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야 한다. 아니 말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를 불의한 사고나 원인 모를 질병으로 갑작스레 잃어버린 유가족들이 가운 입은 의사에게, 정장 입은 목사에게, 고상한 신학자에게, 겉멋 든 철학자에게 이 참사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라고 따지듯, 그렇게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니 우리는 말해야 한다. 아니 그 사건이,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한 망자들이, 유가족들이 무슨 말 좀 해 보라고 우리에게 말하게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회피하고 싶지만, 어설픈 말을 해서 힘든 이들에게 상처를 더할 것 같아 외면하고 싶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것이 대참사로서의 사건이 가지는 위력이고, 고통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힘이다.

무능한 변신론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특별히 신학은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전통적으로 신학은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 변신론(Theodicy)으로 응수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악이 있고, 그것은 끔찍한 아픔을 일으키지만, 신은 이런 일에도 나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전통 변신론의 기본 골격이다. 그런데 신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신이 그런 고통을 예비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신은 얼마나 무정한 신인가? 어떤 신학자는 말한다. 신이 고통과 악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허락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만든 것과 허락했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물론 신이 악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신의 선함은 보장될지 모른다. 하지만 악을 허락했다는 점에서 신의 무정함은 배가된다. 허락이 본디 어떤 것을 거부할 능력이 있음에도 굳이 그것을 용인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신의 무정함은 사라지기보다 배가된다. 여리고 성에서 강도 만난 이를 외면한 유대인들은 얼마나 무정했던가? 그들의 외면으로 강도 만난 이의 아픔은 배가되었다. 배가 가라앉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친구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구해 달라고 한 여학생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 우리의 고통이, 아픔이 배가된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변신론에다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한다. 그리고 부활을 더한다. 하지만 변신론의 기본 골격에 큰 변화는 없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았다. 신이 고난을 받았다. 그렇다고 꽃 같은 아이들이 죽음의 고난을 받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부활한다. 아이들도 부활한다(나는 분명 이것을 소망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에게 미래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의 행복을 말하지 못하는 미래는 허망하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피로는 미래의 희망이 도래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피로감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워 미래의 시간을 소망한다는 말은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별다른 해법을 주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신학의 무능함

레비나스는 '쓸모없는 고통'(La souffrance inutile)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변신론의 종말'(114쪽)을 선고한다[Emmnuel Levinas, "La souffrance inutile." <Entre nous: Essais sur le penser-à-l’autre>(Paris: Éditions Grasset & Fasquelle, 1991). 인용된 면수는 본문에 표기]. 적어도 그가 거주하는 유럽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죽음의 가스실과 신의 침묵을 양립시키는 그 어떤 시도도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정당화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전통 형이상학의 무능함만을 보여 줄 뿐이다. 전통적인 ― 특별히 근대의 ― 변신론은 거의 모두 형이상학에 의존한다. 선한 신이라는 최고 완전한 존재자를 논의의 기본 토대로 삼고 악이라는 해소할 수 없는 문제를 마치 해소할 수 있는 것처럼 구성해나가는 것이 변신론의 형이상학적 성격이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 변신론의, 조금 더 나아가서 신론의 토대는 형이상학이 되고, 이러한 형이상학이 비단 제일철학의 지위를 넘어 신학의 영역에서 제일신학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예로,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신학은 결국 헤겔식의 형이상학으로 귀결될 가능성 높다. 헤겔에게 악은 선의 모순이고, 지양과 극복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악은 선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대립과 모순 안에서 지양되어 더 큰 선으로 넘어가는 계기 역할을 한다리쾨르는 이처럼 해소될 수 없는 악을 마치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다룬 헤겔적 도식이 악에 대한 칸트의 통찰에 미치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적어도 칸트에게는 인간의 근본악이라는 지울 수 없는 성향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헤겔은 악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악이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아로새길 때마다 늘어가는 신의 침묵은 고통과 신의 선함의 반비례를 보여 주는 사건이 될지언정 신의 정당함을 보여 주지 못한다. 즉, "고통과 모든 변신론의 불균형이 … 아우슈비츠에서 드러난다."(115쪽)

