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신학 진영에서 자란 사람들은 과학의 도전으로 인해 자신들이 지금까지 간직해 온 신앙이 위협받는다고 오해하여, 과학과 신학 간의 담론에 참여하기를 겁내고 점점 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반박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로날드 E. 오스본<Death Before the Fall: Biblical Literalism and the Problem of Animal Suffering>(IVP, 2014. 2. 6.)

<타락 이전의 죽음: 성경 문자주의와 동물의 고통 문제>는 이처럼 과학과 신학 간의 대화 가운데 신앙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1부는 성경 문자주의(이하 문자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근본주의와 창조과학도 이 비판의 대상이며 이 셋은 종종 혼용됩니다), 2부는 동물의 고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1부의 분량이 2부의 분량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선, 저자(로날드 E. 오스본)는 어릴 때, 야생을 지켜보면서, 약육강식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모의 신앙에 따라 어릴 때부터 약육강식의 세계는 단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비극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가 학교에서 진화론을 공부하면서부터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입니다. 누구나 다 이런 과정을 겪겠지요. 서론에서 그는 많은 사람이 이러한 혼란을 겪을 것이라 예상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책을 썼다고 말합니다.

우선 그는 창세기의 창조를 다룹니다. 분명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벽한 상태' 혹은 '최고의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그 표현은 생각보다 흔하게 사용됩니다(라헬의 미모를 지칭할 때 등).

그리고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된 용어는 굉장히 군사적인 용어(창 2:15의 동산을 '지키라'는 것은 돌본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위협에서 보호하라는 뜻이며, 창 2:20의 하와에게 사용된 '돕는 배필'은 군사적 동맹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등)이며 내재적인 위험 혹은 야생의 위험을 창세기가 암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창세기의 창조는 아무리 계산해도 하루 24시간으로 볼 수 없습니다. 아담이 셀 수 없이 많은 종의 동물의 이름을 짓고, 잠을 자고, 하와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을 문자적으로 취하더라도 단 하루 동안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창세기를 순수하게 읽어만 나가도 문자주의자들의 해석,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젊은 지구론과 그에 따른 젊은 생명 출현 이론(수십억 년에 걸쳐 종이 진화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창세기의 창조 기사 그 자체가 지지하지 않는데도, 도대체 왜 문자주의자들은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읽어 내려고 하고 젊은지구론과 젊은 생명 출현 이론을 취하게 된 것일까요?

저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중 하나가 "이상하게" 적용된 데카르트 철학입니다. 즉, 데카르트가 인식론의 출발점으로서 사고하는 자신 외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 것처럼, 문자주의자들은 지식의 출발점으로서 성경 외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데카르트에게서 자아가 부정될 수 없는 것처럼, 문자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이 부정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생겨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방법론을 만나 "이상하게" 적용된 것이죠.

여기서 출발한 문자주의는 성경을 무조건 역사적, 과학적 진술에서도 오류가 없는 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일관성'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온갖 이론을 만들어 낸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들의 해석이 창세기 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히브리 정경, 더 넓게는 신약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어떻게든' 일관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어떻게든 만들어 내려는 일관성은 결국에는 당대의 과학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퇴보시키며, 퇴보한 그들의 입장은 결국 그들의 신학적 설명까지도 퇴보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의 태양의 멈춘 기록을 두고, 도저히 자전이 멈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듯하니, 마치 하늘에 '거대한 거울'을 하나님이 만들어 냈다는 주장까지 하게 됩니다(이것이 바로 저자가 비판하는 창조 과학의 태도입니다).

과학적 데이터가 아무리 나열되어도, 그들은 데카르트적 정신으로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변하지 않는' 진리란 성경뿐이고 과학은 분명 변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문자주의자들은 양자역학이라든지 특수 상대성원리의 발견 등을 예로 들지만, 문제는 그들이 부인하는 것은 과학 이론이 아니라 데이터라는 데 있습니다).

한편, 이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자신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비문자주의자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문자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이죠. 그들은 문자주의를 버리면 신성모독이 될까 봐 걱정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신앙적 두려움이 그들을 이단적 신앙 곧 영지주의 신앙으로 내몰게 됩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그들의 신앙의 특징의 목록만 나열하자면, 이 세계에 대한 불안, 이 세계에 대한 의심,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혹은 향수), 종말에 대한 기대, 이원론, 영구한 대립, 엘리트주의(종교적 지식에 따른), 지식을 통한 구원, 초현실주의, 권위주의 및 절대주의(영적인 지도자로서), 고립주의, 분열(자기 집단 내에서의 불순분자를 걸러내는)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제대로 된 창세기 해석의 대표자들의 모범을 보여주는데, 모세 마이모니데스(랍비), 어거스틴(교부), 칼빈(종교개혁자), 칼 바르트(현대 신학자)를 내세웁니다. 그중 칼빈이 가장 극단적인 문자적인 해석을 하지만 그럼에도 '문자주의적으로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들 중 가장 보수적인 칼빈만 언급한다면, 분명 칼빈은 6일 창조를 말하지만, 창세기의 저자는 과학적 세부 사항을 생략했고, 과학자가 더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 신자들은 광신도들처럼 그것을 거부하면 안 되고, 창조 기사가 만약 '새로운 과학적 증거'와 충돌한다고 여겨질 때, 결코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하고 과학도 정죄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창조 기사의 목적은 과학적 사실을 진술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맛보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문자주의적 해석은 전통적인 창세기 해석도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2부의 내용입니다.

