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죄 폐지로 우리 사회와 교계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간통죄 폐지의 근본 취지는 개인 사생활을 형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간통죄 성립 요건을 살펴보면, 남녀 간의 성적 관계를 입증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비록 간접증거로 어느 정도 효력을 나타내는 사례가 있기도 해도 대체로 기각되는 편이다. 그것으로 이혼소송은 가능할 수 있어도 간통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만큼 직접 증거를 확보하여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간통죄로 고소한 후에도 이혼의 의지가 없을 경우 당사자가 서로 합의해 고소가 취하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수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수고가 자주 무의미하게 된다. 수사력이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간통죄 폐지가 선포된 날에 전국의 나이트클럽에서 환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는 소문을 듣는다.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기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이트 가입자가 늘었다는 TV 뉴스를 보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통죄 폐지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곳은 당연히 종교계다. 특히 기독교는 일곱 번째 계명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안이라 간통죄 폐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크게 염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과연 간통죄 폐지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이 정말 기독교가 염려할 문제인가? 오히려 기회는 아닐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이끌려 왔다(요 8장). 모세의 법에 따르면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생활이지만 종교법으로 규제할 정도로 적어도 윤리와 도덕에 있어서는 공사가 크게 구분이 되지 않은 사회였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형벌을 집행할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 사랑과 용서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기 위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를 묻는다. 모세의 법대로 돌을 던지라고 하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용서하라고 한다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되어 법을 어기는 자가 되어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입장이 곤란해진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간통죄를 공법으로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가치와 관련해서는, 공사가 크게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던 사회였다. 사생활을 규제하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규범이 법과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적어도 개인의 가치를 존중히 여기는 시기에서만 가능하다. 개인과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서구 사회에서 간통죄가 진즉에 사라지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그러니까 사생활 문제라는 이유로 간통죄가 폐지되는 배경에는 국가가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간통 행위로 배우자가 받을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라도 간접적인 가정 폭력으로 여길 수 있다. 가정 폭력에 관해서는 형법에 따라 처벌받게 되어 있다. 간접적인 폭력이라고 할 경우라도 폭력의 피해자는 배우자를 간통죄로 고소했을 때 겪는 상태나 그렇지 않았을 때 겪는 상태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간통의 사실을 몰랐을 경우엔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이미 알았다고 하면 고소하든 그렇지 않든 고통의 현실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가정 폭력의 하나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법을 폐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고통은 간통죄를 입증했을 때가 아니라 이미 배우자의 외도를 짐작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간음죄를 법으로 판단하길 포기했다는 사실은 간통 행위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을 거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법으로 판단하길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 간통죄 폐지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면이 없진 않다. 겉으로 보기에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깨끗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은 궁지에 몰린 여인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구원의 가능성을 찾을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판단하여 정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간통죄 폐지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를 더욱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을 교회가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관건이겠는데, 교회는 사실 간통죄가 형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든 폐지되든 사실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경에 규정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환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이미 성경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간통죄 폐지가 비그리스도인들이 간통죄를 범할 가능성을 높여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일이다. 시민 의식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염려지만, 사실 법으로 규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간통죄는 이미 범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편, 굳이 간통죄 폐지를 교회가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국가의 법으로 규정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인가? 이것은 정교의 분리가 헌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회에서 옳지 않은 주장이다. 성경이 금한다고 해서 법으로 금해야 한다거나 성경이 금하는 것을 국가가 허락한다고 해서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국가와 종교 분리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국가가 존중해서 법으로 규정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다. 국가의 법은 종교와 다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기 때문에 간통죄 폐지를 문제 삼는 것이라면, 오히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인지하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오히려 기독교는 기독교의 논리에서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관철시켜야 한다. 사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건전한 성 문화를 정착시키고, 성 윤리 의식을 강화하며, 무너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간통죄 폐지는 오히려 기독교 고유의 가치를 드러낼 기회가 될 수 있다. 만일 모든 기독교인이 간통죄가 폐지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부부 관계의 윤리와 도덕을 충실하게 지키며 산다면, 그래서 가족이 평안하다면, 오히려 기독교의 덕목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는 관점은 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 윤리와 성 문화에 있어서 기독교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각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마저 간통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릇된 성 문화를 탐닉하며, 타락한 성 윤리를 갖고 버젓이 그리스도인으로, 심지어 목회자로 살고 있는 현질이다.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에서 배울 것이 더 이상 없다는 판단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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