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없는 은행이 문을 열었다." 장발장은행은 가난 때문에 벌금을 못 내는 이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액 시민들의 성금으로 운영된다. 종교계·학자·예술인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장발장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있는 그림을 그린 판화가 이철수 씨 역시 장발장위원이다. (장발장 홈페이지 갈무리)

작년 김 아무개 씨(32·여)는 무면허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은 김 씨에게 벌금 70만 원을 부과했다. 김 씨는 홀로 네 아이를 키우고, 식당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 왔던 터라, 손 안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기초 생활 수급자에다가 신용에도 문제가 있어 은행권 대출은 어려웠다. 김 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교도소에서 노역하는 것밖에 없었다.

백 아무개 씨(27·여)는 무고죄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세 자녀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벌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 됐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 아이는 한 달 이상을 엄마 없이 지내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처지다.

이렇게 가난 때문에 벌금을 못 내 감옥에 갈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한 시민단체가 나섰다. 지난달 25일, 인권연대는 이들에게 벌금 낼 돈을 뀌어주기 위해 민간 은행을 만들었다. 이름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을 본 따, '장발장은행'이라고 지었다.

3월 13일, 장발장은행을 찾았다. 도심 한복판에 즐비한 은행과 달리, 장발장은행은 동국대학교 앞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했다. 실내 모습도 은행보다는 평범한 회사 사무실에 가까웠다. 책이 잔뜩 꽂힌 책장들이 줄지어 서 있고, 한쪽 벽면에는 장발장은행을 보도한 신문 기사가 오려 붙여져 있었다. 보통 은행에서 볼 수 있는 ATM 기기나 창구, 돈을 보관한 금고는 보이지 않았다.

일반 은행과 다른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장발장은행은 무이자, 무담보로 최대 300만 원까지 빌려준다. 이자로 수익을 내지 않는 구조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이들에게 이자까지 얹어서 돌려받을 수야 있겠느냐는 것이다. 빌린 돈은 6개월의 거치 기간 이후 1년 안에 갚으면 된다. 기금은 오로지 시민들이 후원한 금액으로 마련된다.

하지만 신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3199위원회(대출심사위원회)가 심의해서 대출할 사람을 결정한다. 주로 가계 형편과 사정이 어렵고 부양가족이 있는 사람을 우대한다. 파렴치범이나 상습범은 제외한다. 43199위원회는 지금까지 총 3차에 걸쳐 33명에게 5,890여만 원을 대출했다. 오는 19일에는 4차 회의를 열어 추가 대출자를 선정한다.

대출심사위원회 이름을 43199위원회로 지은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43,199'는 2009년 한 해 동안 벌금을 못 내 교소도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다. 장발장은행을 만든 인권연대는 2013년부터 '43,199 캠페인'이라고 해서, 벌금을 내지 못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제도를 고칠 것을 주장해 왔다. 장발장은행도 이 캠페인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졌다. 

▲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잡힌 장발장. 19년을 감옥에서 지낸다. 장발장은 출옥하고 나서도 또다시 은식기를 훔치다 자베르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미리엘 신부가 그를 변호, 장발장의 삶은 이때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영화 '레 미제라블' 화면 갈무리)

현재 한국은 벌금을 선고받으면 30일 이내 일시불로 완납하도록 되어 있다(형법 제69조). 벌금을 못 내면 교도소에서 노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1일을 노역하면 벌금에서 5~10만 원이 차감되는 꼴이다. 현재 벌금을 못 내 노역하는 사람의 수는 일 년에 평균 4만 명이나 된다. 2014년에는 약 4만 2,000명, 2012년에는 약 3만 9,000명이 노역했다.

장발장은행 오창익 사무국장은 "국내 벌금 제도는 소득 불평등이 형벌 불평등을 낳는 구조다"고 말한다. 돈 있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벌금을 내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느끼는 형벌의 무게는 부자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낼 형편이 없는 이들은 교소도행을 선택한다. 오 국장은 유럽 국가들처럼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등으로 부여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이나 벌금 분할 납부 및 납부 기한 연장, 사회봉사 제도 확대 등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했다.

장발장은행에는 종교인, 학자, 법률가, 언론인, 예술인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협동조합 가장자리 홍세화 이사장이 은행장을,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가 고문을 맡고 있다. 이외에 18인의 장발장위원회(운영위원회)와 7인의 대출심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현재 출범한 지 한 달도 안 돼, 350여 명의 시민이 약 7,300만 원을 장발장은행에 보탰다(3월 12일 기준). 주요 언론은 많은 사람들이 장발장은행의 취지를 지지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오창익 사무국장은 대부분이 개인 후원이라면서, 시민단체나 종교 기관의 참여는 부족한 실정이라고 아쉬워했다.

후원자 명단을 보니, 오 국장의 말대로 개인 후원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종교 기관이나 단체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중 교회 이름으로 들어온 곳은 울산두레교회(구자륜 목사) 한 곳뿐이었다. 담임목사에게 후원한 이유를 물었다. 구 목사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얘기를 듣고 감동받아 그날 바로 후원했다"고 했다. 그는 "성경에도 하나님은 율법을 만들 때 약한 사람들을 배려했고, 예수님도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겼다. 교회에 여유가 있으면 앞으로 더 후원할 것이다"고 했다.

장발장위원회로 활동하는 개신교 인사들은 교회와 기독 단체가 이 운동해 참여해 달라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과 초대 한국 인권 대사를 역임한 박경서 박사는 "장발장은행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운동과 같다.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고 보살피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설립 목적에 동의하는 교회와 기독 단체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도 페이스북과 <뉴스앤조이>에 올린 글에서 더 이상 이 시대에 장발장들이 양산되어서는 안 된다며, 개신교의 관심과 참여를 구했다. (관련 기사 : 이만열 교수, "'장발장은행'에 저도 더 보태겠습니다")

* 후원 / 문의
하나은행 388-910009-23604(장발장 은행) / 02-749-9004(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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