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50). 그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안에서 소방 호스를 몸에 감고 승객들을 끌어 올렸다. 김 씨 때문에 배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사람이 20명이다.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 색깔 때문에 그는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불렸다.

김동수 씨의 다음 소식은 비극이었다. 올해 3월, 김 씨는 제주도에 있는 자택에서 흉기로 자신의 왼손을 그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때서야 일반인 생존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다. 김 씨는 여전히 세월호로 생긴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했다. 화물차 운전기사였던 그는 차가 바다에 가라앉아 생업을 잃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해 주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연을 기사로만 접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김동수 씨를 만나게 됐다. 4월 12일, 낮은마음교회(오준규 목사)를 취재하러 갔는데 그날 마침 김 씨가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자해 사건이 있고 난 후, 리멤버0416으로 활동하며 김 씨를 알게 된 강영희 집사가 오 목사와 함께 김 씨를 병문안했다. 그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 씨가 낮은마음교회를 찾은 것이었다. (관련 기사: 한 작은 교회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김동수 씨를 만나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교회에 다니고 있다. 아내와 두 딸도 열심 있는 신자다. 김 씨가 겪고 있는 아픔과 함께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4월 29일,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김동수 씨를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김 씨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을까 마음이 착잡해졌다.

▲ '파란 바지의 의인'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를 4월 29일 혜화동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 안산 트라우마 센터에 가려고 제주에서 올라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나는 껍데기만 남았다

작년이 아니다. 올해 4월 23일이다. 정부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화물차에 대해 배상해 준다고 해, 김동수 씨가 배상을 신청한 날이다.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석 달 안에 배상금이 나온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생존자 중에 화물차 기사들이 많아요. 화물차 기사들은 그 트럭이 생계유지의 유일한 수단인데, 그게 빠져 버렸잖아요. 저도 그렇고 다른 기사들도 아직 트럭 할부금도 못 갚았어요. 이런 참사라면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살 길을 마련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생존자들의 실태를 조사한다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다 우리가 나서야 했어요."

참사 이후 세월호와 관련한 핵심 어젠다는 '특별법' 제정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는 작년 11월 공포된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특별법)을 말한다. 내용은 크게 진상 조사와 안전 사회 건설, 피해자 지원 대책으로 나눌 수 있지만, 진실을 규명하는 데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은 세월호 피해자 중에서도 희생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진실 규명도 중요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을 위한 지원도 중요하다. 이와 관련한 법은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으로 올해 1월 28일 공포됐다. 세월호특별법은 유가족들과 시민단체들의 사투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반면, 피해자 구제와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법에 따라 '4·16세월호참사배상및보상심의위원회'가 올해 3월에야 구성됐다. 위원회가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구체적인 안을 제시한 시기는 참사 1년이 지난 올해 4월이다.

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법에 화물차와 적재 물품에 대한 손해배상이 빠진다는 말이 있어, 작년 11월 김동수 씨와 다른 화물차 기사들이 들고일어난 적도 있었다. 김 씨와 화물차 기사들은 제주도청을 찾아가 원희룡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박태희 제주도 해양수산국장과 면담하러 가는 도중 공무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직접 찾아가 뜻을 전달해 겨우 만들어진 특별법이었다.

"참사 6개월 지나고 나서부터 몸 상태가 이상해졌어요. 생각 따로 행동 따로. 가끔씩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느껴져요. 잠도 안 오고. 목욕탕에 가도 찬물은 괜찮은데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온몸이 베이는 것처럼 아프고. 계속 약만 먹으니까 위장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8일 입원했는데, 세월호와 관련 없는 증상이라고 해서 입원비 170만 원을 자비로 충당했어요.

작년 12월까지 긴급생계비로 4인 가족 기준 108만 원을 받은 것 외에 정부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어요. 그걸로 네 가족이 살기도 어려운데, 저는 병원, 안산 트라우마 센터, 서울 광화문, 진도 팽목항, 광주 법원을 수시로 오갔으니 턱없이 부족하죠.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끊겼어요. 지금은 아내 혼자 버는 거죠. 시민들이 성금 보내 준 걸로 보태고. 가족들과 교회 사람들, 동창들이 조금씩 도와주고 있어요."

김동수 씨의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다. 결혼하기 전부터 간경화가 있어 계속 약을 먹었다. 20년 넘게 약을 먹으니 신장까지 안 좋아졌다. 작년에는 종양을 떼어 내는 큰 수술도 받았다. 현재 아동 센터와 논술 학원에서 교사를 하고 있지만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다.

당장 생계를 유지할 돈도 문제지만, 또 한 가지 큰 고통은 참사 이후 남은 트라우마였다. 그는 인터뷰 중에도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다며 자주 손을 주물렀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세월호 안에 있던 단원고 아이들이 생각나고, 창문만 보면 해경 보트를 타고 빠져나올 때 배 안에서 창문을 두들기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잠을 자도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았다. 낮에는 좀 괜찮은데 밤이 오는 게 두렵다고 했다.

"다른 화물차 기사들 중에는 화물차를 한 대 더 마련하고도 일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일하려면 다시 배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배에서 잠을 못 자겠다는 거예요.

