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단원고 고 유예은 양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상 규명을 위해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 유경근 씨는 참사 직후부터 유가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고, 현재는 4·16가족대책위 집행위원장이다. 어머니 박은희 씨도 광화문광장과 청운동, 국회를 오가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은이 가족은 안산 화정교회(박인환 목사)에 다닌다. 박은희 씨는 화정교회 전도사다. 박인환 목사는 박은희 씨에게 "진상 규명을 위해 뛰어다니더라도 토요일·주일에는 반드시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오래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가족들의 상황이 가면 갈수록 나빠지고 있지만, 주일이 되면 박 씨는 예은이의 쌍둥이 언니와 두 동생들을 데리고 교회로 온다고 한다.

▲ 안산 화정교회 박인환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는 예은이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로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박인환 목사는 참사 후 어디를 가나 세월호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 용지를 들고 다녔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기도 십자가를 손수 만들어 기독교인 유가족들을 초대해 나눠 주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교회가 나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밑으로 많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번 부활절에는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새벽 기도회를 열었고,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서 설교도 했다. (관련 기사: 세월호 잊지 않은 기독교인 500명, 광화문광장서 부활절 예배 / 부활한 예수는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소외된 갈릴리로 / '환희' 대신 '추모', 부활절 맞은 안산 교회들)

<뉴스앤조이>는 4월 7일 화정교회에서 박인환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는 지난 1년간의 일을 괄괄한 어조로 들려주었다. 그가 겪은 일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을 더욱 실감나게 알 수 있었다. 박 목사에게 세월호 참사는 이 땅에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를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아래는 박인환 목사와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특별법 얘기만 나오면 '종북'이니 '좌파'니…한국교회 서명 10만 개나 되겠나 

- 세월호 참사 이후 여러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교인이 1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를 목회해서 그런지 교인들이 죽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목회 30년 넘게 하면서 장례도 많이 해 봤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워요. 나이 많은 분들도 그런데, 어린아이들 장례를 치를 때에는 정말 힘들죠. 예은이도 참사 바로 며칠 전에 나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예은이에게 전화해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얘기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괴로워요.

그런데 참사 이후 초창기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라고요. 유명 대형 교회 목사들이 말 같지 않은 말을 하고. 그런 목사들이 수천수만 명 앞에서 그런 얘기하고, 우매한 교인들이 거기에 '아멘' 할 걸 생각하니 참…. 나는 시골 교회 목사라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지 몰라도,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죠.

어느 날 박은희 전도사가 말하더군요. "목사님, 창피해 죽겠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다른 유가족들이 기독교인 유가족들에게 "불교 신자인 유가족들은 절에서 서명 받아 오고, 가톨릭 신자 유가족들은 성당에서 서명 받아 오는데, 기독교인 유가족들은 뭐냐"고 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참 부끄럽더군요.

예은이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내가 뭘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고.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을 받는 게 저희들에게 유일한 힐링입니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후로 특별법 제정 서명 용지를 들고 다니면서, 주로 목사와 장로들에게 서명을 부탁했죠.

▲ 화정교회는 2015년 달력을 제작한 후, 4월 16일에 노란 리본을 일일이 붙여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사람들이 서명에 잘 참여하던가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처음에 2000명분의 서명 용지를 가지고 와서 가는 곳마다 펼쳐 놨어요. 교계에서도 나름 세월호 대책위가 꾸려지고 그랬는데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서명 얘기하면 '종북'이니 '좌파'니 얘기가 나오고 적극적이지 않더라고요.

어떤 선배 목사는 서명란에 펜을 대고 앉아서 10분간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내가 화가 나서 "아이 형님, 내가 서명하라고 줬지 기도하라고 줬습니까? 기도 그만하고 서명해요!" 그렇게 해서 받은 것도 있어요.

어떤 장로는 "목사님, 앞으로 큰일 하실 분이 왜 노란 리본 붙이고 이런 일을 하십니까" 그래요. "큰일이 뭡니까"라고 물었죠. 장로가 "앞으로 경기연회 감독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감독이요? 아파하는 사람들을 돕자고 서명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감독은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서명하는 게 문제가 되어 못 한다면 그런 거 안 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답했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장로님 아들이나 손자가 그렇게 사고를 당해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장로가 "나는 우리 애들이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할 말은 합니다" 이래요. 참나….

