지한다는 게 원래의 취지다. 우리나라의 차별금지법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를 '종교적 신념에 대한 탄압'이란 식으로 몰아갈 때마다, 일부 보수 개신교 세력으로 인해 전체 그리스도교가 대화조차 힘든 상대로 인식되어 간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제발 '차이 존중'과 '혐오와 차별적 언행 방지 그리고 선동 금지'의 다른 점에 대해 한 번 더 곱씹고 확인해 보기 바란다.

성서를 근거로,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게 닮아 있다

하나 더. 이 글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글이 하나 있었다. 많은 교인들이 '가부장제 구조와 질서 = 하느님의 가르침 또는 사회의 순리'라는 식으로 보고 듣고 자랐다. 이를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전수하는 대한민국의 주류 교회들과 신학이 가진 폐해를 살피다가 만난 글이었다. 그리 오래된 글도 아니다. 19년 전의 글이다. 그것을 쓴 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 신학대학교의 교수였다. 그분도 성서 해석은 '문자주의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그 적용 또한 자신들의 '교리적 관점'에 근거한 '올바른 성서적 해석'에 의해서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들에게 정말 간절히 부탁드린다. 누군가의 '인권'이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면, 찬성이든 반대든 '이런 식'은 정말 아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인권이나 삶에 대해 쉽게 차등 짓고 찬반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하느님의 형상'을 입고 품은 자들이라고 고백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한계를 가진 성서 해석이 현실에 적용될 때에는, 더욱더 신중하고 다양한 '디딤돌'을 활용하여, 다양한 난제들을 넘어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당신들의 전공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쟁'하는 건, 쉽게 동의할 수 없어도 귀 기울여 듣겠다. 그런데 당신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이렇게 '비겁하고 나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주장할 거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길 권한다. 어떤 식으로든 '공론장'에 나오는 순간, 냉정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론장은 당신들이 '권위'에 의지해서 무슨 소리를 해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맹목적 신앙으로 충만한 곳이 아니란 걸 알고 계시길 바란다.

19년 전,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 신학대학교의 교수가 쓴 글 가운데 결론 부분을 인용해 두겠다. '가부장제 구조와 질서 = 하느님의 가르침 또는 사회의 순리'라는 논리와 인권 감수성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들. 그분들이 보여 주는 '성서 해석과 현장 적용'의 한계를 그대로 느껴보시기 바란다. 아래에 인용한 글과 지금까지 반박한 신현우 교수의 글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혹시라도 인용된 글을 읽으면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겠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 '여성 차별'을 '하느님의 뜻'이자 '무오한 성서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분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하느님’께 간절하고도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 말이다.

"우리는 여성의 목사 안수를 주장하는 여권주의자들의 두 부류 중에서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은 '여성해방'(womens’s liberation)이라는 목적론을 갖고서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자적인 위상을 요구하고 있고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여성의 평등성'(women’s equality)의 실현이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여성의 교역자로서의 사역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수잔 포가 지적한 대로 다 사람들의 이유요 생각들인 것이다.

우리가 여성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이 분명하게 이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2:11-14, 고전 11;3-16, 14:34, 35).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유들 때문에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자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매리 카시안이 강조한 대로 '여성해방'이라는 급진적 사상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평등성의 실현을 원할 뿐이라고 하면서 여성의 목사 안수를 요구하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성경과 여권주의라는 두 주인을 섬긴다는 점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정절을 지키지 않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서도 우리가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어서는 안 될 줄 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고 주장하는 분들은 다 여권주의자로 볼 수가 있다. 여권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거역하면서 여성의 교역자(목사나 감독)로서의 사역을 정당화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목사 안수에 유리하도록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들(여성의 목사 안수를 금지하는 가르침들)을 왜곡하여 이해하며 재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훼손하는 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성경적 또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의 '무오한 성경'에 대한 신앙고백이 의심이 간다." - 박아론, '여성의 목사 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신학지남> 1996년 9월, p47-48.

* 덧붙임: 나의 길벗들, 특히나 성 소수자 길벗들이나 성 소수자 그리스도인 길벗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맹목적으로 교리라는 강렬함에 사로잡혀, 하느님이 허락하신 '사랑의 눈'이 가려진 이들의 폭력성에 그대로 노출되게 하여서 말이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다.

민김종훈(자캐오) / 한영신대와 한세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여성 인권 그룹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배웠으며, 성공회 나눔의집 실무 활동가로 '동네 골목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후 성공회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 사제이자 성공회대학교 교목으로 있다. 더불어 성공회에서 시도하고 있는 Missional Church 가운데 하나인, '길찾는교회'의 공동 기획자로 있다. 평등 부부를 지향하기에, 동반자와 더불어 서로 거울삼아 조금씩 성장하는 아픔과 기쁨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