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가처치를 넘어서> /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484쪽 / 1만 8,000원

한국교회, 특히 초대형 교회로서 메가처치가 일으키는 종교·사회적 문제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새삼스럽게 '다시' 메가처치를 이야기하는가? 저자는 메가처치가 단순히 급성장하는 개별 교회 혹은 종교적 기업이기에 앞서 이미 하나의 집단적인 종교·사회적 현상(메가처치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7, 37~8쪽). 따라서 책 제목처럼 진정으로 "메가처치(현상)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선 메가처치 현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메가처치 현상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변천 과정, 그 결과로 발생하게 된 병리적 징후들에 대한 정밀 진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21쪽). 그래야만 이 병리적 징후의 발병 요인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메가처치? 메가처치 현상!

'뉴스룸'이라는 HBO 드라마의 오프닝 크레디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미국은 왜 가장 위대한 국가인가.' 이 질문에 대해 메인 앵커 '윌 매커보이'는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라고 냉소한다. 그런데 이 독설보다 정작 중요한 건 그의 마지막 말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지."[이명석, '이것이 언론이다 ― 뉴스룸'(<한겨레21> 2014. 5. 3.)]

이 대사를 오늘날 한국교회로 가져와서 한번 적용해 보자. "(한국) 교회는 이제 아름답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 그렇다. 지금 한국의 교회들은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고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또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메가처치의 각종 문제는 ― 그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간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 이런 교회의 일탈들을 너무도 쉽게 메가처치만의 책임으로 전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일탈은 정말 메가처치 때문인가?" 이 책은 그런 성급한 일반화를 거부하며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현상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7쪽). '뉴스룸' 식으로 말하자면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병리적 징후를 인식하는" 첫 단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메가처치 논박>(신광은)에서 교회는 유기체로서 인간의 몸에 비유된다. 몸의 모든 요소는 개체로서 적합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작동한다. 그런데 이 몸에서 기형적으로 거대하고 급속하게 성장을 하는 세포들이 왕왕 발견되는데 인체에서 이처럼 끝없는 성장이 가능한 것은 암 세포밖에 없다. 메가처치는 기형적으로 과도하게 성장한 일종의 암 세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저자는 메가처치 현상은 인체에 암 세포가 심각하게 전이되는 형국이라고 했다(<메가처치 논박> 99쪽).

그렇다면 이 암 환자가 ―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교회 ― 진정으로 치유되기 위해 해야만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저 암 세포만 제거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암 세포가 발병하는 원인 자체를 제거할 것인가? 결국 저자는 명확한 구분과 진단을 통해,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병리적 징후를 그 뿌리로부터 들어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2. 메가처치 현상이 어때서?

비록 이 책에서는 '메가처치 현상을 병리적인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그 전제는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다(21쪽). 메가처치 현상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인 내적 팽창력의 축적과 ― 선교와 전도, 교회와 개인의 성장 욕구 ― 외적 억제력의 약화는 – 인구 증가, 기술 발전, 심리적 거부감의 해소 – 부정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59~93쪽), 독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중립적인, 아니 도리어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계속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메가처치 현상이 어째서 병리적인지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발생한다. 그리고 저자는 메가처치 현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 특히 교회론에서 발견되는 조직신학적 문제와 오류들을 밝혀 냄으로써 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낸다(140쪽).

요약하자면 첫째, 메가처치 현상은 지역 교회가 이웃 교회와의 연합에 실패한 교회적 현상이다. 둘째, 메가처치 현상은 지역 교회 내의 모든 신자가 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실패한 교회적 현상이다. 교회론으로 설명하면 메가처치 현상은 첫째, 교회가 공교회성을 상실함으로써, 둘째,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함으로써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181쪽).

신광은은 메가처치 현상이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교회론적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서 이 두 가지 교회론적 실패에 대해 공교회성이 강한 가톨릭교회나 공동체성이 강한 아나뱁티스트 교회에는 메가처치 현상이 없음을 반례로 들어 논증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교회론적 실패의 배후에는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181쪽).