미국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후배가 있어요. 그 목사에게 서명을 부탁했더니 "종북 세력들이 연루돼 있어서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화가 나서 "종북이가 네 아들이냐. 미국까지 갔다 온 사람이 철없는 노인처럼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 안 하려면 관둬라!"고 쏘아붙였죠. 그랬더니 후배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서 서명하더라고요.

한두 명이 아니에요. 여러 목사 장로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노란 리본 배지 달고 다니면, 왜 배지 아직도 달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러면 나는 항상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OO님은 노란 배지 달아 보셨어요?" 그러면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그런 걸 왜 달아요?" 제가 다시 말하죠. "한 번 달아 보지도 않은 분이 왜 아직 달고 다니느냐고 따지면 안 되죠." 종북이니 좌파니, 이상한 세뇌에 빠져 있어요, 기독교인들이. 이게 어떻게 세뇌를 당했는지 북한 동포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 박인환 목사가 직접 만든 '기도 십자가'. 한 손에 편하게 쥘 수 있게 만들었다. 박 목사는 이 기도 십자가를 기독교인 유가족 76명에게 나눠 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그래서 서명은 많이 받으셨어요?

하여간 어렵게 받았죠. 선후배들에게 서명 좀 받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교인들에게도 각자 서명 용지 가지고 가서 서명을 받으라고 했어요. 식당 운영하는 교인들은 아예 카운터에 서명 용지를 올려놨어요. 그렇게 해서 받은 서명이 1만 700개가 조금 넘어요. 인상적이었던 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서명을 받아 주는 거였어요. 특히 자기가 속한 단체에서 서명을 받아 저에게 전해 주신 목사와 교인들을 잊지 않고 일일이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명지를 담아 보내 준 봉투들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책장에 쌓아 두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 생각하면 서글프죠…. 나 같은 시골 교회 목사가 노력해도 1만 개를 받는데. 우리 교단 기독교대한감리회가 1만 개 좀 넘게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4만 개 좀 넘은 걸로 알고 있고. 이러면 교단이나 연합 기관들 다 합쳐도 10만 명 되겠어요? 물론 개교회나 기독교인 개인이 받은 것도 있겠지만. 교인 150만이다, 400만이다 교세 자랑하는 대형 교단들이…. 법륜 스님의 정토회만 147만이에요. 가톨릭도 수십만 받았죠.

희생자 많으면 두 배 세 배 슬퍼할 줄 알았는데…

- 이번 부활절에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새벽 기도회를 주관하셨는데요.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 박인환 목사가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하는 모습. (사진 제공 화정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가 합동 분향소 쪽에서 부활절 새벽 예배를 한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됐어요. 기독교인 유가족들이 너무 실망했어요. 누군가는 거기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싶었죠. 부활의 소망이 가장 필요한 곳이 그곳이기도 하고. 새벽 예배를 하기로 결정하고 난 후의 얘기지만, 부활절 새벽에는 이미 유가족들이 아이들 영정 사진 들고 도보 행진을 나가서 분향소가 빈 무덤처럼 텅 비어 있는 상태였어요. 우리가 찾지 않았으면 정말 버려진 곳 같이 될 뻔했습니다.

안산시기독교연합회(안기연) 쪽에 연락해서 분향소에서 예배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어봤는데, 이미 1년 전부터 장소가 정해져 있어서 며칠 앞두고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감리회 안산지방 감리사니까 우리 지방 교회들이라도 분향소를 지키자고 했죠.

한 장로님이 "새벽 예배를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많다. 분향소에서 새벽 예배하는 걸 알려야 한다"고 제안해서 급하게 안산 지역에 현수막을 걸었어요. 그랬더니 안기연 쪽에서 찾아와 "어떻게든 연합해서 해야지. 둘로 나눠서 하면 일반인들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분향소를 비울 수도 없고, 현수막에도 분명히 감리회 안산지방에서 주최한다고 했으니 문제없지 않겠느냐고 답했죠.

- 희생당한 학생들이 안산 지역 교회에도 많은데, 교회들끼리 잘 연합되지 않는 느낌이네요.

안산 지역 총 37개 교회에서 76명의 학생들이 희생당했어요. 이건 작년 7월, 세월호특별법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한창이었을 때 얘기인데요. 유족들이 하도 헛소문에 시달리고 교회마저도 손가락질하고 총을 쏘니, 내가 희생자 있는 교회 목사들이 모여서 성명서라도 하나 발표하자고 제안했어요. 희생자가 가장 많은 어느 교회 목사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대형 교회 목사라서 직접 통화도 할 수 없더라고요. 부목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죠. 그런데 그 목사가 "그건 안기연 차원에서 할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안기연 회장에게 다시 연락했죠. 그 교회에도 세 명이 희생당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목사도 "그렇게 해 봤자 안 된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고 답이 왔어요. 참 씁쓸했죠. 어쩔 수 없이 혼자 광화문에 1인 시위하러 가고 그랬어요.

