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혹은 세상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든지 거기에는 자율화된 내재적 삶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은 일단 대단히 편리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매우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무의식적인 삶의 관성과 법칙과 원리에 따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지 않고 반(半)자동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겁니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자율화한 삶 가운데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것이야말로 고여 있는 물처럼 부패의 온상이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안고 있는 문제적 요소는 내 삶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는 방식 자체입니다. 존재하는 방식 곧 인식의 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문제가 될까요? 무의식 가운데 자율화한 이 시스템이 우리의 건강한 삶을 갉아먹고 후려치고 배반하고 속이고 수탈하고 억압하고 위협하는, 쫓고 쫓김 당하는 시스템 자체를 끝내는 날까지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너무 절망적인가요?

제가 강조하려는 건 우리가 놓인 형편이 절망적이라는 부정적 주장이 아닙니다. 이 시스템이란 게 우리 마음이 느끼는 절망과는 아예 상관이 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의 과학성입니다. 그게 자율입니다. 전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지만 우호적이라고 할 것도 없이 냉정한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다 해 주시겠지, 다 잘될 거야, 믿습니다" 하면서 기도를 서너 시간씩 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 시인 마야꼽스끼(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1893~1930)의 시에 '마법사도 신도 신의 천사도 농부들을 돕지 않는다'는 게 있습니다. 또 '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빌어도 가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은 과학을 초월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도 역시 과학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물론 좀 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종교와 과학은 대립되는 양 진영이 아니라는 조언을 하고 싶겠지만, 어리석기로 따지면 쌍방이 다 막상막하인 경우들이 현실에서는 부지기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스템은 비(非)우호적이고 자기 나름의 법칙과 원리와 과학성에 의해 반(半)자동적으로 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러한 세상 원리에 투철하게 입각해 사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진짜로(!) "약한 존재들,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죽게 돼 있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말을 아주 권위 있고 거만한 태도로 합니다. 이런 걸 '사회적 다위니즘'이라고 불러 주는 것도 사치겠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쓴 반(反)기독교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것이 이 사람의 말이 정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이 말입니다. 세상은 실제로 약육강식 자연선택에 의해 돌아가니까요. 또 말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페이스북의 어떤 목사님은 항상 약한 사람들에게만 짜증을 부립니다. 정의를 호소하고 인권을 요구하고 진실을 청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판하지 말라. 용서해라. 그게 기독교다" 이런 식의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힘 있고 권세 있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높은 뜻을 지니고 고상하고 품격 있게 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설교하는 겁니다.

중국의 신문학 개척자 루쉰(魯迅, 1881~1936)은 본래 의사 지망생이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일본으로 유학 가 의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있었지만 현실을 타개해 나갈 공부가 더 절실했던 겁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중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가 계속 의학을 공부했더라면 성격상 현대성과 과학성을 신봉하면서 모든 봉건 잔재를 거부하는 치열한 개인주의적 투쟁에 일생을 맡겼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의학 수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중국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전쟁 시기였기 때문에 수업 중간에 환등기로 전쟁 상황을 방영해 주곤 했다고 합니다. 그날도 전쟁 보도 영상을 상영했는데 거기 중국에서 찍힌 장면이 나온 겁니다. 일본군들이 자기들에게 저항하는 중국인 애국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루쉰은 그걸 보고 의학 수업을 그만뒀던 겁니다. 그를 아꼈던 일본인 교수는 루쉰이 학업을 계속하기를 바란다고 충심 어린 권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루쉰은 더 이상 의학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문제의 장면은 그에게 의학과 의업에 대한 절망을 느끼게 했던 겁니다.