저자에 의하면 즉 역사 속에서 교회는 근대 자유주의-개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하게 되었고, 이렇게 태어난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개교회(혹은 각 신자)에게 욕망을 극대화할 자유를 선사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 다시 이들을 재편해 놓았다(211쪽).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이 이윤과 효용 극대화로 대체되면서 교회론은 심각하게 훼손되는데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개교회와 개신자들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개체로 만들고 만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는 메가처치 현상을 병리적 징후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3. 교회의 교회에 대한 투쟁

메가처치 현상이 병리적이라는 것을 논증했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 병리적 현상을 모든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한가? 어째서 모든 한국교회가 반드시 메가처치화(化)되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저자는 이 난감한 질문을 신학과 사회학을 넘나드는 통찰을 통해 간단하게 극복해 나간다(140쪽).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시장 상황'에 처한 교회는(89쪽)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160쪽)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제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생존과 이를 위한 성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166쪽). 이처럼 시장 질서 아래 하나의 목표로 경쟁이 심화되자 점차 모든 교회들이 동질화되어 간다(49쪽).

저자는 이 경쟁과 동질화의 원리를 '종합 격투기'의 역사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초창기에 다양한 종목의(복싱, 태권도, 유도 등등) 격투 기술이 존재하던 '이종(異種)격투기'는 이들을 하나의 링 안에서 생존(승리)을 위해 경쟁하도록 몰아넣는 순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다양한 격투 기술들이 링과 룰, 점수에 적합하게 적응,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이종격투기'가 아닌 '종합 격투기'라는 전혀 다른 하나의 격투 체계 안에 동일하게 재정립되어 버린 것이다.(<종합 격투기>(이동기, RHK) 152쪽)

그런데 이와 동일한 현상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개별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서, 경쟁에서 승리(생존)하기 위한 체질로 스스로를 바꿔 나가게 되었다. 교회의 목표는 소비자들을 유치하여 성장하고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시장 상황에 유용한 공격적 기업 전략이 적극 도입된다[<선샤인 지식노트>(강준만, 인물과사상)]. 마침내 같은 시장이라는 링 안에 묶여 버리게 되면서 모든 한국교회들은 메가처치 현상의 굴레 아래로 재편되어 버렸다[홍현욱, 'UFC와 메가처치'(<뉴스앤조이> 2013. 6. 27.)] 나아가 모든 교회는 자신의 자원을 자기 교회의 유지와 성장에 거의 대부분 소진함으로써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교회가 되어 간다.

4. 올바른 방향성의 회복

막상 교회가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 채 메가처치 현상의 포로가 되어 버린 실태를 마주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이 암울한 현실을 개교회(혹은 각 신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 할까? 아쉽게도 이 책은 세세한 행동 지침이나 규정을 별도로 강제하진 않는다. 이는 어쩌면 그처럼 명시된 조항들이 또 다른 신조나 교의, 혹은 율법처럼 작동할 것을 저자가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대안으로 무엇보다 먼저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에 대해서는 ― 수많은 실례들을 제시함에도 ― 전적으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두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다면 그 올바른 방향성이란 무엇일까? 의외로 그 해답은 심플하다. '교회론의 회복'이 답이다. 결국 메가처치 현상이란 신학적으로 교회론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게 된 것이니, 훼손된 교회론(공교회성, 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이를 치료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우선 공교회성의 회복에서 저자는 개교회의 분열이 아닌 통일성,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성, 참제자도로서의 사도성, 공교회의 강조로서 보편성을 주장한다(289~310쪽). 간단히 말해서, 지역 교회로서 개교회는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연합하며, 교회가 세상과 대조되는 강한 영성과 윤리를 가져야 하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 되는 참제자도가 전수되며 전승받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 교회들은 하나의 보편적 공교회로서 서로 연합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개교회로서 자율성을 발휘하는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한다(293~313쪽).

공교회성과 더불어 공동체성의 회복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데, 공교회는 지역 교회인 개교회로부터 시작되며, 개교회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역교회 내 신자들 간의 관계에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교회론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개인적 신앙의 자유와 관계 속의 자유, 이 둘 사이의 조화와 신자들 간의 상호 복종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364~368쪽). 즉,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한 형제와 자매로 맺어진 가족 공동체로서, 각 신자들은 비록 서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관계 속에 있으나 자발적으로 서로를 섬기며 복종하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69쪽).

