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자들을 향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예수님의 충복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그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의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민첩한 사람이었던가?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전혀 어떻게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가 제일 먼저 칼을 빼어 들었고 그 칼로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제사장의 부하 말고의 귀를 자르고 말았다(요 18:10).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마도 제사장의 부하들은 움찔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의기투합하여 그들과 결사 항전을 벌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말렸다. 베드로에게 고맙다고 하거나 칭찬하고 두둔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그리고 순순히 그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셨고, 그리고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고난주간을 맞이한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칼을 사용하기를 즐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칼을 사용한 결과는 무엇인가? 망해 가는 것이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한국교회는 복음을 사용하기보다는 칼을 애용하다가 망해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에게는 파워를 키우고 그렇게 얻어진 파워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힘자랑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부활절 연합 예배와 같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이라는 아주 좋은 성경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모여 기독교의 세력이 이렇게 크다고 하는 것을 과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무시받지 않으려는 지극히 세속적인 동기도 숨어 있다. 그래서 그런 모임에는 항상 정치인들이 등장하여 강대상 위의 특별석에 자리하고, 또한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관행이 성도를 세상적인 지위에 따라 차별하여 대우하지 말라는 야고보서 2장 1-4절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일 뿐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원칙에도 위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고 그것에서 많은 유익을 얻으려는 불순한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진정한 파워를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워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그런데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은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해 버린 것이다.

성도는 누구인가? 성도는 이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군가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 편도 돌려 대야 하는 것이다(마 5:39).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 버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다.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6-7)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도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래서 그 칼로 세상을 정복하면 되는 줄 알고 있다. 성도를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목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일삼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기보다는 세상 법정의 칼로 상대방의 귀를 잘라 버리고 있다.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 법정에 달려가서 회계장부 열람 가처분 신청을 하고 있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간접강제금이라는 칼을 휘두르고 있고 언론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또한 교회를 불순한 세력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사람들도 언론의 칼을 휘두르며 맞서고 여러 가지 힘을 동원하여 대항하고 있다. 결국 그 결과는 뻔하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게 되어 있다(갈 5:15).

복음을 전하는 것도 겸손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가진 칼을 휘둘러서 교회로 이끌어 들이고 있다. 사장이라는 권위의 칼을 이용하고 상관이라는 권위의 칼을 이용하고 또한 주요 거래처라는 갑의 칼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할 줄 몰랐던 교회가 만일 누군가 교회에 피해가 가는 보도를 하면 그 앞에 가서 데모를 하고 힘을 사용해서 굴복시키는 모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야 죄를 짓든 말든 너희가 상관할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도(고전 5:12-13), 오지랖이 넓게도 교회가 동성애 축제의 현장으로 찾아가서 비난하고 우리의 힘을 과시하여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반면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성도들의 범죄와 목회자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유난히 침묵하고 있고 관대하다. 성경 말씀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는 가만 두지 말고 그들을 판단해야 하고 또한 쫓아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고전 5:10-13).

아쉽게도 우리의 힘을 모으고 키워서 우리의 규모를 보여 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얻을 수는 없다. 일시적으로 우리가 휘두른 칼에 말고의 귀가 떨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러한 성과를 보면서 역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결국은 이 세상이 이 세상적 파워에 있어서는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도망친 것이 아니겠는가?(마 26:56) 칼을 쓰다가는 우리도 다 도망가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얻는 것은 힘없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따를 때이다. 동성애자들의 집회를 우리의 힘을 동원하여 못 하게 막음으로써 그들의 죄악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양심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자가 되고 우리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될 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포로로 잡혀 와 하녀의 신분에 있었던 소녀의 말에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귀를 기울였다.

이제 우린 도로 우리의 칼을 칼집에 꽂아야 한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보여 주었듯이 교회가 힘자랑을 할 때 항상 교회는 무너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겐 십자가가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활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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