다름 아니라 애국자들이 처형되는 그 자리에 둘러선 중국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동포를 외국인들이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목을 잘라 죽이는 살인의 현장에 동원된 그들은 마치 살아 있는 송장들 같았다고 그는 썼습니다. 한결같이 넋이 나간 듯 무감각한 얼굴들이었는데 간혹 일본군들이 사람을 죽일 때 만세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던 겁니다. 중국인으로서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수치(羞恥), 사람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무의식적 경험은 수치입니다. 루쉰의 수치는 무엇에 대한 누구의 수치였을까요? 사람을 고치는 데는 의술만으로는 안 된다는 절망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를 고치고 싶었을까요? 그가 문학으로 뜻을 바꾼 것은 오랜 수치의 나날을 거쳐서 내린 결론입니다. 귀국 후 그는 무기력한 실의에 빠져 오로지 옛 비문을 탁본해서 옮겨 쓰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저는 그의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루쉰적 수치'가 느껴집니다. 그가 이십대에 겪었던 절망을 사십대 후반에도 겪고 있는 저는 그래서 더욱 절망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저의 이러한 목회나 설교도 루쉰이 비문을 옮겨 적었던 일에 비할 수 있을까요? 감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해 보는 것이지요. 동료 인간들의 죽음과 절망 가운데서 넋 나간 표정으로 이리저리 세태에 휩쓸려 박수를 치거나 만세를 부르는 것은 <아Q정전>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닌 겁니다.

2.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을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라고 한답니다. 졸업장이자 학위이고 시험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 시험지가 번역돼서 인터넷상에 돌아다녔었는데, 첫 번째 항목은 이렇습니다.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Q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Q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Q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Q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Q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Q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Q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Q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각 항의 질문들을 대강 헤아려 보면 그 대답은 전부 다 '그렇다'와 '아니다'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은 전통적이고 모범적인 견해에 대한 지지라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아니다'는 반(反)전통적이고 창조적인 대답을 요구한다고 보입니다. 즉 왜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또 다른 논리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읽어 보면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라는 구태의연한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시험관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즉 일부러 아니라는 대답을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대답하려면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져야 할 겁니다. 그 논리 또한 구태의연해서는 안 될 겁니다. 부단한 창조 정신을 독려하는 프랑스 인문주의의 정신을 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유명한 글도 있지만, 도무지 생각이란 뭘까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에는 '자율적이고 관성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비우호적이고 냉정한'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거기에는 도무지 다시 생각하지 않고, 고쳐 생각할 줄 모르는 백성의 무기력한 현실에 대한 선각자의 답답함과 고단함이 묻어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할 줄 모르고 살아왔던가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고 역사라는 일깨움 아니겠습니까. 

이 경우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것은 생각을 도무지 아니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정된 생각, 규정된 대답, 프로그램화한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생각한다는 새로운 창조 작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삶의 무관심과 나태함과 몰이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과학이 있습니다. 즉 이러한 삶을 만들어 내는 자율화한 삶의 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자율화한 삶이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우리들의 마음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세월호의 부모들을 거리에서 헤매게 하고, 모든 고통들을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하면서 세월만 가라고 하고, 거꾸로 그 고통들을 향해 "이제 그만 좀 하라. 지겹다" 하는 식으로 우리의 풍속과 인심을 아주 못 쓰게 만드는 겁니다. 자기가 지겹든지 어쨌든지 고통이 그만 하란다고 그만해지는 겁니까? 그만둔다고 정말 그 원한과 고통이 덮어지는 거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헬라어를 가르쳐 주셨던 신약학 교수님께서는 "목회자는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목회자만 그런 게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상가 철학자는 못 되더라도, 사상이나 철학은 다 본래 지겨운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사상가나 철학자를 죽일 때까지, 심지어 죽어 가면서도, 죽은 후에 책으로까지 살아남아서 지겹게 자기주장을 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사상이고 철학입니다. 이제 그만 좀 했으면 한다고 적당히 그만두는 건 사상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시류일 뿐이지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질 때 분명한 행위의 결과가 도출됩니다. 그래서 그게 법이 되고 원칙이 되고 사회의 공적 제도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관성에 따른 오류와 패착의 반복일 뿐인 것이고, 그런 게 법이 되고 원칙이 되고 제도가 되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겁니다. 

3.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태복음 11:15-19)

여기서도 예수님은 이 세대, 곧 당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실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비유도 아주 원색적인 비유이지요? 하는 짓들이 어린애들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다음 문단을 보면 아주 불 같은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1-24)

누구에게 내리는 저주며 누구에게 터트리는 분노입니까? 어린애들의 깨우침만도 못한 취향으로 살아가고 있던 당시대의 현대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마야꼽스끼가 첫 번째 작품을 발표한 게 <대중의 취향에 갈긴 따귀>라는 작품집인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대중의 취향에 갈기는 따귀 정도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 갈긴 저주의 폭격'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겁니다. 왜 이렇게 격렬하신 걸까요?  

