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많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인지 작년보다 못하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작년 여름, 세월호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운동에도 미지근하더니, 이번에는 유가족들이 무엇을 위해 거리로 다시 나앉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도 많고 돈도 많은 대형 교회들은 세월호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해 온 한 목사는 "목사들이 눈치를 보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될 일도 지레 겁먹는다"고 말했다.

한국교회 전체로 볼 때는 미지근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지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교회는 많이 있다. 4월 12일, 교인 70명의 한 작은 교회가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작은 행동을 벌였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낮은마음교회(오준규 목사) 이야기다. 이 교회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는 모습을 소개한다.

▲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낮은마음교회는 상가 2층에 있는 작은 교회다. 교인들 중 유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교인들 모두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4월 12일은 '세월호 기억 주일'

낮은마음교회는 상가 2층에 있는 작은 교회다. 교회 앞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교회 간판과 함께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교회는 창문 밖에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걸어 놨다.

낮은마음교회는 4월 12일을 '세월호 기억 주일'로 정했다. 이날 예배의 초점은 세월호 참사에 맞췄다. 오준규 목사는 '세월호, 십자가, 그리고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참된 사랑은 아픔에서 나오고 그 아픔은 사랑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며 많이 우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이 한국 땅을 바라보며 아파하시는 곳은 안산, 진도 팽목항, 광화문광장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날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월호의 아픔을 모른다는 것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인 양 아무런 아픔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죄입니다.

아픔을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아픔을 잊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와 비슷한 참사가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불의한 세력을 도와주는 일이 됩니다.

기억하기에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벌써 잊기에는 억울합니다. 너무 이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그 아픔에 더 들어가야 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거기에 새로운 희망이 보입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갈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남겨 줄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을 직면하고 건들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 교인들이 세월호와 관련한 영상을 보고 있다. 이날 낮은마음교회는 자체 제작 영상을 포함해 총 3개의 영상을 상영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교회는 세월호와 관련한 영상을 상영했다. 영상 속에서 그날 뒤집힌 배를 보며 교인들은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교인들은 유가족과 실종자, 생존자 들을 위해, 그리고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기도했다.

예배 후에는 세월호 간담회가 열렸다. 낮은마음교회에는 시민단체 '리멤버0416' 창립 멤버인 강영희 집사가 다닌다. 강 집사는 피켓 시위를 하면서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있다. 유가족들에게는 '국민 언니'로 통한다.

간담회에서 강 집사는 지난 1년간 활동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도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종횡무진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지 뚜렷한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헷갈려 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세월호와 관련한 현장으로 보내고 우는 자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어요. 이건 힘없는 행동이고 이걸 하면서 뭔가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리멤버0416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은데요.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현재 우리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고통받는 자들, 고통이 있는 곳에 머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어디냐. 세월호 참사의 현장이고,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며, 거기서 살아 돌아온 분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머문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우리의 마음을 포개는 마음으로 피켓을 든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시점이에요. 실제로 오라는 직장도 있었는데 이 일을 해야 해서 거절했고 엉뚱하게 이 일을 직장 일처럼 하고 있어요. 처음에 '언제까지 이렇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하나님이 1년은 직장 다니듯이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1년이 벌써 다가왔어요. 얼마 전부터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약속한 1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요. 이렇게 또 1년은 해야 할 것 같아요."

▲ 예배 후 간담회에서는 오준규 목사(왼쪽)와 강영희 집사(가운데), 김동수 씨(오른쪽)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이날 교회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쓰러져 가는 세월호에서 소방 호스를 몸에 감고 20명을 구조한, 생존자 김동수 씨였다. 김 씨는 화물 트럭 운전사로 작년 4월 16일 세월호를 타고 제주로 향하던 중 사고를 만났다. 이미 90도 이상 기울어진 배 안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몸부림쳤다. 그가 현장에서 본 국가는 무능했다. 그는 살아 나왔지만, 이후 생존자를 죄인 취급하는 분위기와, 정부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해 얻은 생활고로 힘들어하다가 지난 3월 자해를 하기도 했다.

현장을 다니며 김동수 씨와 알게 된 강영희 집사가 그 소식을 듣고, 3월 말 오준규 목사와 함께 김 씨가 입원한 제주의 한 병원을 찾아갔다. 이들은 그곳에서 김 씨와 그의 아내, 두 딸과 함께 기도했다. 김 씨는 물론 가족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김 씨는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이번에 낮은마음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김 씨도 간담회 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교인들은 강영희 집사와 김동수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년 4월 16일과 이후 벌어졌던 유가족들의 투쟁을 되새겼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참사는 현재 진행 중임을 느꼈다. 교인들은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2시간 동안 피켓 시위, 선체 인양 촉구 서명운동

▲ 간담회가 끝난 후 교인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장자호수공원으로 갔다. 2시간 동안 세월호 인양 촉구 서명운동과 피켓 시위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간담회가 끝난 후 교인들은 행동에 나섰다. 교회 근처에 있는 장자호수공원에서 피켓 시위와 세월호 인양 촉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강영희 집사가 피켓을 가져오고, 교인들은 노란 풍선과 세월호 배지 등을 준비했다. 오준규 목사와 교인 20여 명은 공원 한쪽에 책상을 펴고 외쳤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잠깐만 시간을 내 주세요", "다음 세대를 위한 일입니다. 서명 부탁드립니다".

