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대부분 찬송, 찬양 가사는 너무 추상적이다. 언제부터인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천편일률적인 가사에서 식상함이 들기 시작했다. 음악적 테크닉은 화려해졌지만 가사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은 밋밋하다. 그래서 감동이 떨어진다. 흠, 갑자기 내가 'K-POP 스타'의 심사위원이 된 기분이다.

사실 나는 요즘 젊은이들 못지않게 요즘 찬양들을 좋아하고 잘 따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래를 선곡하는 일이 너무 어려워졌다. 노래 가사에 영어가 뒤섞여 있어서 자존심이 상한 것도, 리듬 혹은 음이 높아서 따라 부르기 어려워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 시대적 고민을 담은 노래를 찾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간혹 있기는 해도, 가사나 곡이 교인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 요즘엔 CCM이 마뜩찮다. 신앙고백적인 찬송가에 더 정감이 간다. 대부분의 CCM이 동시대의 아픔을 담아내지 못하고, 아니 담아내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다. CCM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만 쓰지 말자. 찬양하기를, 나와 내 공동체 돌아보는 데에서 그치지 말자. 이제는 예기치 않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해 노래하고, 그들의 사연을 담아 가사를 쓰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자. (사진 출처 Pixabay)

CCM, 동시대를 위한 노래인가?

평소 음악을 자주 듣는 한 사람으로서, 요즘 즐겨 듣는 음악들을 살펴보았다. 클래식이나 대중가요, 재즈가 대부분이고, 교회 관련 음악은 CCM보다는 신앙고백적인 찬송이 더 정감이 간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증거인가? CCM이란 음악 장르가 언제 출현했는지 검색해 보니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후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CCM이 활성화한 지 20년도 더 된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CCM이란 말이 마뜩잖다. CCM은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동시대를 노래하는 기독교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그런데 도무지 현시대의 아픔이나 모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 문화 사역 단체에서 새 앨범을 출시하였다. 그런데 그 앨범 소개글이 페이스북에서 이슈가 되었다.

"2014년 4월, 이 나라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인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 '우리가 이 시간 속에서 이 상황을 마주하며 과연 무엇을 말하고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시대적인 상황을 보며 '교회'를 주제로 하여 오랫동안 앨범을 기획하며 준비하기도 했다. 이 시대에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며 이상적인 메시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 드디어 이들이 세월호를 비롯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한 것인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앨범 소개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멤버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1년 가까이 준비해 온 과정을 고스란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상처받고 연약한 이들과 함께하며 믿음의 행동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모습, 시대를 품고 그에 맞게 변화하려는 치열한 실천이 가장 먼저 하나의 교회이며 가족 공동체인 OOO(단체 이름) 안에 진실되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 오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OOO의 정체성에서부터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들을 담아내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결론은 그들이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는 노래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한 시도를 "고스란히 접"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혹은 내면에 집중하는 노래를 부르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과 함께 자조 섞인 웃음이 나도 모르게 픽 나오고 말았다.

모세의 노래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에 머물게 하셨다. 악한 자들이 넘쳐 나는 이 땅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공동체인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가며 살기를 원하셨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닌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요 17:14,15).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이 세상의 악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해야 한다.

모세의 노래가 그러하였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다"(출 15:1,4). 홍해를 건넌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는 바로 이 땅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이다. 눈앞의 절대 권력자를 향해 돌직구를 날리는 동시에,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노래였기 때문에, 그 노래를 부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심장은 터질 듯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페이스북에서 논란이 된 이 찬양팀의 새 앨범 노래를 잠깐 살펴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를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찬양하리" - '크신 주 찬양하리' 중에서.
"세상 속의 날 주가 붙드사 그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네" - '사랑의 노래 되리' 중에서.
"우린 할 수 없던 희생의 사랑을 따라갈 수 있나, 함께할 수 있나 세상의 소리들 우릴 흔들어도 그 사랑 우릴 인도해" - '주가 주신 사랑' 중에서.