비유란 그 속에 의미가 들어 있어서 그 의미를 발견해야지만 그 다음 무언가를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냥 겉에 나타난 액면 그대로가 아닙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자꾸 비유 속의 비유를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이건 정말 해괴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써 당 시대의 현실을 설명하신 건데 해석을 하려면 이 비유로써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설명해야만 할 겁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도외시해 놓고, 예수님의 비유이니 그 속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뭔가 대단한 비밀이 있을 것이라 하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것 같지만 실은 정말 약이 없는 취향의 독특함일 뿐입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는 것을 가져오라'는 난센스와 같습니다. 

또 현실을 해석한다고 할 때 어떤 충성된 분들은 이러한 비유를 모조리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엿 바꾸어 먹는 아전인수(我田引水)를 단행합니다. 옛날 저의 은사이셨던 목사님께서는 이것을 무지개에 비유하곤 하셨습니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입니다. 그런데 이 충성된 분들은 그게 맘에 안 드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오직 하나의 색깔만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 동네 무지개는 '빨빨빨빨빨빨빨'이 된다는 겁니다. 소위 '깔때기 이론'입니다. 서론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든지 간에 성경 본문은 어떤 본문이든지 간에 결론은 버킹검,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어느 영성가는 말하길 "십계명을 한마디로 줄이면 돈을 더 많이 내라는 말이라"고 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의 성격이 약간은 다르지만 그 기본 골자는 같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2, 4:17)라는 공동의 슬로건으로 표상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원문의 맛을 잘 모르지만, 이 말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시급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것은 또한 급격하고 전적인 어떤 전환을 요청하는 '절대 언어'입니다. 그저 방법론적으로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구태의연 가운데 놓여 있던 인간의 의식을 확 일깨워 발등에 불 떨어진 현실의 다급함을 환기시켜 주는 겁니다. 지금이 이렇게 한가하게 침묵하고 회개하며 기도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지요? (하더라도 그런 정신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들었을 때 유대교의 점잖으신 랍비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도 다들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요동하지 말라. 하늘이 열린 이래로 세상은 언제나 돌아가는 법칙이 있다. 경거망동으로 자기를 망치지 말라." 그렇게 훈계했을 겁니다. 혹은 짜증을 부렸겠죠? "나는 노란 리본이 싫다. 개혁이니 진보니 정의니 진실이니 하는 말들이 나는 지겹다. 이제 그만 좀 했으면, 다 내려놓고 용서하고 세상 좀 조용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양비론적인 편 가르기, 중립을 빙자한 은근한 디스. 이런 게 다 비유지요? 해석할 메시지가 들어 있는 거지요? 그런 겁니다.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나라의 임박함과 시급함이라는 것도 그런 사람들에겐 그렇게 절실하지도 놀랍지도 심지어 듣고 싶지도 않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다 알고 있거든요. 무엇을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대중의 취향에 갈긴 폭격입니다.

어느덧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영적 급진성을 종교적 부흥으로 엿 바꾸어 먹었습니다. 인식상의 급격한 전환을 방법론적 분위기로 전환시켜 감동적인 음악과 뜨거운 찬양이 흐르는 예배당의 열기로 환전해 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열은 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시대의 부흥과는 부합치 않습니다. 가장 먼저 그것은 시대와 사회와 사람들의 현실에 구체적이고 결론적인 영감을 주는 데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에드워드가 미국의 현대 사상과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같은 공적 제도 창출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이 점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들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종교열에 휩싸였어도 결국 현실을 바꾸어 놓았는데, 우리는 현실이 우리를 일깨워도 그것을 도외시하고 종교에 열중하라고만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누가 아닌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린애들같이 돼 버렸습니다. 무감각.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칠 줄 모릅니다. 불소통의 냉담함과 냉정함. 요한이 오면 금욕주의자 사회생활 부적응자 정신이상이라고 들어 주질 않고, 예수가 오면 "옳다 잘 걸렸다. 먹기를 탐하고 술이나 마시는 주제에 몰려다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세리 창녀 죄인 들뿐이니 저게 무슨 랍비냐" 하면서 거룩하게 외면하는 겁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현상 그대로의 유지, 하나님나라의 급진성도 인식 변화의 급격함도 군중들의 엄청난 반향도, 거국적인 장례와 애도와 추모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진실과 정의의 요구도, 날마다 되풀이되는 죽음과 고통의 문제들도 교회와는 상관이 없고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겁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4.