한가한 오후 시간, 공원에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많았다. 부모들은 흔쾌히 서명에 동참했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서명대로 왔다. 지나가는 중고등학생들과 젊은이들도 적극 참여했다. 사람이 많을 때는 줄을 서서 서명할 정도였다. 낮은마음교회 아이들도 자기 몫을 톡톡히 했다. 공원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노란 풍선을 건넸다. 풍선에는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피켓을 들고 외치고, 서명을 받고, 배지를 나눠 주고, 풍선을 불고… 2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총 350명의 서명을 받았다. 낮은마음교회는 오는 4월 16일까지 피켓 시위와 서명운동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오준규 목사는 "작지만 세월호를 위해 교회 예산도 따로 빼 두었다. 앞으로도 세월호 유가족들, 실종자 가족들, 생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할 것이다"고 말했다.

▲ 서명운동은 반응이 좋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서명을 하기도 했다. 낮은마음교회는 4월 16일까지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세월호 의인, 생존자 김동수 씨는 4월 12일 낮은마음교회 간담회에서 1년 전 상황과 생존자로서 겪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크리스천인 김 씨는 이날 예고도 없이 낮은마음교회를 찾은 것이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당시 김동수 씨는 배가 기울자 베란다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 헬기 소리와 비행기 소리가 들릴 뿐, 세월호 주변에는 배 한 척 없었다. 멀리 유조선이 하나 있기는 했는데 물살이 반대 방향이라 멀어져 갔다. 김 씨는 "나중에 해경이, 배에서 뛰어내렸으면 구조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어떻게 구조를 하나. 보트 하나도 띄운 게 없었는데. 황당하고 어이없었다"고 말했다.

무조건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를 구조했는지는 물론 몇 명을 구조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버린 방은 문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소방 호스를 자기 몸에 감고, 문으로 호스를 집어넣어 호스를 잡은 아이들을 끌어 올렸다. 아이들이 극도의 긴장으로 몸이 굳어 문 사이를 건너가지 못하자, 김 씨는 드러누워 자기를 밟고 가라고 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끌어 올리니 한 학생이 "아저씨, 여기로 빨리 와 보세요!"라고 해서 홀 쪽으로 갔다. 홀은 자판기가 다 떨어져 나가고 난리가 났다. 김동수 씨는 다시 소방 호스를 던져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

김 씨가 아이들을 끌어 올리니 해경이 다가와 데려갔다. 그러나 해경은 그 이후로 다시 오지 않았다. 나중에 해경에게 물으니, 너무 지쳐서 못 돌아왔다는 답이 왔다. 해경 보트를 탈 때도 그랬다. 해경이 배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건져 올려야 하는데, 해경은 보트에서 사람을 받기만 했다. 해경 보트에 올라타 세월호를 빠져나오면서 보니 학생들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김 씨는 해경에게 "저기 200~300명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해경은 "이제 특공대 출동할 거니까 걱정 말라. 다 구조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에도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배는 거의 다 뒤집혀 뱃머리만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지금도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만 마음에 안정을 찾고 했으면 몇 사람 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된 뒤 바로 기자들에게 배 안에 200~300명이 있다고 얘기했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침울해했다.

화물 트럭 운전사였던 김 씨는 참사 이후 삶이 180도로 변했다. 세월호 침몰로 트럭이 물에 잠겨 생업을 잃었다. 트라우마와 죄책감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목욕탕에서 찬 물에 들어가면 괜찮은데, 뜨거운 물에만 들어가면 온 몸이 베이듯 아팠다. 왼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세월호와 관계없는 증상이라며 입원비 170만 원을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이후 계속 약을 먹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을 구해 놓고도, 김 씨는 자신의 왼손이 쓸모없는 것이라 자책하며 흉기로 팔을 그었다.

김동수 씨가 세월호 참사 이후 공무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두 가지였다. "기다리세요"와 "안 됩니다"이다. 참사로 생업을 잃었는데 생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생긴 증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정부는 어떻게 보상을 하겠노라고 발표했지만 이행된 것은 없었다. 보건복지부나 LH공사, 해수부에 얘기해도 돌아오는 말은 "기다리세요"와 "안 됩니다"였다. 김 씨는 "기다리다가 수백 명이 죽는 걸 본 사람에게 또 기다리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말과 같다"고 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