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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교리 동시에 배우는 조직신학자의 설교집
[서평] 조성노 <믿음인가, 미신인가>(넥서스CROSS)
  • 홍동우 (hdw6461@gmail.com)
  • 승인 2015.06.11 17:07

<설교와 설교자>, <부흥>, <구약을 사용한 복음 설교> 등의 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불붙는 논리"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의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가 '엔터테인먼트화'하고, 때로는 '상업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의 언설은 참으로 날카롭다. 하지만 매번 강단에 올라가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설교는 불붙는 논리"라는 그의 언설은 무거운 계명처럼 느껴진다.

   
▲ <믿음인가 미신인가> / 조성노 지음 / 넥서스CROSS 펴냄 / 304쪽 / 1만 3,500원

강단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설교해야 할까. 고리타분한 교리를 설교하자니 너무 무거운 것처럼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훈을 주고 넘어가자니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강단 위에 올라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게 바로 설교자의 현실이다.

설교자들은 이런저런 설교집을 읽어 보기도 한다. 흔히 잘 팔리는 설교집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박영선, 이재철, 옥한흠 정도가 있겠다. 설교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독특한 책이 한 권 또 나왔다. 바로 푸른교회 담임목사이자 서울 광나루 장신대에서 현대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친 조성노 목사의 설교집 <믿음인가, 미신인가>이다. 책의 부제가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이다. 설교를 통해 그가 연구한 조직신학을 녹여 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불붙는 논리"로서의 설교를 강조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와 흡사하다. 하지만 그와 조금은 다른 길을 간다. 한번 이 책을 톺아보자.

어려운 개념 속에서…로고스와 사르크스

조성노 목사의 설교집에는 '로고스와 사르크스'라는 설교문을 싣고 있다. 제목만 봐도 기겁할 만한 제목이다. 신약학 내지 현대신학 1회 차 강의의 소제목을 보는 것만 같다. 어려운 개념들로 설교 제목을 붙이지만, 설교문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군더더기 없는 간단한 개념만 소개하고 넘어간다. 이를테면 로고스는 헬레니즘 전통에서 고도의 관념적이고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짚고, 영과 육 그리고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철저한 이원론자인 헬라인들에게 소개된 복음은 이 로고스가 사르크스로 성육신된 복음이라고 해설한다.

물론 단순한 기독교 성육신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간단한 설명 속에는 왜 이러한 해설이 파격적인지 정확히 짚는다. 사실 로고스에 대한 헬라인의 개념을 적절히 다루지 않으면 '성육신 신비'의 장엄함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그의 설명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절한 범위에서 멈춘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해설에서 머무르지 않고 '소통'이라는 인문학적 차원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신학적 개념인 '절대 타자'를 해명한 이후, 하나님의 복음은 결국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신 것"이라는 명제를 이끌어 낸다.

필자가 조 목사의 설교문의 중심을 짚어 내면서 오히려 어렵게 해석한 것은 아닌지 살짝 염려도 된다. 하지만 그는 적절하게 짧은 설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한다. 어려운 개념들 속에서 길을 잃기 쉬웠던 신학적 개념을, 그는 나름의 '교리적 설교' 내지 '신학적 설교'를 통해서 잘 짚고 있다. 그것도 약 6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설교문 속에서 말이다.

발칙한 개념 속에서…예수께서 지옥에 가셨다고?

조 목사가 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이라는 설교문은 참 독특하다. 제목부터가 약간 발칙하다고 여기는 독자도 있을 테다. 실제로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발칙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전심을 다해 이렇게 외친다. "예수는 지옥에 가셨다"고 말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참으로 의연했다.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 나갔다. 반면 예수의 죽음은 비겁해 보이기도 한다.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기도하기"도 했거니와, 십자가 도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보다 하등의 죽음, 죽음을 두려워한 죽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결기가 예수의 결기보다는 한 끗 높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차이 속에서 조성노 목사는 '세계관적 차이'를 읽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지옥이라는 거대한 심연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해설한다. (실제 사도신경 원문에도 포함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발칙한 개념을 소개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무너뜨린다거나, 혹은 교리를 변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무게를 고스란히 살리기 위해서 '예수의 지옥행'이라는 발칙한 개념이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자연스레 그는 '예수의 지옥행'이라는 발칙한 개념을 넘어, 예수의 죽음이 발생하는 구원의 신묘함으로 이어 간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넉넉히 이루셨음을 확신하십시오"라고.

난해한 개념 속에서…성경적 역사는 '종말론적' 역사

신학을 하다 보면,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교로 해명하기도 어려운 개념이 있다. 이른바 종말론과 신정론이다. 조성노 목사는 이러한 난해한 개념들도 피하지 않고 해명을 시도한다. 먼저 신정론을 어떻게 다뤘는지 살펴보자.

