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 차정식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400쪽 / 1만 4,000원

1.
고단한 사역, 열렬한 읽고 씀에도 불구하고 한참 모자란 것만 같은 공부, 흔들리고 흔들리기에 도저히 미래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상, 이러한 겹겹의 고단함 속에서 말라죽어 가는 신학도가 간구할 유일한 소망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 외에는 없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약동하는 공간인 예배, 하지만 학교에서 매주 하는 채플은 그러한 소망의 예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성공했다며 스스로를 자부하는, 그러면서도 요즘 젊은 신학생들을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말씀도 제대로 보지 않고, 교회에도 열심을 다하지 않고, 예의도 전혀 없기에)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채플 강단으로 초빙되어 성서학과 조직신학을 연마하고 있는 날이 선 신학도들을 향해 어설프고도 천박한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그것도 감히 설교라며.) 

하물며 채플 강단에서조차 천박한 이야기가 설교로 둔갑하는데, 지역 교회 강단에서는 어떨까? 대부분의 신학교 신입생들은 지역 교회에서 연마한 천박한 성서 해석에다가 자신의 신앙을, 그리고 자신의 소명을 차곡차곡 쌓는다.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자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결단코 무너지지 않겠지만, 어설프고도 천박한 설교 위에 집을 세운 자는 곧장 무너진다. 고작 1~2년의 신학 수업 끝에 소명을 포기하든지, 방황하든지, 혹은 신학과 담을 쌓는다. 이럴 때마다 곧잘 상상을 하곤 한다. "신학자들이 천박한 설교자들에게 반격을 가하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생각. 천박한 언설들이 설교로 둔갑되는 채플 설교 시간, (천박한 설교 선포에 대해 꾹 참는 듯) 입을 꽉 다물고 눈이 충혈된 것처럼만 보이는 교수님들이 갑자기 일어나 설교에 딴죽을 건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와 흡사한 일이 바로 일어났다. 신약학 차정식 교수의 역작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가 바로 그런 유의 딴죽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은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서, 서신서, 그리고 조금은 다른 유의 '상상하며 바로 읽기'라는 챕터. 하지만 챕터의 구분은 임시적일뿐 각 아티클들을 읽다 보면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흔한 잘못된 성서 해석에 대한 일갈을 담아낸 아티클이다. 가장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나름의 신약 난제 본문들이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뾰족한 해석의 묘수를 못 찾는 본문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아티클도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는 저자만의 고유한 해석적 시각을 담아낸 아티클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세 부류를 각각 한 아티클씩 인용하며 정리하는 방식으로 서평을 하고자 한다.

2.
한때 강단에서 '이 세대의 변덕'에 대한 설교를 들은 기억이 아주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본문은 누구나 기억할 테다.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요동치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에 대한 한탄을 담은 본문. 실제 본문은 '완악한 세대'에 대한 묘사로써 잘 활용된다. 특별히 나름의 기성세대들이 신앙적 뜨거움을 잃어버린, 혹은 초심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를 탓하는 내용으로, 혹은 목회자들이 신앙의 초심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탓하는 내용으로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다. 하지만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맞는 말이긴 한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마음이 식어 버린 것도 일견 맞는 진단이긴 하지만 복음서 전체의 신학이 과연 '기성세대들이 청년을 탓하는 방식'으로, 혹은 '목회자가 일반 성도를 탓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아련히 남기에 어느새 그런 유의 설교는 수긍 반, 의심 반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는 "제 논에 물 대기 하는 '이 세대'의 변덕"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에 대한 정밀한 해석을, 또한 기존 해석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그의 문제 제기는 얼핏 필자와도 비슷하지만 그의 성정답게 아주 조심스럽게, 밑그림부터 차근차근 그려 내며 본문이 말하는 바에 접근한다. 차근차근 접근하며 밑그림을 쫙 그려 놓고 그만의 고유한 필치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압권이나 고유한 필체와 논리 전개 방식은 감히 따라서 묘사할 수 없기에 그의 결론만 살짝 인용하려 한다. 

여기서 피리를 불고도, 또 곡을 하고도 움직이지 않는 완악한 세대라며 탓하는 이는 누구인가? 예수인가? 세례요한인가? 저자의 답변은 간단하다. 바로 위선적 바리새인들이다. 오히려 피리를 부는데 요동치 않았던 이가 세례요한이며, 곡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이가 예수이다. 저자의 서술을 읽고 나면 어느새 명쾌해진다. 물론 당시에 찝찝함을 가진 채 은혜받았던 예배 때의 기억이 겸연쩍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건 이처럼 저자는 어설픈 성서해석과 인용을 통해 '성서의 말'이 아닌, '자신의 말'을 내뱉는 설교자들에게 역공을 가한다. 그동안 참아 냈던 울분을 터트리며. 물론 그 울분은 그런 유의 설교를 감내하던 회중들의 울분이긴 하겠지만.

