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 동아리 동기들이 모여 있는 네이버 밴드에, 목사 친구의 글이 올라왔다.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보고 느낀 점을 나름의 신앙적 해석과 함께 쓴 글이었다.

요지는 영화에 나오는 몇 가지 수학 공식을 통해 신이 존재함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또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사실은 한평생 증오해 왔던 사람이었다는 영화 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결국 원수까지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원수+이웃=1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이것을 1+1=1의 공식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예수가 보여 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라는 게 그 친구의 얘기였다.

이어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고 악에 침묵하실까?'라고 우리는 질문하지만, 그러한 인생의 고난과 악이 없었다면 나 자신도 1+1=1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고, 악을 제거하려고 앞장서고 착한 사람으로 자처하여 끊임없이 원수를 향한 보복 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 목사인 친구가 영화를 보고 무조건적인 용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글을 썼다. 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불의와 구조 악에 억압받고 있는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에서 '용서'라는 것은 어렵고도 복잡한 것이다. (사진 출처 Daum 영화)

목사인 친구가 그러한 글을 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실제로 우리는 극악무도한 일을 겪고도 종교의 힘이나 우주적인 차원의 사랑으로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심지어 돈독한 관계로까지 발전했다는 사람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악이나 우리가 겪는 고난이 어떤 한 개인이 아닌 집단이나 국가 차원의 수준에서 초래된 것이라면, 용서란 그렇게 단순하고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악을 제거하려고 앞장서는" 행동이나 사회참여가 결코 용서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른바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모든 것을 관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말처럼, 악에 의해 희생되기 쉬운 약자들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관점에서 용서라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고도 복잡한 차원의 것이다.

신학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에 대해서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을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목사 친구가 말한 것은 "고난 또는 악에는 신이 의도한 뜻이 있다"는 신정론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정론이 정당하다고 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설명하는 합리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신의 뜻을 찾거나 찾지 않을 권리는 고난당하고 악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있다. 신의 뜻을 외부에서 쥐어 주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그의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그들에게 그것마저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폭력이 아닐까?

나치에 희생당한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 5·18 군부독재에 의해 비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세월호 참사에 의해 희생당한 분들의 유가족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감히 용서라는 말을 꺼낼 수가 있겠는가? '용서'는 오롯이 그들 몫인 것이다. 그리고 용서 이전에 악을 도모한 사람들의 진정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아울러 용서를 하는 것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서로 상관이 없는 일도 아니다. 어쩌면 진실 규명을 위한 싸움이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진실에 대한 인정과 그에 바탕한 책임 있는 사과가 용서의 출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용서를 하기 위한 실천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회적 악과 싸워야 하며 그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가 침묵하고 무관심하여 진실이 드러나지 않고 악의 정체가 역사 속에 묻히도록 가만히 있는 것은 희생자들에게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살아 있다면, 고난과 악, 그런 것들이 우리의 종교적 성숙을 위해 다 필요하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고, 용서를 향한 개인의 영성만 추구하고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예수는 고난과 악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으며 그들을 보듬고, 그 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함께 싸우고 투쟁하지 않을까?

그래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밝혀졌을 때, 그리고 악의 시작점에 있었던 집단이나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지는 일이 완료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는 용서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결핍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악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선을 충분히 쬐면 극복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가 한때 빠졌던 마니교라는 종파의 선악 이원론으로부터 자신과 정통 교회를 지키기 위함이었겠지만, 그런 주장 역시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에게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인정한다.

선과 악을 궁극적으로 다른 실체로 보든,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든 그러한 비생산적으로 보일 수 있는 논쟁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세상은 여기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있다. 까뮈의 말대로 부조리함을 그대로 안은 채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이라는 책에서 '말'이 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제한된 인식론적 틀 속에서 주조된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재(사물)와 불연속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그렇듯 어쩌면 고통받는 사람들과 맞잡은 말 없는 손과 악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듬는 말 없는 발길이, 화려한 언어와 빈틈 없는 논리로 이루어진 신학자들의 신정론과 기독교 지도자들의 어쭙잖은 위로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훨씬 강력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값싼 용서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감이 분노만 쌓는다고 말하며 용서만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사실 정의를 원하지도 않고 정의를 위해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정의를 위해 피 흘린 사람들의 그 희생 위에 그나마 조금 누리는 우리의 자유가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의 편향된 기독교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악과 싸우는 일을 계속해서 터부시한다면, 사회로부터의 신뢰를 이미 많이 잃은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 사회를 밝히고 부패를 막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악으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교회로 되돌아올 것이다.

한택규 /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했습니다. 사정상 독일 유학(교회사 전공)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0여 년 하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아이들 수학을 가르치며 소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뜻이 있어 목회를 안 하고, 한국 사회가 상식이 통하고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꿈꾸며 사는 한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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