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는 지금까지 후원해 오던 8명의 협력 선교사님들에게 금년 4월부터는 후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활발하게 우리 교회가 선교사님들을 후원해 왔는데 금년 들어서 멈추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교 헌금 작정 액수가 상당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말에 2015년 선교 헌금을 작정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2014년의 작정 액수보다 적은 액수만이 약정되었고 이러한 액수를 토대로 선교위원회가 기도하며 머리를 짜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이런 안타까운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나는 선교 헌금 작정 액수가 부족하여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었으니 선교 헌금을 추가로 작정해 줄 것을 광고 시간에 호소하였으나, 그 뒤로 의미 있는 액수의 추가 선교 헌금 작정이 들어온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 헌금을 작정해 달라고 매주 계속해서 광고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우리 교회 교우들 대부분이 마게도냐 교우들처럼(고후 8:1-2), 최선을 다해 헌금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선교 헌금 작정이 줄어든 것이 장학 헌금 때문이며, 선교 헌금으로 작정할 돈이 장학 헌금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장학 헌금은 2014년 작정 액수와 2015년 작정 액수가 크게 차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교 헌금으로 작정할 수도 있었던 액수가 장학 헌금 쪽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마도 차이를 발생시킨 심리적 요인을 찾는다면, 2014년도를 위한 작정은 선교 헌금 작정과 장학 헌금 작정을 같은 날 하지 않았으나, 2015년도를 위한 작정은 같은 날에 하였다는 점이다. 하나씩 작정할 때보다 한꺼번에 작정함으로써 우리 교우들이 심리적인 부담감을 더 많이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선교 헌금, 장학 헌금, 건축 헌금을 같은 날에 작정하게 함으로써 2015년도에 교우들이 어느 정도 재정적인 헌신을 하는지 알고 균형 있는 감각을 가지고 적절하게 헌신하게 하는 것이 따로따로 작정하게 함으로써 무조건 작정 액수만 많이 나오게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실시한 것이다. 결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선교 헌금 작정이 줄어들게 된 또 다른 심리적인 요인을 찾는다면, 2014년도에 우리 교인들에게 선교적 마인드를 강화하는 일에 어느 정도 부족했던 면이 있었다. 사실 선교 헌금은 실제적으로 선교사님들에게 후원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선교 후원 사역) 외에 교인들의 선교적 마인드를 강화하는 데(선교 동원 사역)에도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 더욱 활발해지게 되며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재정적인 헌신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선교 단체는 후원받은 선교비 중에서 대체로 20% 정도를 홍보를 위하여 사용하고 80% 정도만을 선교사님들에게 보낸다. 그러면 계속해서 후원이 늘어나게 되면서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액수도 자동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선교사님들에게 더 많이 후원하기 위해서 대부분을 선교사님들에게 보내고 홍보비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선교 후원금은 계속해서 줄어 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내에는 모금된 선교비를 오로지 선교사님들에게만 보내야 한다는 어설픈 신실함의 목소리가 크고, 결과적으로 선교 동원 사역이 약화되곤 한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2015년도 선교 헌금 작정 액수가 부족하여 2014년도에 후원하던 대로 2015년도에도 후원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담임목사로서 그리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이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선교 헌금 작정 액수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선교 후원을 줄일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힘이 들더라도 선교사님들을 위한 후원이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선교위원회에서 그리고 당회에서 피력한 바 있다. 모자라면 특별 헌금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선교 후원을 위한 바자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못한다는 말은 가장 무책임한 말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우리가 선교 규정에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기 시작했으면 적어도 3년간은 후원하는 것으로 했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후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회는 선교 후원 작정을 따라 규모를 줄여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차적으로 선교 헌금 작정을 추가로 하여 달라는 호소에도 우리 교인들은 거의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것이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정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헌금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담임목사로서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선교위원회와 당회 내에서 다른 의견들이 많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위원회에서도 그랬겠지만 당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정말 많은 고심을 하면서 논의를 했다. 한 번의 회의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기간을 두고 또 논의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지난주에 제직회 석상에서 어떤 집사님이 우리 교회가 선교 후원을 줄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였는데, 당회에서도 그 이상의 안타까움이 제시되었고 교회의 존재 목적인 복음 전파가 약화되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다.

하지만 망대를 세우는 자가 망대를 세우기 전에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고 정말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망대라 할지라도 재정적인 현실이 어려움에도 진행하여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여 온 세상의 비웃음만을 당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눅 14:28-30), 선교위원회와 당회는 눈물을 삼키며 선교 후원을 줄이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원을 중단하게 된 선교사님 중에는 내가 2014년부터 후원하자고 제안해서 한 해 동안 후원을 했던 하성 선교사님도 포함되고 말았다. 선교위원회도 그렇고 당회도 그렇고 이런 결정을 할 때 마음이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나였다. 우리가 중단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결정이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결국 교회는 한 사람의 생각으로만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고 교인의 대표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면서 결정하면서 가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게 장로교 시스템의 장점이 아닌가? 당회에서는 여러 가지 선한 이유에서 금년 한 해는 후원을 중단하기로 아프게 결정했다. 내년에는 다시 후원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일로 인하여 우리의 헌신을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원 중단 통보를 받은 선교사님들은 편지를 보내와 그동안 후원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였고 남부교회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겠다고 하였다.

사실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정의를 위해서 직접 헌신하기는 어렵다. 선교 후원도 마찬가지이다. 선교사님들을 후원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그들을 후원하기 위해 우리의 지갑을 더 여는 것은 정말 힘들다. 사실 제직회는 왜 선교사들을 후원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자리가 아니라, 후원이 부족하다 생각되면 어떻게 그 후원을 할 수 있도록 더 재정적인 헌신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는 자리이다.

교회 내에는 늘 의견의 충돌이 있다.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도 의견이 충돌이 있었다. 선교 여행 도중에 낙오했던 마가를 다음번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 때문에 두 사람은 심히 다투었다(행 15:37-41). 바울은 마가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문제 삼았던 것 같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런 마가라 할지라도 가르치고 세워서 선교에 동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각각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양립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은 갈라지고 말았다. 우리 교회 당회에서도 이번 문제로 인하여 각각 다른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서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합의점에 도달하였다. 이 합의점은 우리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환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회원들의 생각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 어떤 다른 결정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턱없이 부족한 결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결정이 문제가 아니라 과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흔히 교회 내에서는 '담임목사의 뜻' 혹은 '담임목사의 정책'이란 말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이라 생각되어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을 때 사용되곤 한다. 정작 내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말하면서 그것이 담임목사의 뜻이라 말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 말 하나면 모든 논란을 잠재워 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 한국교회는 이 말의 권위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아무리 담임목사의 뜻이나 정책이라 할지라도 정작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외면하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달갑지는 않지만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쁘지 않은 것은 사실 교회 내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담임목사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갑지 않은 것은 예전과는 정 반대로 성도들이 담임목사의 리더십마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선교에 관한 내 생각은 우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정책 결정에 관한 내 생각은 교인들의 대표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결정은 개인적으로 정말 아쉬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그 결정이 진지하지 않게 함부로 선택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가 당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더욱 헌신을 하는 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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