그는 '가라지의 비밀'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세상의 부조리 사이의 갭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신정론'의 질문이다. 그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서 들리는 주인의 "추수 때까지 (가라지 추수를) 그만두라"는 대답에 주목한다. 그리고는 악이 아무리 득세하고, 가라지가 승승장구하는 현실 속에서 "심판 때를 기다리며, 억울하거나 속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현실 인식을 넘어 알곡을 가라지로 바꾸지 못하는 마귀의 무능함을 지적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인 알곡을 무자비하게 해치고 넘어뜨릴 수는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이후, 현실 속에서 실족하지 말자고 외친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설교에서는 나름의 역사 인식론과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먼저 조 목사는 창세기 1장 1절을 해설하며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이어서 그 시작점에서부터 종말까지가 바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신앙고백을 도출해 낸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판넨베르크의 주장인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을 빌려 온다. 나아가 역사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화하거나, 윤회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기를 성경적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종말론적 역사’임을 이야기한다. 이어서 그는 이 종말론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인간적 삶으로 방향을 바꾼다. 노아와 롯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언급하며 이 성경적 종말론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설교를 끝맺는다.

애매한 개념 속에서…"항상 기뻐하라"의 참 의미

필자는, 확립하지 않은 개념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한 나름의 연민을, 그리고 통탄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항상 기뻐하라"는 성서의 계명 또한 애매모호한 개념 가운데 유통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조 목사는 '항상 기뻐하라'는 설교문 속에서 본 개념을 다루고 있다.

그는 먼저 일종의 변증법을 이용한다. 먼저 "다 슬퍼하는 데 나만 기뻐하는 것도 삶을 조롱하는 것"일 수 있거니와, "기뻐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도 없다"고 해명한다. 그러면서 성서 본문 탐독을 위해 당대 바울이 속했던 정황으로 치고 들어간다. 그는 학자들이 바울에 대해 연구한 개념들을 다루면서 바울에게 있을 법했던 배신감 혹은 비애감을 해명한다. 그가 몸을 찌르는 아픈 가시를 지니고 있었음을 상기한다. 그가 사형수로 끌려가는 삶을 살았음을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그는 묻는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도리어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라고.

그리고 그는 성도들이 어설프게 이해하는 "항상 기뻐하라"의 개념이 아닌, 바울의 삶의 정황에서부터 우러나온 역설적이고도 초월적인 전천후의 기쁨을 이야기한다. 일종의 정, 반을 거쳐서 합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는 이 '기쁨'을 가지라고 성도들에게 요구한다. 어떤 고생과 희생도 기쁨으로 접수할 수 있음을 말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의 존재만으로 충만한 기쁨, 바로 그 기쁨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 기쁨이야말로 성서에서 요구하고, 바울이 강변했던 "항상 기뻐하라"의 참뜻임을 이야기한다. "바울과 같은 역설적이고도 초월적인 기쁨으로 행복하십시오"라는 권고와 함께 끝맺는다.

나오면서

그의 설교집은 총 40가지의 설교로 엮였다. 설교는 짧고 명쾌하다. 군더더기 없는 것이 장점이다. 수록된 설교문은 (약간의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15분에서 20분 내외로 마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량이다. 조직신학·현대신학 교수답게 신학적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청중의 눈높이에서 잘 풀어냈다는 것이 장점이다. 설교를 고민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도 좋은 책이거니와,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가정 예배 설교문을 찾는 이에게도 유익하다. QT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특별히 본문의 깊이로 들어가기 힘든 이들에게는 이런 짧고도 교리를 다룬 설교문들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의 설교집에도 나름의 단점들이 있다. 조직신학적 설교, 교리적 설교로 풀어내다 보니 일견 성서 해석에 있어서 이견이나 논쟁거리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성서 본문보다는 조직신학적 개념, 교리적 개념에 치우친 설교로 치부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본 설교집이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는 점과, 비이성적 신앙의 만연함을 보면서 탄식하던 한 조직신학도 설교자의 실존적 고백이 담겨진 설교라는 점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짧고도 명쾌한, 그리고 논리적인 교리, 조직신학적 설교를 본 책을 통해 만나보시라. 특별히 저자가 반이성적인 기독교적 풍토에 대해 심히 고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 성경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자기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고, 맹목으로 가려 하고, 의식이나 형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십시오. (중략) 신앙은 근본적으로 신뢰입니다. 신뢰란 어떻게 성립될까요? 먼저 대상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모르면 절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중략) 성경을 통해 먼저 하나님을 알면 신뢰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침내는 '주님 내 안에 오십시오. 내가 주님 안에서 살겠습니다' 하며 결단하게 되는 겁니다." (202쪽)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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