이처럼 악과 고통은 어렵다. 우리를 어렵게 하고, 당혹스럽게 한다. 더 나아가 신학을 무능하게 만든다. 한번 돌아보자. 작년 4월 16일 이후 형이상학적인 신학은 얼마나 무능했는가? 인간의 고통 앞에 신을 변호하는 일에 급급했고, 나의 죄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는 말이 난무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신학의 자기모순을 보여 준다. 거의 모든 신학에서 불가해성, 곧 파악할 수 없음을 신의 속성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일이 가능한가? 내가 다 알지도 못하는 신을 변호한다는 것은 핵심 공식을 모르고서 수학 문제를 풀겠다는 일만큼이나 무모하다. 더 나아가 이것은 요행을 바라는 일에 가깝다. 모르는 것을 아는 채하고, 틀릴 것을 뻔히 아는데도 행여 답을 맞힐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 나오는 그 모든 시도들을 요행을 바란다는 말 이외에 어떤 표현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이처럼 세월호 참사 앞에 신학은 고개를 숙인다. 아니 숙여야 한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전과 같이 학문 중의 학문인 것처럼 행세하는 신학을 지켜보는 일이란 신과 이웃 앞에 겸손을 추구하는 신학의 근본 자세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개 숙인 신학이, 쓸모없는 변신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는가? 레비나스를 따르자면, 적어도 전통 형이상학의 틀을 유지한 채 감행하는 신학적 모험은 인간의 고통과 악 앞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거대 담론이 해 줄 수 있는 설명이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대 담론을 통해 세월호를 설명하려는 다른 모든 시도들 역시 어쩌면 매우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학적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세월호 참사는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또 다른 이는 말한다. 국가 안전 시스템의 붕괴가 문제라고. 바꿔 물어보자. 물론 나 역시 그러한 거대한 체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문제 제기가 더 나은 미래와 사회의 변화를 필요하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고통과 참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러한 거대 담론 역시 무능하기엔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해소되면 악은 없어지는가? 국가 안전 시스템이 세워지면 고통은 해소되는가? 참사의 정도가 완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악과 고통이 해소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의 체계로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쉬울 때 해법을 제시할 수 있고, 한 가지 대안을 들려주기는 하지만, 어려운 문제, 절대 해소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무능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형이상학적 신학의 종언은 이처럼 동시에 거대 담론에 의거한 설명의 무능함도 폭로한다.

제일신학으로서의 윤리학

그렇다면 이제 비로소 말해 보자. 세월호 이후 쓸모없게 된 형이상학, 쓸모없게 된 변신론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고통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준다기보다, 혹은 신의 정당함을 논의하라고 촉발시키기보다, 바로 그 "고통에서 윤리적 전망이 열린다"(111족)고 말한다. 특별히, 이 윤리적 전망은 "상호성의 배려가 없는,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책임의 상호 인간적 전망 안에, 존재하며, … 일자 대 타자의 관계의 비대칭성에서 존재한다"(119쪽). 일자와 타자 사이의 상호성이 아닌 비대칭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고통받는 타인의 윤리적 우위성을 뜻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전유해 보자. 고통받는 인간의 현현은 나를 놀라게 만들고, 당혹스럽게 하고,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족들이 자꾸 우리에게 말을 건네듯 우리는 그에 책임 있는 응답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에 놓인다. 즉 그들이 높고 나는 낮다. 존재론적으로는 그들이 낮은 자라고 하더라도 윤리적으로는 그들이 높은 자다. 우리는 수동적으로라도,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로 인해 낮은 데로 임할 수밖에 없다. 신학도 이처럼 낮은 데로 임해기를 요구받는다.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말이다. "고통 안에서", 신학의 "감수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이고,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108쪽) 것이 되고 만다.

무능해져 버린 신학은 역설적으로 수동성을 통해 겸손해진다. 고통에 자연스럽게 무능함을 드러내 버린 신학만이 고통에 응답하기 더 쉬워질 만큼 낮아지고, 이웃 곁에가 아닌, 이웃보다 더 낮은 자리에 갈 수 있다. 이렇게 고통 앞에 촉발되는 신학은 형이상학의 성격을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에든버러 신학대학원의 마이클 퍼셀(Michael Purcell)의 견해처럼, 제일신학의 자리를 윤리학에게 내줘야 한다. 세월호 이후 신학이 고통받는 타인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말을 해내기 위해서는 바로 그 타인에게 촉발되어 책임 있게 응답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가톨릭의 교종 프란치스코가 보여 주었듯이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하는 발언에서,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족에게 시행된 세례의 성례전에서, 또는 광장과 항구라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전례를 통해 가능하다. 능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고통에 의해 수동적으로 촉발된 그 응답의 사건들 안에서 새로운 신학, 윤리학으로서의 신학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때 신은 더 이상 변호를 받아야 할 위엄 있지만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낮은 자로 나타난다. 전례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이웃 안에 익명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바로 이러한 윤리적 사건 안에서 신학의 전망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세월호 이후, 인간의 고통 이후, 이 고통에 응답하는 신학이 참된 신학이라고. 또한 말하게 한다.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해 달라는 유족들과 망자들의 윤리적 명령이, 신학자에게, 사목자에게, 신자에게 윤리적 응답으로서의 신학을 말하게 한다.

필자 후기: 무능하고 연소한 철학자가 속죄와 애도를 위해 졸고를 작성했습니다. 부디 실종자들이 모두 가족 품으로 돌아오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어 유가족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희망을 노래할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합니다.

김동규 /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새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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