저자는 분명히 밝히길, 비록 자신이 결코 문자주의자가 아니며 과학적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의 내용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저자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칼 바르트처럼 자가(saga)로서 받아들입니다. 자가는 신화가 아니라 실제 내용을 '시적'으로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가는 신화(myth)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우선 과학적 데이터는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전의 동물의 존재를 전제하며, 또한 단순히 동물의 죽음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물의 멸종까지도 알려 줍니다. 이것을 만약 아담의 죄 내지는 원죄로 인한 결과로만 환원시킨다면, 몇 가지 해석학적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 딜레마는 창조의 정체(停滯, stasis)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모습이 아닙니다. 문자주의에 따르면, 죽음도 없고 탄생도 없는 정체된 창조만 존재합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탄생이란 존재의 첫 출현을 가리킵니다. 문자주의자에게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들은 닭이 먼저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문자주의자의 논증에 따르면, 나무의 나이테라든지 첫 인간 아담 등은 태어나 자라는 과정 없이 처음부터 성숙한 채로 출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으로부터 지나치게 벗어난, 게다가 성경도 말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또한 죽음이 없다면, 이 제한된 지구에 수많은 종이 멸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되어 오히려 생태계는 파괴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체의 딜레마입니다.

두 번째 딜레마는 기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문자주의에 따르면, 성경의 진술과 과학적 데이터가 상충되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시고, 과학적 데이터를 발견하고 축적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하심과 동시에 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상충시키게 하셨냐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느 한 편에 거짓을 알려 주신 것, 아니면 인간에게 일부러 혼란을 주신 것일까요? 문자주의자는 이처럼 하나님을 기만자로 만들게 됩니다. 문자주의자가 이 현상을 인간의 이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을 예측한 저자가 미리 데카르트와 영지주의 이야기를 1부에서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세 번째 딜레마는 저주의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본서의 핵심입니다. 만약 동물의 죽음이 원죄로 인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도덕적 판단력을 갖추지 못하고 직접적인 잘못도 없는 동물에게 인간보다 더욱 가혹한 저주를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자주의에 따르면, 그 원죄의 저주로 인해 도덕적 판단력이 없는 동물들은 (아무런 기준 없이) 어떤 동물들은 육식 내지는 잡식을 하는 포식자가 되고 어떤 동물들은 먹이가 되어 갑작스레 매일 죽임을 경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또한 창조되지 않는 기괴한 모습, 특히 포식자가 '되어 버린' 동물에게 본래 없었던 날카로운 이빨이 생기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을 품게 됩니다. 먹이의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보호색 등을 포함한 보호수단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보다 앞서 기록된 욥기에 나타난 동물 세계의 묘사를 보면 이러한 야생성, 동물의 강함의 특징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영광입니다.

저자는 이 마지막 저주의 딜레마를 발전시킵니다. 원죄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로 손꼽히는 로마서 5장 12절은,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동물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이것은 동물의 고통(suffering)은 동물에게 감각(sentience)은 있을지언정 인간에게 있는 의식(consciousness)은 없다는 기본적인 차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저자는 C. S. 루이스에게서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따라서 동물이 생존을 위한 투쟁, 즉 고통을 지각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공격을 하고 더 나아가 다른 동물을 희생시키는 사냥 등에 도덕적인 판단이나 비극적 상황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동물을 괴롭히거나 학대하는 것은 본래 창조의 목적(아담에게 내려진 명령)에 맞지 않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이사야를 꺼내어 들며 모든 동물의 평화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종말론적 예언'이며(따라서 실제로 문자적으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창조의 원래 형태가 이사야의 묘사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창조 본연의 모습은 욥기에 나타납니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담으로 읽어 낼 것이 아니라 아담을 그리스도로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아담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이 중요하지 아담이 그리스도를 오게 한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여기서 성육신 이론도 잠깐 다룹니다. 실제로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일 뿐이었으므로 진정한 첫 번째 아담도 그리스도라는 논증,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앙양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것이라는 논증 등은 둔스 스코투스 이후의 상승 기독론을 따르는 것인데, 그 정도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죄와 고통과 죽음의 신학적 의미를 말해 주는 것이지 그 기원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연과 동물에게 자유를 주시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위 '동물의 고통'에 참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케노시스(Kenosis) 이론에 비유하지만 오히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침춤(Tzimtzum. 자연이 원인이 되도록 하나님이 원인의 자리에서 물러나신다는 이론으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라고도 합니다.)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고통과 연결했다는 점에서 침춤 이론을 케노시스 이론과 융합시켰다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동물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안식의 문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도 연결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구약은 동물을 배려하라는 안식의 명령을 내렸으며, 예수님도 안식일에 동물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지하셨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아무리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 주일로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회복을 인식하게 하는 유대교 전통의 안식일 개념이 많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사라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죽음은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죽음과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동물이 학대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극복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를 문자적으로만 읽어 내기 위해 동물에 대한 고통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즉 원죄로 인해 갑작스레 먹이사슬이 생겨나고 특정 동물이 육식 내지는 잡식성으로 변하고 외형적으로도 독이나 이빨이나 발톱을 가진 존재로 격변했다는 등의 발상은 과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정당하지 못합니다.

두 줄 요약

1. 성경 문자주의(근본주의/창조과학)는 과학적, 신학적 오류가 심각하다.
2. 동물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규선 / 목사. 대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였고 현재는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해외 번역 도서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공역으로는 <곤잘레스 신학 용어 사전>(그리심, 2014)이 있다.

도서 정보

제목: <Death Before the Fall: Biblical Literalism and the Problem of Animal Suffering>
저자: Ronald E. Osborn(Ph.D.,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현재 웨슬리칼리지의 'Peace and Justice Studies Program'에서 포스트닥터로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주요 저서로는 <Anarchy and Apocalypse: Essays on Faith, Violence, and Theodicy>가 있다.
출판사: IVP Academic
ISBN-13: 978-0830840465
가격: $25.00
※국내 미번역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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