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mply gospel> / 신성관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172쪽 / 1만 2,000원

새벽 묵상 때 읽어 가던 민수기를 드디어 끝마쳤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뺀 60만 3,550명이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다가, 나팔 소리와 함께 6개 대열로 행진했죠. 1장부터 9장까지 그 내용이고, 10장부터 19장까진 광야 38년의 모습이 담겨 있었죠. 대부분 불평과 원망의 나날이었죠. 20장엔 40년째를 맞이한 삶을 보여 주는데, 미리암이 죽고, 아론도 죽게 되고, 모세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강화에 열을 내다가 그만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통보를 받고 말죠.

21장엔 요단 동편의 두 왕을 물리친 일, 22장부터 25장까지 거짓 선지자 발람이 등장한 마을 거쳐, 26장에서 출애굽1.5세대와 2세대를 합한 60만1,730명이 가나안 땅을 내다보게 되죠. 그리고 27장부터 35장까지 각종 제사와 절기를 점검케 하고, 미디안을 도륙시켜 죄의 고리를 끊게 하고, 르우벤과 갓 자손의 문제점을 수습해 40년 뒤안길을 회고하며 가나안 땅의 경계선을 그려 주고, 6개의 도피성과 함께 레위인을 위한 48개의 성읍을 마련케 하죠.

그런데 민수기의 끝부분인 36장은 왜 하필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상속 문제로 끝맺는 걸까요? 이미 27장에 그 내용이 언급돼 있는데 말이죠. 하나님은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딸이 없으면 아버지의 형제나 가까운 친족에게 상속토록 했죠. 그 딸들만큼은 그래서 같은 종족에게 시집가게 해서 상속을 이어받게 했죠. 왜 그걸 마지막에 상기시키고 있는 걸까요? 광야에서 훈련받던 1세대가 비록 실수와 허물로 죽을지라도 약속받은 땅을 확실히 보장해 준다는 차원을 강조1)하기 위함에서 말이죠.

"참 신앙은 미래에 들어갈 천국을 막연히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삶에 소홀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가 자신의 현재의 삶에 최대한 많이 그리고 온전히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54쪽)

신성관 목사의 <Simply Gospel>(새물결플러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기복주의, 번영신학, 무속적 성령 운동, 사제주의, 이원론 등의 내홍을 겪는 게 신학의 부재 속에서 세속화된 까닭인데, 그래서 구원과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일깨워 주려고 쓴 책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도 '이미'(눅11:20) 왔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 속에서 영생의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천국을 죽어서만 가는 하나님나라로 생각하지 않나요?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한 '영생'(요3:16)의 본딧말은 '영원한 생명'이고, 문자 그대로 창세 이전 시작해 요한계시록 그 이후까지의 끝도 없는 생명이죠.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영생에 접속된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죠. 가나안 땅의 입성도 실은 광야의 삶과 직결돼 있으니 말이죠.

▲ <칭의 논쟁> / 마이클 호튼 외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484쪽 / 2만 2,000원

그것은 '칭의'라는 관점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의(稱義)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갈2:16) 칭함받는 것이죠. 가톨릭과 개신교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것도 그 때문인데, 가톨릭은 트렌스 공의회(1945년)를 통해 칭의를 그렇게 확정했죠. 칭의는 실제적인 신분의 변화는 물론 인간 내면의 성화와 갱신이라고 말이죠.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칭의가 도덕적 상태가 아닌 '전가된 의'에 따른 '법정적인 선언'이고, 성화를 위해 변화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죠.

"칭의는 도덕적 성화가 칭의에 포함될 수 있는 한 유효하지만, 칭의와 도덕적 성화가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칭의와 변화(transformation)는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똑같은 실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234쪽)

<칭의 논쟁>에 나오는 마이클 버드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루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비롯해 가톨릭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지만 주로 3명의 개혁 신학 입장을 반영하고 있죠. 그중 마이클 호튼은 톰 라이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종교개혁기의 칭의론이 주석적으로 옳았음을 내비치고 있고, 제임스 던은 자신이 주창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오래된 관점'을 보충한다고 역설하고 있고, 마이클 버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죠.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았고, 그때 주신 율법을 준수할 책임을 부여받게 되었죠. 그 삶을 훈련하는 과정이 40년 광야교회(행 7:38)의 삶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여태껏 훈련받은 율례와 법도를 실제적으로 구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죠. 그만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신실하심을 드러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것이죠.

그런 뜻에서 칭의는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의 법정적인 선언이고, 성화는 그 뒤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할 삶이죠. 다만 예수님은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수반된다고 말씀(요 3:8)하셨고, 도덕법과 시민법 같은 율례와 법도의 성화(마 7:21, 요일 5:2, 마 5:28)를 더욱 강화하셨죠. 다만 그 성화도 실은 성령님의 은총(롬 8:26)을 통해서 더욱 탄력을 받는 것이죠.

오늘날의 신앙인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난 사람은 광야 교회의 훈련을 거쳐, 말씀대로 뿌리내리는 확고한 믿음의 삶 곧 성화의 삶을 이 땅에 구현해야 하죠. 때론 자기 의지만으론 연약하기에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령님의 이끄심을 통해 책임감 있게 그 삶을 감당할 수 있죠. 성령 충만은 무슨 신비한 능력이나 현상을 좇는 게 아니라 말씀을 좇아 사는 인격적인 삶(갈5:19-24)이기 때문이죠.

그때 비로소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보게 되고, 이 땅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사는 자부심을 갖게 되죠. 그야말로 천국의 시민권자답게 사는 것이죠. 그런 신앙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실수와 허물로 죽는다 해도 저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죠. 마치 슬로브핫의 딸들을 통해 광야에서 훈련받다 죽은 출애굽 1세대에게도 확실한 보증을 약속하신 것처럼 말이죠. 천국은 분명코 이 땅에서의 삶과 직결된다는 걸 기억하고 살았으면 합니다. 샬롬.

*주
1) 참조.
http://www.etsjets.org/files/JETS-PDFs/41/41-4/41-4-pp529-538-JET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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