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시민들이 구성한 '리멤버0416'. 이들의 주 활동은 1인 시위다. 매일 광화문과 국회,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 당사, KBS·MBC 사옥, 대검찰청, 대법원, 세종시 정부청사, 해경 등에서 릴레이로 시위를 벌인다. 오지숙 씨의 1인 시위로 촉발된 이 운동은 점점 외연이 넓어져,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관련 기사: "나 같은 기독교인도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낮은마음교회 강영희 집사(53)는 오지숙 씨와 함께 리멤버0416을 만든 사람이다. 오 씨가 1인 시위할 때 점심이라도 먹을 수 있게 교대 팀을 짰는데, 그것을 계기로 여기까지 왔다.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동시에, 세월호와 관련한 여러 현장을 찾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유가족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제 그는 세월호 유가족 여러 어머니들에게 '언니'로 불린다. 단원고 학생들의 어머니들보다 나이가 많은 강 집사는 "언니는 이름도 '영희'이니 우리들의 국민 언니예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강영희 집사는 21년간 서울 지역 중학교 수학 교사로 살았다. 지금은 퇴직 교사로 아이들을 홈스쿨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세월호 참사 이후로 그의 삶이 바뀌었다. 강 집사는 집이 춘천인데, 광화문광장에서 시위를 하다가 막차를 놓쳐 농성 천막에서 쪽잠을 자거나 24시간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렇게 세월호 참사의 현장으로 들어오게 됐을까. 지난 4월 6일 좋은교사운동 집담회와, 12일 낮은마음교회 간담회에서 나온 강 집사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다.

▲ 강영희 집사는 리멤버0416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유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됐다. 사진은 강영희 집사가 4월 12일 낮은마음교회 간담회에서 이야기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구권효

세월호라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강영희 집사는 어디 가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작년 5월, 참사 한 달 후 팽목항에 갔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팽목항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지금까지 그를 추동하는 힘이 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에서 '교사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진도에 갈 때 동참했어요. 참사 한 달 후였는데, 저는 팽목항 검안소 곁 유가족 대기실에서 봉사했어요. 당시에는 아이들이 물에서 올라오면 DNA 검사를 했어요. 부모님들은 검안소 밖에서 기다려야 했죠. 인상착의로 누구인지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확한 검사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그때 네 분의 어머니가 바다 쪽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OO야! 빨리 나와라!' 그런데 신기하게 2시간 만에 그 네 분이 불렀던 아이 중 두 명이 올라와 검안소로 들어갔어요. 한 달이 지났을 때인데도, 한 어머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우리 아이 맞겠죠?' 하는 거예요. 그분을 안아드리면서 '맞아요'라고 확신을 드렸어요. 그러면서 유가족들과의 관계가 시작됐어요."

그는 팽목항에서 불교 스님들과 가톨릭 신부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많이 봤다고 했다. 개신교인들도 분명히 있을 터였지만, 티가 나지 않았다.

"유가족들 천막 안에서 아버지들은 잘 울지 않아요. 어머니들이 너무 우니까. 그날 아버지들은 애써 농담을 하기도 하셨어요. 그러고 있는데, 신부님이 한 아버지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남자들끼리 나갈까요?' 하는 거예요. 신부님과 아버지 두 분이 천막을 나가서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남자들의 흐느낌이 들리더라고요. 신부님이 아버님들의 마음을 헤아린 거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이 저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신을 수습하는 가톨릭 장례지도사들도 정말 헌신적이었어요. 어떻게 해서 이런 기술을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서 기술을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성당에서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수습하던 경험을 가지고 팽목항에 와서 봉사한 거죠.

스님들은 유가족들이 바지선 타고 사고 현장을 왔다 갔다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한 여자 스님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그 스님은 물에서 올라온 아이들 명단을 가지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가족들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면서 유가족이 된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하고요. 시신을 수습한 가족들은 다음 날 이른 새벽, 아이를 실은 119 구급차가 떠날 때 함께 떠났어요. 그때 아무도 없었는데 그 스님이 와서 유가족에게 그러는 거예요. '어떤 종교를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기도해 줘도 되겠느냐'고요. 그때 울려 퍼진 목탁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팽목항에서 유가족들은 개신교든 불교든 가톨릭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아이를 위해, 유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종교인들을 거절하는 부모들은 없었다. 강 집사는 "고통 앞에서 종교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고 얘기했다.

강영희 집사는 그날 이후로 십자가 목걸이를 꼭 걸고 다닌다고 했다. 이 일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는 팽목항에서 광주대교구 최민석 신부와 가톨릭 신학자 김근수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세월호는 온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이며 "이를 통과하지 않으면 신앙의 의미는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 강영희 집사는 작년 5월 팽목항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진은 지난 4월 6일 좋은교사운동 집담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강영희 집사가 발언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 교회를 떠난 이유

강영희 집사는 세월호를 피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뤄 가는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온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십자가이지만, 강 집사가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다.

