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 차정식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400쪽 / 1만 4,000원

'관행'과 '인습'은 그것이 생겨난 합리성과 효율성이 다한 후에도 강고히 남아 삶의 생동(生動)을 막아선다. 성서 해석과 관련하여 관행과 인습이 하는 기능도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름의 설득력과 감동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어 자기 증식을 하던 해석이 그 시효를 다할 수 있다. 해석은 생물(生物)이라 '유통기한'이, 아니 수명(壽命)이 있다. 어떤 '해석 생물'은 창조자의 고의(故意)로, 때로는 창조자의 시대적 상황이나 한계 혹은 실수로 인해 괴물로 태어난다. 어떤 본문은 한 번도 자신에게 진지하게 입 맞추는 왕자를 만나지 못해 아직까지 성 안에서 잠들어 있다. 이때 우리는 관행과 인습에 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해석 괴물에는 맞서 싸우는 검을 든 투사가 되어야 하고, 주목받지 못한 공주는 입 맞추어 깨워야 하며, 오랫동안 변하지 않아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뻔한 해석 조리법은 갱신하여 재료의 다채로운 맛을 살려야 한다.

성서학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치고 관행과 인습에 맞서 세월에 묵은 기름때가 단단히 달라붙은 성서 본문을 온 힘으로 스케일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미 적지 않은 우리나라 성서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해안가 모래에 쓰는 글씨처럼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 신약학)가 무심한 바다의 물결과 또 한 번 다툼이라도 하듯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라는 큰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의 글씨 중 어느 것이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까. 그가 글자로 쌓아올린 모래성을, 물결은 어디까지 허물어 버리려 할까. 제목은 낯설지 않은 작명(作名)이다. 그것은 이른바 전복(顚覆)적 읽기를 뜻한다. 기존의 인습과 그것이 굳혀온 껍질의 두툼함을 뚫고 성서 본문의 속살을 만나려는 노력을 뜻한다.

 

이 책은 '1부 복음서 뒤집어 읽기', '2부 서신서 거꾸로 보기', '3부 상상하며 바로 읽기' 등의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복음서 뒤집어 읽기'는 이 책의 출판을 추동(推動)했던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로부터 시작한다. 이 글은 신약학자 예레미아스의 주장, 곧 '아바'가 어린이가 사용하는 '아빠'와 같다는, 이제는 충분하지 않은 논증으로 결론 난 것을 고집스레 혹은 짐짓 모른 채 수용하여 '은혜'받는 데에 대한 도전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전문적인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굳이 새삼스럽게 '도전'이라 할 만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차 교수의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바'는 '아빠'다"라는 '복창의 대열'이 가지고 있는 '과잉 적용' 현상을 해부하고 과잉 적용 배후에 숨은 신앙의 곰팡이를 햇빛에 드러내면서,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해 본 능숙한 주부처럼 곰팡이를 털어 내고는 곰팡이는 건강을 해친다고 적절히 조언하는 솜씨를 보여 준다. 이 글은 이 책을 대표하는 글이고, 저자는 이 글을 맨 앞에 배치하여 독자들이 쉽게 책에 대한 '감(感)을 잡을 수 있게' 돕는다. 이후 글들은 복음서, 서신서, 그리고 상상하며 바로 읽기 등으로 각 부를 구성하는데, 나는 이것을 내 임의로 주제별로 크게 다섯 가지로 묶어 보려 한다. 당연히 각각의 항목에 속한 글들이라고 해도 서로 주제가 부분적으로 겹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인 경향성을 두고 갈무리하였다.

1. 일상에 터한 합리적 영성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삶의 균형을 파괴하려는 해석을 교정하는 글들이 있다. 신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선동성이나 무모함을 거절하는 차 교수의 해석은 '지속 가능한' 일상을 해석의 밑바탕에 놓고 본문을 저울질하는 특징이 있다.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는 가난과 부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 지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가난한 자의 복됨이란 결국 역설적인 삶의 지향"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 예'와 '아니오, 아니오'의 역설"은 종교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정치와 연예 영역이 그러한 것처럼 감정적 고양과 흥분 상태를 자아내는 언어, 그래서 항시 극단적이며 자극적인 언어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경기장'이 되고 만 성서 해석을 교정하려는 시도다.