저도 몸이 이상해서 웬만하면 운전도 안 하려고 해요. 이건 완전히 산송장이에요. 그냥 껍데기만 남아서 병원 치료나 받고…. 차라리 죽어 돌아왔으면 어땠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안 좋은 생각을 해요."

김동수 씨는 멋대로 움직이는 자기 몸이 싫어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게 싫어서,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는 심정에 자기 손을 그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자해는,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 한 남자가 낼 수 있는 유일한 비명이 아니었을까.

▲ 오준규 목사와 강영희 집사, 조미선 집사, 하명동 씨가 3월 23일 김동수 씨의 입원실을 찾았다. 오 목사가 김 씨의 손을 잡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오준규)

예수님이 가신 길은 베푸는 삶, 욕심내는 교회 보면 못 참아

김동수 씨는 심지가 굳은 신앙인이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삶과 다른 모습이 보이면, 아무리 목사에게라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수십 년 다닌 교회에서, 목사가 양로원에 욕심을 내자 교인들의 만류에도 이를 지적했다. 한바탕 갈등을 겪은 후 그는 쫓겨나듯이 교회를 나와야 했다. 이후 아내가 다녔던 교회를 7년간 다녔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그 교회도 떠났다. 몇 해 전부터 여러 교회를 전전하다가, 최근 교인 40여 명의 작은 교회에 정착했다.

따로 성경 공부를 한 것도 어려운 신학 서적을 읽은 것도 아니었지만, 김동수 씨는 헌금과 주일 성수를 심하게 강조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 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있던 교회들도 그랬어요. 처음에 작을 때는 괜찮았는데 커지면서 이상해지더라고요. 헌금도 너무 강압적으로 내라고 하고, 십일조 안 내면 시험에 빠진다고 하고. 가계가 적자인 사람은 십일조 못 낼 수도 있잖아요. 교회가 교인들 형편보다 그저 돈 돈 돈…. 목사는 자가용 타고 다니는데 교인들은 버스 타고 다니는 거 보면 참… 이제 제대로 된 건가 싶죠.

농번기에는 야외 예배처럼 주일에 가서 봉사도 할 수 있다고 봐요. 하나님이 한 주에 하루는 쉬라고 했지만,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게 예수님의 뜻이었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주일에 무조건 예배당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유연함이 없어요.

교회는 작아야 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작아야 교인마다 식구들 밥숟갈이 몇 개인지도 알죠."

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았는데,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김동수 씨는 그냥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성격"을 가진 것과 "예수님이 가신 길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좋았어요. 가진 거 없이 베풀고, 그냥 주고. 너무 성경만 읽는 교인들 보면 좀 답답해요. 그렇게 성경을 보면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몇 번 읽어서 뭐할까. 예수님의 삶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사는 게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누구나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잖아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교회가 헌금이나 교인 수 같은 데에 욕심내는 거 보면 가만히 있기 힘들죠."

김동수 씨는 그렇게 나름대로 베풀면서 살았다. 바닷가에 살았던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뛰어들었다. 그렇게 몇 명을 살리기도 했다. 학창 시절 마라톤을 했던 경험을 살려,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운동 코치를 해 주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그가 소방 호스를 들고 뛰어다닌 것이 이해가 됐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몇몇 목사가 하는 짓이 이해가 안 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가진 신앙을 바꾸는 것도 무책임한 것 같고. 사람 봐서 신앙 가진 것도 아니고, 예수님만 보고 신앙을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남이 핍박을 하든 욕을 하든 교회도 꿋꿋이 다닌 거고."

교회와 관련해 김동수 씨가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사는 안산에 있는 교회들의 태도였다.

"안산 지역에 그 많은 학생이 중고등부 활동도 했고 부모들도 교회 집사이고 할 텐데, 왜 안산 지역 교회들이 나서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자신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교인이고 중고등부 학생인데 그걸 보면서 조용히 있는 거 자체가 지금도 이해가 안 가. 내가 중고등부 교사였다면, 내가 성경 공부 가르쳤던 아이가 아무 죄 없이 죽었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목사는 물론이고, 그걸 보고도 조용히 있는 교사, 장로, 집사 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 김동수 씨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고 있다. 진상 규명은 긴 싸움이 될 것 같다며 김 씨는 생존자들의 기억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진상 규명에 필요한 건 생존자의 기억

기자가 만난 김동수 씨는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자기 몸을 상하게 했을까. 자기 자식과 가족이 왜 죽었는지 알려 달라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유가족, 정부의 방치 속에서 살아 돌아온 게 죄라고 느끼고 있는 생존자. 이들 중 누구라도 또 한 번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무너질 것이다.

매일 매시간 자신을 추스르며, 김동수 씨는 세월호 참사를 길게 보고 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쨌든 진상을 규명하려면 생존자들 기억이 필요하다. 그는 차근차근 이런 기억들을 모으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시작도 안 했는데 이제 그만하자는 여론에, 특히 교회에 김동수 씨는 말한다. 세월호에 자기 자식이 탔었다면 그런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무고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같이 생각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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