"교회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제가 속한 교회는 어땠냐면…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 은사들이 있는 그런 교회였어요. 정치인들 예배 시간에 인사시킨다든가 그런 일이 많았어요. 김진태 의원도 제가 교회에 못 오게 한 적이 있어요. 예배는 하나님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심정으로 당회에 직접 건의하고 했어요. 장로님들이 어느 정도 의견 반영은 하셨는데 근본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았어요. 떠나기로 결심한 적도 있지만, 흉한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면서 남아서 기도의 몫을 감당했어요. 11시 예배면 9시에 가서 2시간 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이 교회와 함께할 수 없는 한계가 오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남편은 비난했는데, 남편이 먼저 잘 통하는 교회 만나서 이 일을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작년 말까지 교회에서 맡은 일을 다 감당한 후에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섰고 광화문광장에서 오준규 목사님을 만나 낮은마음교회로 오게 됐어요. 저 나름대로는 그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께서 세월호에 마음을 쏟는 오 목사님에게 저 같은 교인을 붙여 주시고, 또 교회 때문에 갈등하는 저를 보시고 낮은마음교회를 만나게 하신 거 아닌가."

강영희 집사는 올해 1월부터 낮은마음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세월호 현장을 다니면서 힘들고 헷갈릴 때마다 교회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낮은마음교회는 4월 12일을 '세월호 기억 주일'로 정하고, 피켓 시위와 세월호 인양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한 작은 교회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 날씨가 덥든 춥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리멤버0416 회원들은 1인 시위를 한다. 안산 합동 분향소(사진 위)와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시위하는 강영희 집사. (사진 제공 리멤버0416)

피켓 시위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고백

피켓 시위를 하면서 어려움을 당한 적도 있었다. 합법적인 시위였음에도 광화문광장 건너편에서 경찰 4~5명이 사방을 둘러싸는 위압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그러나 강영희 집사는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 강도 높은 행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강 집사는 MBC가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지 않고 보도를 해도 왜곡된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느끼고, MBC 사옥으로 달려가 피켓을 들었다.

"리멤버0416이 정말 한겨울에도 피켓을 놓지 않았거든요. 핫팩을 붙이고, 목도리도 맞추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다리에 담요를 둘러 가면서…. 그렇게 추위를 견디면서 한겨울을 났어요. 아마 추워지면 그만하겠지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가 왜 이걸 들고 있는 걸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피켓을 드는 행동은 어떻게 보면 힘이 없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어요. 바람 불면 날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걸 들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아요.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막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리멤버0416 회원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아요.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현재 우리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고통받는 자들, 고통이 있는 곳에 머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어디냐. 세월호 참사의 현장이고,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며, 거기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머문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우리의 마음을 포개는 마음으로 피켓을 든다.'"

리멤버0416은 초창기,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그러다 작년 7월, 유가족들이 노숙 단식 농성을 시작하면서 리멤버0416이 시위하던 그 자리에 유가족 천막이 들어왔다. 그 천막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며칠 전에는 그곳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광화문 분향소가 생겼다. 리멤버0416에 소속한 크리스천들은 마치 유가족들의 자리를 예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신부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성령께서 하셨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 리멤버0416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1인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100차 1인 시위를 기념하며 MBC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 제공 리멤버0416)

나는 반찬 싸 주는 언니

이렇게만 보면 강영희 집사는 마치 투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의 이미지는 사실 '반찬 싸 주는 언니'가 더 어울린다. 강 집사는 피켓을 들면서도 '유가족들의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유가족들을 만나는 자리에 종종 반찬을 들고 온다. 춘천에서 서울까지 말이다.

"유가족들이 밥을 잘 못 해 드세요. 투쟁하느라 바깥에 많이 나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집에서 밥을 하다가도 문득 '내 자식은 죽었는데 나는 살자고 밥을 하고 있네' 이러면서 무너지는 거예요. 집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그래서 반찬이라도 싸 드리자 싶어서, 유가족들 한두 분씩 만날 때마다 들고 오곤 해요. 맘 같아서는 모든 부모님들께 다 드리고 싶지만, 지금까지 간담회나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반찬 나눔을 했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이렇게 할 수 있는 만큼 해 나갈 생각이에요."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계속 이럴 수 있을까.' 강영희 집사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한다. 교편은 놓은 지 꽤 되었고, 홈스쿨링으로 키우던 세 아이가 이미 대학생이 되었거나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어, 그도 이제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한다. 직장을 안 다니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시점이에요. 실제로 작년에 오라는 직장도 있었는데 엉뚱하게 이 일을 직장 일처럼 하고 있어요. 처음에 '언제까지 이렇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하나님이 1년은 직장 다니듯이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1년이 벌써 다가왔어요. 얼마 전부터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약속한 1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요. 이렇게 또 1년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유가족들 곁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대로 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지를 거슬러야 하는 일이다. 강영희 집사는 그래도 유가족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직도 싸워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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