"공정한 희생의 샛길" 역시 헌신과 희생의 병리적 구석을 예리하게 짚어 내면서 일상을 고려한 "제 몫의 십자가"를 지는 지혜를 역설한다. "계산하는 믿음, 포기하는 믿음"은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어리석음이 깊어지기 전에 포기하는 믿음'을 가르친다. 물론 차 교수의 성서 해석은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일상에 매여 있지 않다. "'거듭남'의 본래적 의미"는 영의 세계가 주는 자유와 초월의 본뜻을 알린다. 또 일상에서 겪는 상처의 문제를 신학화한 "상처는 어떻게 권위로 승화되는가?"는 '스티그마'(상처)가 삶의 자연스런 권위로 승화되는 과정을 바울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털 외투와 가죽책의 사연"은 '자기에 대한 배려'를 교훈하며 종말론적 의식에 자신을 너무 빨리 소진시키는 신앙 형태를 경계한다.

2. 꼼꼼한 내면 성찰과 욕망 점검

저자는 또 본문을 통한 자기 성찰의 윤리에 주목한다. "신중한 판단과 공정한 반면교사"는 '비판하지 말라'가 비판을 금지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판단의 상호주의와 자기교정 우선주의' 그리고 '눈의 균형 윤리학', 나아가 '최후 심판자 앞에 현명하게 판단하기'를 깨우치는 경구임을 알린다. 현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성서 해석에 대한 교정 작업도 있다. "침노당하는 천국의 실체"는 폭력 당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선의의 경쟁' 이데올로기 속에서 뒤바꾸어 놓은 오해를 지적한다. 역사와 사회가 아니라 개인과 교회만을 성서 풀이의 배경에 놓은 이러한 해석 경향을 나는 '우물 안 해석학'이라고 명명하려 한다.

'우물 안 해석학'에 대한 비판에 이어 "제 논에 물 대기 하는 '이 세대'의 변덕"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판하던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을 가지고 와 강단에서 교인들을 닦달하는 사례를 교정한다. "나무가 된 겨자나물의 비밀"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면 겨자씨 비유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교훈에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인간의 지혜"는 고린도전서 1장 18~31절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공감과 자기 연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건강한 해석은 '자기 연민의 동일체 의식을 넘어서' 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변덕의 창의성, 위선의 진보성"은, 마냥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히던 변덕과 위선이 가진 역설적 힘을 통찰력 있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깊은 속내와 인간의 얕은 심산"은 제목 그대로 인간의 진실한 자포자기와 하느님의 중상모략에 대한 묵상에 관한 충고다. "천진한 어린이와 몽매한 우민의 역설"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 미완성 형태의 인간이라는 통찰 위에 어린이에게 접근하자는 제안을 한다. "자족과 형통 사이"도 수련 끝에 욕망의 굴레를 벗어난 바울의 자기 고백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글이다.

3. 공동체 지향성

"초대교회의 빛과 그림자"는 초대교회의 명암을 균형 있게 묘사하며 초대교회가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경계하고, 21세기의 민주적 정신과 합리적 가치관으로 계몽된 교회 공동체의 구조를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한 까닭"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다른 공동체 구성원을 대하고 판단할 때 하나님의 몫을 늘 남겨 두어야 함을 역설한다. "인사말에 담긴 속뜻"은 바울 사도라는 한 '위대한'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유익하다. 저자는 바울의 '동역자 의식'을 강조하면서 바울 서신의 인사말에 깃든 '예의의 신학'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연보의 유래, 헌금의 미래"는 우리 교회에서 언제나 뜨거운 이슈인 연보의 기원과 목적을 더듬어 살펴서 그것이 "교회와 교회 사이, 궁핍한 성도와 다소 넉넉한 성도 사이의 빈부 격차를 조정하고 일용할 양식이란 소박한 기준으로 서로 간에 '균등성'을 증진하기 위한 베풂과 나눔의 차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토 박아 둔다. 물론 달라진 시대 상황에 연보의 '기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어도 '연보가 무엇이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이 글은 명확히 밝힌다.

"바울의 저주, 그 빛과 그림자"는 역사 비평의 순서를 따라 바울의 저주 본문의 상황을 재구성한 후, 그 본문이 어떤 의미와 의도에서 작성되었는지를 밝힌다. 이후 공동체 안에서 '저주의 독기를 배제하는 명랑한 저주'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무엇이 덕스러운 것인가?"는 교회 내에서 흔히 쓰이는 '덕스럽다', '덕스럽지 못하다'의 오남용을 두고 '덕'의 동양 고전 및 그레코-로만적 쓰임과 성서적 용례를 찾아 신약성서의 '덕'에 관한 본문이 건실한 공동체를 세우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더디오 생각" 역시 신약성서에서 단 한 차례 언급되는 바울의 대필자 더디오를 통해 쉬이 지워질 수 없는 숨은 인물들의 침묵을 들을 수 있는 독자들의 청력을 요청한다.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는 겸손한 배려와 순종의 자세를 요청한다. 이어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도 이 맥락을 함께 한다.