3.
그러고 보니 한때 유명한 목회자가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삭제된 '음부로 내려가시고'에 대한 발언과 죽은 자에 대한 기도를 언급했다가 큰 논란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젠틀하고, 명민하며, 또한 실력 있는 목회자였기에 당시의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에 그치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이유들도 있었지만) 특별히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주장, 혹은 죽은 자들이 대기하는 연옥이 있다는 주장은 베드로전서 3장에 기반을 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해석적 주장이 나뉘는 곳이기도 하며, 섣불리 해석했다가는 괜스레 큰 홍역을 치를 만한 '신약 난제 본문'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는 먼저 유대교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영향을 미친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해설한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분리되고, 나름의 정화소에 들어가는데 그곳이 바로 이른바 '연옥'이라고. 그런데 베드로전서의 구절을 여기다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옥'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연옥에 대한 구원의 선포라면 '패자부활전'의 개념이 들어와서 기존의 단회적 종말론 신학이 파괴된다. 뿐만 아니라 '옥'을 플라톤의 체계를 빌려 오지 않고 그저 지옥으로 상정하게 되면, 지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뭔가 엉성한 결과만을 도출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 본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본문이다. (그랬으니 바로 신약 난제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바로 에녹서 인용이다. 에녹서의 정황을 베드로전서에 개입시키게 되면 옥에 갇힌 영들은 곧 사탄적 존재이다. 예수의 옥에 대한 선포는 '구원의 선포'가 아닌 '최종적 승리의 선포, 심판의 선포, 죽음의 선포'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신약성서 저자들에게 에녹서가 차지한 비중과 영향을 들며 에녹서를 통해 난제 구절을 해결할 것을 제언한다. '옥에 갇힌 영들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바로 사탄 마귀를 향한 '최종 승리의 선포'라고 말이다. 이처럼 저자는 신약 난제 본문에 대하여 나름의 뾰족한 묘수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성도들이야 별 궁금증이 없을 수 있는 본문이겠지만, 치밀하게 이성적으로 본문과 씨름하는 성도들에게나, 혹은 어쩔 수 없이 성서의 순서대로 강해 설교를 해 나가면서 난제 본문과 부딪히는 설교자들에게는 해갈이 되는 단비와 같은 아티클이라 할 수 있다.

4.
한때 필자는 로마서를 연구한 적이 있다. 또한 선교 단체 간사님의 배려로 2시간짜리 강의를 맡게 된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로마서를 재미있게 풀어내기 위해 로마서의 기록자로 1절에 기록된 '더디오'란 사람을 주목했다. 그리고는 그를 기점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개작했고, 그를 바탕으로 로마서의 기록 배경을 쉽고, 재미나게 풀어 가려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저자 또한 이 더디오에 주목한다. 그는 학창 시절, 로마서 16:22에 단 한번 등장하는 인물 더디오에 대한 350여 쪽 연구서를 봤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저자는 이 더디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저자는 더디오와 관련된 다양한 의문들을 제기해 본다. 사례를 상상해 본다던가, 바울과의 관계에 대해 상상해 본다던가, 혹은 자신의 이름을 표기한 그 자체를 '실수'로 상상해 본다던가. 이러한 상상의 다양한 갈래를 제시하는 저자는 그 상상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유의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한 더디오의 침묵에 집중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바울과 교감하면서 (더디오는) 긴 편지를 쓰는 긴 시간 내내 자신의 속으로 들끓는 모든 말들을 삼킨 나머지 말하지 않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단 한마디보다 훨씬 더 많았"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텍스트 속에 전제된 침묵이, 그리고 여백이 우리의 상상력을 살려 낸다며 우리의 성경 독법, 묵상법에 대해서 한 수 제언을 내뱉는다.

그 외에도 저자는 고린도전서 4장에 기록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전제된 창립 문서를 상상하기도 하고, 하나님나라의 비밀 모티프에 대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밀당을 통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상상하기도 한다. 어쩌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아니 의문점조차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는 본문을 저자는 발칙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읽어 낸다. 이러한 독법을 우리의 모범 사례로는 삼을 수 없겠지만, 충분히 그의 독법은 우리의 강고히 묶여 있는 해석적 아집들을 해방시켜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5.
사실 강단의 성서 해석에 대한 일갈은 저자의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가 처음은 아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한 두 역작인 이민규 교수의 <신앙, 그 오해와 진실>, 권영진 목사의 <성경, 오해에 답하다> 또한 유사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작품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본 서평은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의 서평이기에 본 책에 대해서만 다뤄 보고자 한다.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상당히 '차정식'스럽다. 그가 해 온, 그리고 집필해 온 고유한 아티클들과 책들과 여전히 닮아 있다. 여전히 닮아 있다는 점은 고유의 한국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필력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타인은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할 그의 미려하고도, 살짝은 돌려서 그려 내는 필력은 자칫 피곤해 보일 수도 있는 '바른 성서 해석의 제시'라는 영역에서 피로감을 줄여 준다. 뿐만 아니라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창조적 향내를 품어 내기에, 무엇보다도 글의 유려한 서술들이 '가치'가 있다. 글의 품새건, 글을 통해 그려 낸 세계건 누가 따라할 수 있으랴?

'차정식'스러운 책이긴 하지만, 어쨌건 본 책은 총 40개의 아티클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아티클당 하나, 혹은 네 개까지의 비슷한 유의 본문을 나름 해석해 내고 있다. (때로는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때로는 해석의 난점을 뚫어 내고, 때로는 창조적 해석의 대안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따라서 본 책을 모든 설교자들, 신학도들에게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저자의 책이 좋은 설교를 만들어 내는 주석이나 백과사전은 될 수 없겠지만, 나쁜 설교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는 데 감시견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그의 글과 그의 사유에 익숙해진다면 혹시 또 모른다. 그처럼 창조적이면서도 구수한 해석들을 성서에서 이끌어 내는 좋은 성서 해석자가 될지.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