무의식적인 꿈이나 환상이 그렇듯이 자각된 영으로 보면 이 세상 현실 역시 인식되지 못한 실제 상황의 자기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비우호적이고 냉담하지만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 같은 겁니다. '자연(自然)'이 스스로 그러하듯이 그것은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 달리 우리의 현실이 말한다는 것은 특별히 요구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연의 탄식'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롬 8:22), 피조물의 탄식이란 사도바울 자신이 갖는 인식이지요? 인식하면 사대강의 재앙 같은 자연의 탄식도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되지만, 인식하지 못하면 세월호 사건 같은 최악의 현실도 그저 자연의 일부가 돼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직접적이고 외부적이며 구체적인 해결이 아니면 안 되는 한 가지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침묵하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감 떨어지듯 알아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안 일어나고 일어나도 모른 척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그런 해석, 그런 신학에서는 말은 어떻게 할지 몰라도 구태의연한 기회주의와 통상적인 비겁과 개인주의적 게으름이 양산될 뿐입니다. 혹은 현대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종교든 교회든 신학이든 목회든 결국은 '메시지로 말미암은 실천, 실천을 요청하는 메시지'입니다. 즉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지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회개하고 침묵하며 기도하라'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를 저에게 묻지는 마십시오. 그 대답은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지 저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제게는 저의 마실 잔이 있는 거겠지요? 물론 우리가 서로에게 참고할 수는 있을 겁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가 아니라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시급하게 '하라' '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메시지는 거부되고 무시되는 겁니다. 

과연 그 실천의 길을 가르쳐 주는 구체적 인도함이란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매순간 하나님나라의 급진성과 인식상의 급격함, 그 영적 자각 속에 발견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러한 관점으로 우리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비우호적이고 관성적이며 냉정하게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임하는 의식적이고 우호적이며 저항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이건 높아진 자의식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을 관망하며 도사풍의 고상한 영성을 강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가진 현실 그리고 우리 시대가 가진 현실 그대로를 통찰하여 거기서 끝내 벗어나려는 자유와 구원의 모색, 곧 자기부인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한다'는 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봐 주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비유의 원관념을 집요하게 파고들 때 우리는 비로소 문제의 파악과 문제에 임하는 자세를 동시에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곧 성경을 읽든 세상을 읽든 자기 마음을 읽든, 글자 그대로, 문자주의가 아닌 겁니다. 성경은 같아도 메시지는 다른 겁니다. 어찌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같은 말이겠습니까? 같다면 같아지는 과정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범죄자와 피해자가 같겠습니까? 같다면 같아지는 단계가 필요한 겁니다. 문자주의자는 단지 종이의 표면에 적혀 있는 문자만 보고 그 문자를 실제로 이해한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수가 많습니다. 심혼(心魂)이니 영혼(靈魂)이니 심령(心靈)이니 하는 말들은 다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는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게 무언지는 묻지 마십시오. 그건 대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는 것이고 짐작하는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실 겁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콤플렉스라고 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꿈은 그 사람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말하는 거니까요. 마찬가지로 내가 만나는 이 세계의 모든 메시지는 온전히 오로지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져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책임인 겁니다. 공염불로 드리는 '제 탓이오. 제 탓이오'는 사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이 모든 세계의 인식이란 것이 결국 내 안에서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식하게 될 때는 무한한 나의 책임, 곧 인식한 사람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교회 문제든 사회문제든 그것들은 그 자체로 나에게 구체적인 행위적 결재를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교회 갱신, 어렵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취향을 바꾸면 교회는 바뀔 겁니다. 따귀는 자기가 맞고도 우리가 느끼는 수치를 모르는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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