4. '친절한' 성서 비평

난해 본문의 어려움을 역사 비평의 맥락에서 해설한 글들이 있다. "좁은 선교, 넓은 선교"는 마태복음 10장과 28장이 각각 다르게 가르치는 선교 범위가 어떻게 선교의 선순환 체계를 구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지 해설한다.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논쟁"은 예수가 곤경에서 벗어나는 수사학적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생기는 해석들의 번잡함을 벗어나는 길을 알려 준다. "어떤 믿음이 성서적 믿음인가"는 신약성서에 나온 '믿음'의 종류를 분류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믿음이라는 이름 안에 기생하는 욕망의 미시 세계를 탐색한다.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신 까닭"은 신약학자들에게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차 교수의 이해를 담는다. 그는 일단 이 본문이 '정치적 정적주의'라고 규정한 후 본문의 명확한 메시지보다 큰 하나님의 뜻과 행간의 침묵을 읽어 내라고 주문한다. "미혼의 불안, 비혼의 자유"는 "성서의 신학적 규범조차 철학적 회의의 자장 속에서 성찰하고 정신분석학의 검증을 받는 것이 건강"하다는 저자의 판단에 따라 고린도전서 7장 36~38절에 나온 미혼/비혼의 본문을 다루며 바울 시대와 달라진 오늘날 이 본문의 현실적 적용을 고민한다.

"해산함으로 얻는 구원은 초기 교회에 존재하던 '과부성직단'을 정체를 밝히고, 디모데전서 2장 15절이 그들을 향한 '해산구원론'임을 해명한다. "그 '영'과 '옥'은 어떤 영과 옥인가"는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을 두고 펼쳐진 다양한 논의를 요령 있게 요약하고, 저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5. 예수의 신학과 그것의 삶의 배경

예수'에 대한' 신학에서 벗어나 예수'의' 신학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글들도 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내력"은 '모험'적인 황금률을 ("'좋아요'와 황금률 생각") 오늘날 거시 및 미시적 관계에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 역시 큰 맥락에서 이와 연결된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인물’ 예수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화평이 아닌 검을 던진 까닭”에서 예수의 '혈통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교훈적으로 이끌어 낸다. 이 글은 하나님의 가족과 반(反)연고주의를 연결시킨 후 "'하나님의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명확한 가치 기준을 세워" 제도권 교회도 개별 가족도 현실 가족을 향해서는 서늘한 가족 사랑과 또 다른 가족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각성하도록 촉구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 시대 좁은 문 및 길에 대비되는 넓고 큰 문과 길을 설명하면서 예수 권면의 뜻을 시각적으로 그려 준다.

독자로서 이 책에 바라는 점이 없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연재물을 엮은 것으로 일관된 계획에 따라 작성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저 복음서, 서신서 등으로 나누기보다는 오독(誤讀)의 유형이나 저자의 해석학적 지향, 그것도 아니면 주제 등에 따라 구분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도울 필요가 있다. 글의 순서에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전체 계획 없이 발표된 글의 모음으로 책을 펴내더라도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책의 힘을 강화한다. 또 그저 본문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는 수준에 머물기보다는 본격적으로 오늘날 성서 해석 혹은 오해의 현상 배후에 놓인 근본 원인을 진단하여, 성서의 풍성하고 건강한 독해에 도움을 주었으면 더 좋았으리라고도 생각한다.

 

III

차정식 교수는 이제까지 그의 수많은 저작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분(扮)했다. 이번에 그는 성서학이라는 전문적 영역과 교양인 사이에 헤르메스를 자청했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실질 독해 능력이 OECD 하위권이라 해도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 글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내 해석과 다른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시라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강단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이 책을 사서 읽으면서, 자신의 성서 해석의 앞뒤를 점검해 보시라 권한다. '평신도 지도자들'이나 교회의 담당 부서에서 섬기는 분들은 절기나 행사에 이 책을 구입해서 선물 혹은 상품으로 주시기를 바란다. 물론 먼저 목회자에게 이 책을 같이 읽으면서 공부하고 싶다고도 말씀하시라.

종교개혁 이후 모든 식자(識者)에게 성서를 돌려주려는 노력이 고난 중에 시작되었음을 개신교인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은 외국의 유명 학자 이름을 들먹이는 지적 사치를 누리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토론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서를 거꾸로 읽고, 뒤집어 읽고, 상상하며 읽으시라. 더 이상 고루한 인습의 벽 속에 갇혀 숨을 데가 없다. 나는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의 매서인(賣書人)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부끄럽지 않다.

김학철 /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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