믿는 자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날 붙드시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겠노라고, 세상의 소리가 우리를 흔들어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내용은 너무 진부하다. 이미 다른 찬양곡에도 이런 가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만큼 흔하다. 달라진 것은 결국 곡과 연주뿐이다. 가사가 추상적이고 진부하다보니 이제 음악적 테크닉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자신들을 성찰하고 연약하고 상처받은 자들과 함께 치열하게 정의를 실현하고, 실천하겠다던 의지를 읽어 내기 어려운 이유를 다만 나의 독해력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솔직히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랫말을 지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들어도 전혀 감흥이 없다. 그저 밑도 끝도 없이, 내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상업적으로 내뱉은 허공을 울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메시지다

찬양 가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혹자는 찬양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내용이어야 하며, 따라서 불의한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을 노래하는 것은 찬양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할까? 시편 150편 중에서 65편 정도가 탄원시다. 탄원시의 내용은 주로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때로는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압제하는 원수를 저주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배에서 이러한 내용을 시와 노래로 불렀고, 그것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들 모두가 찬양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설교가 현실의 아픔을 반영하지 못하고 일상의 삶과 무관한 내용으로 주를 이룬다면 그 설교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찬양도 운율이 있는 설교, 즉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다. 이 땅에서 예기치 않은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담아내고, 나아가 신앙으로 승화하는 가사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애매모호한 가사를 통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노래는 순간의 아픔을 망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온전한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다루는 처방이 있어야 하듯, 아픔의 현장에서 눈물 흘리는 이웃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만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다.

교회에 관한 노래는 어떨까? "우리는 주의 교회, 주의 사랑 함께하시네. 연약한 우리들을 주의 길로 인도해 부르신 주의 교회. 한 몸 되어 예배드릴 때 주의 뜻 보이시며 주님을 닮게 하소서." 교회는 공동체다. 가난하고 연약한,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앙 공동체다.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말하며, 예수처럼 사역하는 공동체가 교회다. 예배의 시작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교회 사역을 통해 예수의 정신이 구현되고, 예수의 사랑의 실천될 때 그 공동체의 존재 가치는 유효하다.

그들의 고백처럼 우리는 연약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 역시도 연약한 자들의 모임이니 연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보다 더 연약한 자, 더 아파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노래는 그들이 불러야 한다. 그들을 위해 불러야 한다. 연약한 자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손에 손을 잡고 부를 때, 그 노래는 결코 약하지 않다. 우리는 약할지라도 노래는 세상의 권력을 두렵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흔적 우리게 맡기신 싸움 믿음으로 사는 것"(OOO 앨범 '예수의 흔적' 중에서)이란 무슨 뜻이어야 할까? 불의한 권력이 '연약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을 때, 권력의 위협 앞에 두렵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픔의 노래'를 부를 때 받게 되는 저항이 바로 '그리스도의 흔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이 땅의 평화'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리라. 주의 뜻대로 이뤄지리"(같은 앨범, '화평케 되리' 중에서)라고 노래하려면, 교회 안팎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들을 위해 함께 울어 줘야 한다. 그때 평화는 찾아온다.

쿰바야, 주여 여기 오소서!

얼마 전 주일예배 시간에 '쿰바야'라는 노래를 불렀다. "우는 자에게 오소서. 갈라진 이 땅에 오소서. 평화를 위해 오소서." 흑인 노예들이 백인들에게 압제당할 때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에, 아무리 가사가 단순하고 음이 평범해도,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 청소년, 청년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OOO 단체에 부탁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 그곳의 한 형제로부터 답신이 왔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우리 모두 지금의 사회 구조와 민낯을 고스란히 봤습니다.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한국교회 태도에서도 그렇고요. … 그래서 그간 해 왔던 앨범 준비도 내려놓고 우리를 돌아보고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연약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예배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이런 당부를 전하고 싶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예배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들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 달라. 그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들 가운데 함께하신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을 기억하면 어떨까.

예기치 않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해 노래하고, 그들의 사연을 담아 가사를 쓰고,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자. 그러한 노래는 곧 이 땅의 불의한 권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행동이자,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선포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그런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역사 속에서 재현되는 부활을 경험하고 싶다.

전남식 / 대전 꿈이있는교회 목사·한국아나뱁티스트펠로우십(KAF)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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