이상의 두 가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서로, 함께'라 할 수 있다(374쪽). 자발적인 각 신자들이 서로-함께 모여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나가며(376쪽), 각 사람의 은사대로 직분을 평등하게 나누어 감당하므로 전 신자 제사장의 원리를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383쪽), 이런 개교회들이 또한 서로-함께 모여 몸으로서의 지역 교회를 이룸으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공교회성 회복(384~385쪽), 그리스도의 몸 됨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대안의 요체인 것이다.

▲ 신광은의 <메가처치를 넘어서>가 기존의 구조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본질 회복이 가능하다고 봤다면, 필자는 먼저 그 구조를 '벗어나야만' (한국교회의) 본질 회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꽃들에게 희망을> / 트리나 폴러스 지음 / 김석희 옮김 / 160쪽 / 8,000원

5. 책장을 덮으며

이 책에는 치열한 목회 현장에서 믿음과 현실의 괴리에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며 싸워 왔던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더하여 저자 스스로가 메가처치 성도이자 사역자였던 경험을 밝히며, 메가처치 현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으로 돌리고 있다. 이 점에서 본서는 한국판 어거스틴의 '참회록'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을 외치는 책의 에필로그는 온통 오늘날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안타까움과 열정이 가득하다. 이는 또한 이대로라면 필히 공멸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다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저자의 신학적 양심선언, '반메가처치 신학 선언'이 더욱 진실된 힘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이 책의 '반메가처치 신학 선언' 앞에 이제 교회들이 귀 기울이며 겸허히 나아간다면 분명히 한국교회의 메가처치화를 향한 몰입이 어느 정도 꺾이고 동시에 교회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것이란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394~8쪽).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자가 보는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가 않다. 이 책은 분명 메가처치 현상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정녕 그러한 전환이 가능할까? 아니 하다 못해 이 신학 선언을 한번 들어나 보기라도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올시다'이다. 이미 저자도 책에서 고백했듯이 신학이 현실을 바꾸기란 요원하고,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현실에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다(397쪽). 게다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종속되면서 한국교회는 그 구조적 모순에 완전히 함몰되어 버렸다. 앞으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개교회(혹은 각 신자)가 구조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다. 도무지 답이 보이질 않는 이 비관적 현실 앞에 우리는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노답'(답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본 필자 역시 딱히 변명할 말이 없다. 필자도 이제 막 기존 현상에 대한 분석의 결과를 얻었을 뿐, 아직까지 이 현상을 제대로 고찰해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대안적 모델을 구상해 보는 단계인데, 마침 영감을 주는 이야기 하나가 있어서 간략히 소개해 볼까 한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책에는 나비가 되는 것을 잊어버린 애벌레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나비가 되어 하늘 높이 오른다'는 문장에서 오직 '높이 오른다'는 부분만을 붙잡음으로써 서로 높이 올라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이렇게 모인 애벌레들은 이윽고 큰 탑을 형성한다. 이들 모두는 그 높은 탑 꼭대기에 삶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서로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폴러스, 시공주니어)].

하지만 주인공인 줄무늬 애벌레가 그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발견한 사실은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고, 이를 알고도 모두들 진실을 숨기며, 자신이 올라왔던 것과 유사한 탑은 너무도 많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을 내려와 외딴 조그만 나무에 매달린 다른 애벌레 고치들 가운데 자신 또한 고치를 만들기 시작한다(같은 책 40쪽).

본 필자의 대안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이게 대체 이 책의 주장과 무슨 차이가 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정말 중요한 차이는 이 책이 기존의 경쟁 구조 '속에서도' 본질 회복이 가능하다고 봤다면, 필자는 먼저 그 구조를 '벗어나야만' 본질 회복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Totally new!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이상, 희망은 없다. 누구 말마따나 불판을 갈아야 한다. 바로 이 하나의 차이가 오랜만에 좋은 책을 접하게 되었음에도, ― 다시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 여전히 필자로 하여금 씁쓸함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홍현욱 / 열음터교회 전도사, 아직은 철들기보단 꿈꾸고 싶은 어른이(?), 만학도, 그리고 예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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