천주교 신자들은 교황이 와서 위로해 주고 정의구현사제단이 매번 미사도 드려 주고, 불교 신자들도 정토회 서명운동으로 위로받는데, 개신교인들은 오히려 비수로 등을 찔리고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라. 내가 뭐 주제넘게 나설 수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그래도 위로가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었죠.

그런 생각과 함께, 그때 내가 예은이 유골 안치한 데에 넣어 주려고 작은 십자가를 하나 깎고 있었거든요. 깎으면서 생각해 보니까 ­― 그때는 유가족들이 청운동에서 노숙하고 있을 때였어요 ­― 기독교인 유가족들에게 기도 십자가를 하나씩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료 선후배 목사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10여 명이 함께 며칠 동안 76개의 기도 십자가를 만들었어요. 직접 나무를 구하고 자르고 사포질하고 정성을 들였죠. 

십자가는 작년 9월 28일 유가족들을 교회로 초청해서 나눠 줬어요. 교회 다니지 않는 유가족도 네 분이 왔었는데, 그중 한 분이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다더라고요. "교회가 이렇게 좋은 일도 하는 곳인 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 말을 전해 듣고 슬펐습니다. 유명 목사·장로라는 사람들에게 험한 말만 들었지, 교회는 유가족들에게 냉담하지…. 유족들이 교회에 대해 느끼는 실망감이 오죽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 박인환 목사는 선후배 동료 목사 내외 10여 명과 함께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한 기도 십자가를 만들었다. (사진 제공 화정교회)

- 안산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1년 동안 교회의 대응이 어땠는지 체감하셨겠어요.

합동 분향소 부활절 예배 준비할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부활절 새벽에 같이 모여 예배드리자고 A교회 목사에게 연락했더니, 그 목사는 "지금까지 세월호를 위해 한 게 없는데 거기 참석하기가 좀 그렇다. 그래도 근처 B교회가 참석하면 같이 가겠다"면서 B교회 목사와 얘기 좀 나눠 보라고 하는 거예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B교회 목사에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생각해 본 적 없는 거라 관심이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부활절 새벽에 꼭 분향소에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들 희생자가 있는 교회들인데…. 넘을 수 없는 어떤 벽 같은 것을 느꼈어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아이들 많이 희생된 게 무슨 계급장 같더라고요. 자기 교회에서 네 명, 다섯 명 죽었으면 나보다 네 배, 다섯 배 더 슬퍼할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이제 남 일인 것처럼 대하는 것 같더라고요. 내 느낌이겠죠.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랬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교회 크기가 클수록 그 목사와 대화하기 힘들고, 자기와 관련 없는 듯 얘기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이런 말하면 또 큰 교회 목사들은 '저 목사 평생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더니 열등의식 때문에 저러는구나'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정말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목사들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고, 눈치 안 보고 그냥 해도 될 일도 지레 겁먹고…. 작은 교회라고 이제 그만하자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그런 사람 눈치 보면 못 하는 거죠. 

▲ 박인환 목사는 교회 앞에 목련나무를 옮겨 심었다. 세월호 희생자 아이들이 짧게 피었다가 져 버리는 목련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박인환 목사는 세월호 참사 1년을 보내면서 기가 막힌 한국교회의 민낯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성격처럼 시원시원하게 얘기했지만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느낀 건 '통탄'이었다. '나는 잘했는데 너희들은 못했다'는 게 아니었다. 목사들의 생리가 원래 그런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세월호 참사 앞에서는 뭔가 다를 줄 알았던 기대에 대한 절망이었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거고,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일이 아닌 거예요. 철저하게 남인 거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그냥 예배 시간에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뿐이고, 교인들은 '목사님이 저렇게 설교하는구나' 고개 끄덕하고 마는 거죠. 삶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박은희 전도사 말대로, 세월호 참사가 진짜와 가짜를 확실하게 구분해 준 거예요. 정치인이나 언론도 그렇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의 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짜와 가짜가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슬퍼만 하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 진짜 이웃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