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어찌할꼬? 한국교회여

한국교회는 성장했다. 그리고 나름 한국 사회에서 한몫을 감당해 왔다. 아름다웠다. 또 벅찬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교회가 세워진 철학적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만큼 한국교회 또한 혼란스럽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사회를, 그리고 교회를 해체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이라는 광풍 속에서 살아갈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성도들, 그리고 씨름하는 성도들을 위해 좋은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탁월한 신약학자 리처드 보캄이 집필한 <세계화에 맞서는 기독교적 증언>(Bible and Mission; Christian witness in a Post-modern World)이 그 책이다. 책은 포스트모던이라는 기존의 철학적 기반이 해체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리스도교가,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 차근차근 그려 나간다. 그것도 선교적으로! 우리보다 앞서 고민하며 대안을 그려 나간 그의 증언을 한번 들어 보자.

▲ <세계화에 맞서는 기독교적 증언> / 리처드 보캄 지음 / 강봉재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160쪽 / 8,000원

더 이상 전체주의란 없다

리처드 보캄은 먼저 9·11 테러를 중심으로 논지를 이끌어 나간다. 특별히 9·11을 맞이하여 영국 신문 <더 타임스>에는 유대교 수장인 조나단 삭스가 글 한 편을 실었다. 보캄은 조나단 삭스의 글로부터 그의 그림을 이끌어 나간다. 오늘날의 사회, 이른바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 약술하자면 지금까지 많은 문화가 '전체주의'를 추구해 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기독교, 이슬람, 계몽주의 등등. 하지만 오늘날 도래한 포스트모던은 그러한 전체주의를 반대한다. 전체주의에 의해 억압된 개인들, 집단들의 독특성, 개성들을 살려 내는 것이 오늘날의 풍토이다. 이런 풍토는 이른바 '다원화'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다원화'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이야기는 여전히 존속할 수 있는가?

보캄은 분명 이에 대하여 "당연 그렇다, 아니 원래 기독교는 그랬다"고 대답한다. 물론 오늘날도 우리를 지배하는 이른바 전체주의의 이념이 있다. 이른바 '자유 시장경제 체제'이다. 이전처럼 정치적인 면모는 덜하지만, 경제적인 억압을 통해서 우리를 전체주의로 이끌어 간다. 기독교는 이와 대척점에 서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전체주의적이지 않은가? 보캄은 분명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독교가 꿈꾸는 세계는 전혀 전체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성경의 내러티브로 돌아가자며 성경의 이야기들을 약술한다. 그리고는 보캄은 주장한다. 기독교가 꿈꾸는 세계는 무엇보다도 개별자의 독특성, 개성들을 존중하고, 끌어안는 세계라며 말이다.

개별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

'개별자'라는 말은 조금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성경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성경의 독특한 인물인 아브라함을 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안다. 다윗 왕을 안다. 이들은 각기 독특한 인물이며, 독특한 민족이며, 독특한 왕이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독특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들의 독특성, 개성은 말살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라는 궁극적 미래는 이러한 독특성과 개성을 말살시키고 정복하는 전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개별자들로부터 시작되고, 개별자들의 독특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포용하는 나라이다.

보캄은 성경의 내러티브들을 천천히 다뤄 나간다. 아브라함이라는 개별자에서부터 이삭에게로, 그리고 야곱에게로, 때로는 보디발이나 바로에게로 흘러가는 복의 흐름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복의 흐름 말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주목한다. 그의 추적을 꼼꼼히 따라가 보라. 아브라함이라는 개별자의 독특성에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보편적 미래의 그림이 뚜렷이 그려진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독특한 민족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지 않다. 그럼에도 야웨는 그들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그 독특성, 개성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열방을 당신 앞에 무릎 꿇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모든 열방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이다. 또 이 이야기에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독특성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열방의 구원으로 향한다. 다윗 왕도 마찬가지다. 보캄이 추적한 성경 내러티브들을 따라가 보라. 독특성을 살려 내는, 개성을 살려 내는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나라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보캄은 논지를 돌려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다룬다. 어떤 문벌 좋은 자도, 지혜 있는 자도 아닌 세상의 미련한 자들이 모인 고린도 교회의 정황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관심은 비천하고 가난한 자에게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러한 '낮은 곳으로의 집중'은 결국 스스로가 높아졌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메시지라는 사실 또한 밝혀낸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이러한 그림은 뚜렷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 발견되는가? 바로 국가적 폭력 앞에 죽임당한 한 죄인으로부터 발견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도 개별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그림을 잡아 낼 수 있다. 보캄의 논지를 찬찬히 따라가 보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나라'는 전체주의와는 다른 개념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포스트모던은 하나님나라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월주의가 아닌 보편주의

탁월한 성경학자인 보캄은 이어서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민족들의 명단에 집중한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내러티브가 이러한 민족들의 명단이 그려 내고 있는 세계(한정된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끝없이 이러한 지리들을 수정·보완·재해석하고 있음을 추적한다. 재미있게도 구약성경에서는 그 어떠한 지역적·민족적 우월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민족중심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이방 민족들 또한 이스라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민족들이다. 오히려 우리는 보캄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구약성경에 그려진 '보편주의'를 읽어 낼 수 있다.

