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중학교 교사이자 한 교회의 서리집사인 유창수 씨가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는 5년 전에 교회에서 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2010년 1월 담임목사가 목회에 실패하고 5년간 다른 교회에 이력서를 냈다가는 떨어지고 냈다가는 떨어지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다른 교회의 담임목사와 자리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그 일 한가운데에는 돈이 있었습니다. 당회와 사무총회의 의결이라는 절차적 합법성은 충족했지만, 목사직 매매 또는 세습에 필적할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필자는 교회를 생각하며 공부하고 글을 썼습니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한 주에 두 편씩 원고를 나눠 올릴 계획입니다. -편집자 주

교회가 전도 대상자의 전도와 구원을 위해 앞에서 제시한, 전도 대상자의 상황에 맞추는 전략 ­― 돈을 주는 프로그램 ­― 을 선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는 전도 대상자의 욕구나 취미, 언어, 인간관계, 가치관 등에 있어 우선 그 대상자의 것을 존중해 주는 쪽으로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전도 대상자에게 전해 주고 싶은 본질, 곧 복음이 변질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 방법론을 채택할 때는 세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전도 대상자는 지난 세기 한국인이 대부분 그러했듯 자본주의적 가치관이나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교회는 복음적 가치관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다음 물음을 생각해 보자.

1. 전도 대상자가 가진 가치와 교회가 가진 가치는 양립 가능한 가치인가?
2. 교회의 가치를 전도 대상자에게 처음부터 노출하지 않는 것은 사기나 기만은 아닌가?
3. 교회는 언제쯤 전도 대상자에게 교회의 가치를 내밀 것인가?

먼저, 1번 질문부터 고찰해 보자. 전도 대상자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가 세속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내세보다는 현세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에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그는 십자가보다는 면류관만을 바랄 것이고, 구원보다는 돈에만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관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아니, 정반대이어야 한다. 곧, 교회는 현세보다는 내세를,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면류관보다는 십자가를, 그리고 돈보다는 구원을 먼저 강조하거나 내세워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이다. 적어도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양립하거나 공존할 수 없는 상충적 가치이다. 결국, 교회는 영혼을 구원한다는 미명 아래, 찰스 피니 식으로 말한다면 '성육신'의 미명 아래, 교회 자신의 가치를 뒤로하고, 전도 대상자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교회 공동체에 반교회적, 비교회적 가치관이 썰물처럼 밀려들게 된다. 이 양립할 수 없는 상충적 가치의 충돌에서 교회는 좋게 말하면 양보를 한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굴복을 한 것이다. 이 양보나 굴복에는 '영혼 구원'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가치를 상실한 교회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하고도 변질된 교회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제 2번 질문에 대해 고찰해 보자. 마크 트웨인은 <거짓말에 관하여>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오히려 남에게 유익을 주는 거짓말을 옹호하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이 주장은 거짓말이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대상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고, 그 거짓말을 하는 주체가 상황을 끝까지 통제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크 트웨인이 옹호한 거짓말이 그런 제한된 가치가 있다 치더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아무리 선한 목적도 그 수단과 방법이 선하지 않다면, 결코 선하지 않다. 만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이슬람교의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아라!' 만큼 효과적이고도 가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다면, 차라리 거짓말이 아닌, 칼이나 총을 내미는 것이 그 효과성에 있어서는 아주 딱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칼로 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금 순서가 바뀐 면이 있지만, 여기서 2번 질문에서 제기한 것이 정말 사기나 기만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교회가 그들의 가치를 숨긴 채, 먼저 전도 대상자가 좋아하는 것만을 교회에서 주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사기나 기만에 속할까? 그것은 당연히 사기나 기만에 속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결국 자기의 가치를 전하겠다는 목적을 애당초부터 갖고 있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도 대상자에게 그 가치를 감춘 채 접근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한다.

만일 교회가 전도 대상자가 원하는 것만을 우리 주님이 올 때까지 계속 가르치고 전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기나 기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교회는 사기나 기만을 저지르지 않는 대신,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사람은 기름 외에는 어떤 액체도 먹으려 들지 않는다. 결국 이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을 주면서 여기 물이 있으니 당신은 이 물을 먹어야 산다고 외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을 뒤로 숨긴 채,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기름을 어느 순간까지 주다가 물을 먹이는 방법이다.

교회가 그들의 가치를 숨긴 채 전도 대상자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며 다가서는 방법론은, 후자에 해당한다.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사람이 기름 외에는 어떤 액체도 먹지 않는다 하여 그에게 기름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기나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인 3번 질문을 고찰해 보자. 조금 전 다룬 예화에 나오는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사람에게 기름을 먹이기 시작했다면, 과연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언제까지 기름을 먹이다가 언제부터 생수를 공급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액체라고는 오직 기름만 먹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에게 과연 언제쯤 기름 대신 생수를 주면 그 생수를 받아먹게 될까? 그 결정적 시기, 곧 절묘한 타이밍은 누가 포착하게 되는 것일까? 포착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결코 그 타이밍은 포착할 수 없다. 기름 외에는 어떤 액체도 마시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을 살린다는 미명 아래 누군가 기름을 주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계속 더 많은 양의 기름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그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그 기름병을 빼앗게 될 것이다. 그를 살리겠다는 선한 의도도 그 타이밍의 문제와 전도 대상자의 관성의 문제에 봉착해 결코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는 생수가 있던 공동체마저 온통 기름 냄새와 기름 찌꺼기가 범벅이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또한, 물이 아닌 기름을 주는 행동과 습관이 계속되면서 생수를 마시던 사람들마저 오히려 기름을 마시는 사람들로 변화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리더들은 그 기름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생수가 아닌 기름을 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기름을 향해 그들의 삶의 방향을 잡아 가는 치명적인 오류를 발생시킬 것이다. 심지어는 아직 변화되지 않아 기름을 먹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기구에 동참하면서 그 공동체 자체의 정체성, 곧 물을 먹게 해 사람을 살리겠다는 목적성마저 상실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계속)

 

 

차례

1부

제1장 : 자본은 흐른다
제2장 : 교회는 왜 자본과 손을 잡았을까?
제3장 : 교회는 어떻게 자본을 뿌리는가? (돈을 주는 프로그램)
제4장 : 교회는 왜 자본을 벌어들이는가? (돈을 버는 수익 사업)
제5장 : 한국 교회는 자본의 포로가 되었다 - 교회 거래(매매, 세습, 교환)
제6장 : 출자본기(자본으로부터의 탈출)

2부

1. 기름을 주는 오아시스 마을
2. 예술을 사랑한 남자
3. 솔로몬은 딴 마음은 없었다
4. 내가 쓰는 출자본기

 

 

유창수 / 한 교회의 서리집사, 공립 중학교의 국어 교사, 1급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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