물론 구약성경은 개별자인 '예루살렘'에서, '시온 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개별자들이 위대하거나, 대단한 지위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야웨의 주권'이라는 신비에 감춰져 있다. 이러한 '야웨의 주권'이라는 신비 아래에서 성경은 선교적 그림을 그려 낸다. 이러한 선교적 그림은 이방 족속들이 독특한 개별자에게로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개별자들이 파송을 받고 이방 민족들에게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면서 사라진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공동체가 바로 예루살렘이며, 예수가 바로 시온 산이며, 예수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보캄은 이러한 예수에게서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읽어 내는 동시에, 갈릴리와 유대에서 살아간 예수의 특수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예수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기독교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캄은 '포로 생활 공동체'의 모습을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공동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졌음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별자의 독특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나라들 가운데에서 나그네요, 추방자로 부름받았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나그네의 이미지, 추방자의 이미지, 포로의 이미지를 보캄은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포스트모던 이후의 기독교가 세계 속에서 점유해야 할 위치라고 말이다. (덧붙이자면) 세계를 전체주의로 지배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변두리의 위치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궈 내는 이미지로써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는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 서사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기술했다. 전체 역사에 대한 단일한 이야기에 대한 의심, 그리고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개별자들의 특성들에 대한 관심.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다.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성도가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 흐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은 결국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맥락 위에서 교회 조직을 세계화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다른 어떤 누군가에게 억압적으로 강요하고, 복종시키는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이러한 중세 기독교적 방식, 십자군적 방식은 더 이상 포스트모던이라는 우리 시대의 맥락 위에서 교회의 방식으로 유효하지 않다.

사실 지금까지 보캄이 그려 온 성경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성경 자체의 이야기가 어떤 누군가에게 억압적으로 강요하고 복종시키는 방식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자유, 개별성, 독특성을 상당히 존중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억압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를 인간의 정복에 의해 성취되는 인간의 프로젝트로 볼 수 없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주장을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반대로 읽어 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오늘날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반대로 읽어 내야 한다. 그들이 '경제'라는 무기로 오늘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캄은 '경제'가 오늘날을 전체주의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물론 이 자유 시장경제 체제는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고 홍보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자와 권력자만 배부르게 하고, 가난한 나라는 계속 가난하게, 부자인 나라는 계속 부자로 만드는 체제가 바로 자유 시장경제 체제이다. 경제성장, 이른바 경제실용주의는 기독교인들마저도 손쉽게 받아들이는 (숨은) 전체주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주장은 이러한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 내야 한다. 또한 기독교도 우리 인간의 인간 됨을 억압하는 오늘날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으로써 기능해야 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주장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가? 먼저는 독단적이고 확정적으로, 또한 다른 가능성에 대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열린 자세 아래에서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강요라는 모습을 통해서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거대 서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합당한 진리 주장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증언'이다. 성경의 이야기 또한 이러한 '증언'을 지지한다. 개별자를 억압하고 있는 전체주의, 이른바 경제적 전체주의에 맞서서 싸우는 '증언'이 포스트모던에서 기독교적 주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어서 보캄은 계시록의 권위자답게 계시록의 전체적인 주제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 기술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보캄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회가 처하는 현실은 매번 달라지기 일쑤여서 마지막 단락을 장밋빛 환상으로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 선교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 신실함, 그리고 분별력을 지켜 내라는 그분의 요청에 늘 주의를 기울이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의 세계화(포스트모던 아래에서 경제가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상황)는 우리가 그 안에서 적절하리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거룩함, 신실함, 그리고 분별력을 지켜 내야 하는 새로운 상황이다. (중략) 가난한 자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온전함과 다양성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 삶의 참된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 놓고 반대하는 이기주의, 착취 및 억압을 일삼는 지구적 야심에 대해서도 크게 까발려야 한다. (중략) 기독교적 증언은 밖으로는 특히 희생자들과 무시당한 자들과 결속을 다지고, 앞으로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를 소망하면서 교회를 성경으로 되돌려야 한다." (144~145쪽)

증언, 그 머나먼 길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내 사역 이야기를 살짝 언급하며 글을 끝맺고 싶다. 나는 포스트모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배운 것도 아니지만 이미 태어나면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철학이 만들어 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본인은 전도사이지만 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한다. 무엇보다도 까칠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윗사람에게는 까놓고 싫은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만큼은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또 격려해 주고만 싶다. 그런 나의 모습을 두고 누군가는 물었다. "싫은 소리를 안 하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요?" 내가 취하는 방법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앞에서 '온전한 선배'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가장 좋은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는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지만 내 삶과 행동만큼은 그들에게 찔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친히 그를 향해 찌르는 우리의 창이, 그를 하늘 높이 매단 우리의 십자가가, 그를 향해 내뱉었던 우리의 침과 욕설이, 결국 우리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향해 꼰대질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감내했던 삶의 증언으로 우리를 변화시켰다.

포스트모던은 "이것이 진리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일수록 삶으로 묵묵하게 살아 나가는 진리는 빛이 난다. 보캄의 글을 읽으면서 참 위로가 되었다. 눈에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 날마다 좌절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더 굳건히 증인의 삶을 살아 내고, 행동과 삶으로써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는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책은 그리 쉽지 않다. 강연을 묶어 낸 책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가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읽을 만한 책이고, 포스트모던 가운데 교회와 성도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의 증언, 즉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나라의 진리에 대한 증언 — 제국주의 세력과 이 세력의 문화가 조성하는 세상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증언 — 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증언한다(이 말은 증언에 있어 그밖의 다른 어떤 방식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된 증언 방식이라는 것이다). 짐승에게 경배하거나 바벨론의 억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충실하게 지켜 냄으로써 그들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보편적인 권력을 지녔다고 큰소리치는 그 짐승의 거대 서사의 허위를 까발린다. (중략)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당하겠다는 것으로 인해 권력에 대한 의지와 구별되는, 진리에 대한 증언은 권력에 대한 의지와 맞서 그것을 무너뜨린다." (140-141쪽)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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