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중학교 교사이자 한 교회의 서리집사인 유창수 씨가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는 5년 전에 교회에서 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2010년 1월 담임목사가 목회에 실패하고 5년간 다른 교회에 이력서를 냈다가는 떨어지고 냈다가는 떨어지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다른 교회의 담임목사와 자리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그 일 한가운데에는 돈이 있었습니다. 당회와 사무총회의 의결이라는 절차적 합법성은 충족했지만, 목사직 매매 또는 세습에 필적할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필자는 교회를 생각하며 공부하고 글을 썼습니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한 주에 두 편씩 원고를 나눠 올릴 계획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는 어떤 마음이나 생각, 사상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매체나 방법을 필요로 한다. 의사소통 이론을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생각을 전하기 위해 문자라는 매체를 사용하고, 글쓰기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필자나 화자는 누구나 자신이 지닌 마음이나 생각, 사상 등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그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론을 생각하게 된다. 그 방법론이라는 것이 바로 지난 세기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을 휩쓸고 있는 독자 중심 이론, 청자 중심 이론, 의미 이론, 수용 이론, 의사소통 이론, 각종 화법 이론, 매스컴론, 마켓팅론 등이다. 이런 것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필자나 화자가 아닌, 독자 또는 청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필자나 화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보다는 독자나 청자가 무엇을 읽거나 듣고 싶은가에 모든 관심과 노력이 집중되어 있는 셈이다.

칸트의 화법을 빌리면, 독자나 청자가 들어야 하는 것보다는 듣고 싶은 것만을 쓰거나 말하는 것이다. 찰스 피니의 화법을 빌리면, 교회의 경우 복음의 핵심이나 본질보다는 그것을 전하는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학 당의정설'을 인용하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그것을 감추는 달콤한 초콜릿 코팅이 있어야 그 약을 환자에게 먹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업가들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신조를 버리고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라는 신조에 의해 소비자의 눈높이를 연구하고 그 눈높이에 자신의 기업을 맞추는 행태로 전환한 것 또한 독자나 청자 중심 사례의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이 그의 연인에게 선물을 할 때, 선물도 중요하지만, 연인이 좋아하는 색깔이나 디자인의 포장지를 고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그 모든 영역에서 독자·청자·소비자·유권자 중심의 원리가 지난 세기 우리를 익사 직전까지 몰고 갈 때, 교회 역시 그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교회는 하나님도 중요했지만, 그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인간도 중요해졌다. 교회에게 복음도 중요했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일 인간이 좋아하는 방법을 찾는 일도 중요해졌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절대주의적 가치관이 상대주의적 가치관으로 옷을 갈아입고,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그 색깔이 변질될 때, 각종 학문과 이념·이론 등은 교회에 그 칼을 들이밀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보다는 구원받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그 복음을 받아들일 인간의 상황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하기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인간, 복음과 인간의 상황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랴?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구원의 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 배려와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구원받을 대상으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갖고 존중하며 이해를 시도한 이들의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노력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배려의 과정에서 한 가지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사실을 교회가 놓쳤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회가 방법론에 관심을 두면서, 교회가 가진 그 본질적 메시지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독자나 청자 중심의 사조에 교회가 발을 들여 놓았을 때, 한 가지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것은, 독자나 청자로서의 인간이 과연 선한 것, 가치 있는 것, 생명 있는 것을 언제나 누구나 원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학당의정설에서는, 문학이란 의미 있는 것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재미로 포장을 한다고 말한다. 곧, 쓴 약을 먹일 때 단 초콜릿을 포장하듯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한 나머지, 그 쓴 약을 먹어야 할 인간이, 그 쓴 약은 쏙 빼 놓고 달콤한 초콜릿만 먹는 결과가 온 것이다. 인간은 본래 쓴 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단 초콜릿에만 관심 있는 인간에게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욕구를 존중하고 그들의 상황에 맞춰 교회가 접근할 때, 인간은 복음은 쏙 빼 놓고 교회가 동원한 방법론의 열매만 빼 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당뇨병에 걸린 환자에게 쓴 약을 먹이기 위해 초콜릿을 코팅한 셈이다. 당뇨 환자는 그동안 당뇨약 가운데 초콜릿만 쪽 핥아 먹고 실상 당뇨약은 전혀 먹지 않은 것이다. 의사는 당뇨 환자가 당뇨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된다. 곧 교회가 인간을 이해할 때, 인간의 죄성이나 타락에서 오는 반복음적 쾌락이나 열매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뇨 환자가 초콜릿을 원하면 우선 그 초콜릿을 줘 유인해 당뇨약을 먹이겠다는 의사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회도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성과 타락의 모습을 지닌 인간이 원하는 방법으로 우선 그들을 유인한 뒤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그들이 그 쾌락적인 유인책만 쏙 빼 먹고 복음은 외면한 죄인으로 계속 교회에 남는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당뇨로 입원한 환자들이 매일 초콜릿만 핥아 먹어 당뇨 환자가 병원에 가득 찬 것처럼, 쾌락적 열매에 유인되어 교회에 들어온 인간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가득 차 그 수적인 부흥만을 일삼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전도의 대상으로 정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입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어쩌면 단 한 가지에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교회는 그들의 선교와 전도, 양육과 제자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사람들에게 돈으로 접근했다. 왜냐하면, 구원의 대상인 인간의 상황, 인간의 욕구, 인간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해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돈을 전도나 선교의 방법론으로 활용하는 것만큼 지혜롭고도 현명한 방법은 있을 수 없었다.

의도를 갖고 전략적으로 그렇게 했든,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 세상 풍조를 따라 가다 보니 그렇게 했든 간에, 한국 교회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채, 당당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명분을 향해 돈과 함께 나아갔다. 교회는 부자가 되는 법, 축복을 받는 법, 성공하는 법이 교회에 있다고 전했다. 부자, 축복, 성공은 결국 그 뿌리에 돈을 품고 있었다. 교회가 제시한 것은 '복음이 곧 돈이다'라는 것이었다.

교회에 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전했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도 전했으며 성공할 수 있다고도 전했다. 크고 휘황찬란한 교회의 건물을 통해 안락하고 평안한 돈의 맛과 위력에 대해서도 전했다. 심지어는 돈을 벌어야, 부자가 되어야, 성공을 해야, 대형 교회를 지어야 믿음이 있다는 것도 전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은 틀린 것이었다. 반이 틀린 것은 진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싶었고 교회는 그것을 이용해 교회의 문을 열어젖히고 사람들을 모았으며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교회에 가득 찼다.

양적인 부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많이 너무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보다는 돈을 사랑했으며 하나님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리더가 되자 이젠 교회가 내놓고 돈을 좇기 시작했다. 돈을 잘 버는 개인이 축복받은 것이고 믿음이 큰 것이라는 명제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돈을 잘 버는 교회가 축복받은 것이고, 믿음이 큰 교회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앞으로 살펴볼 돈을 뿌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 돈을 주는 방법은 어린이는 물론 성인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고도 치밀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돈을 주는 각종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단계를 지난 후에는, 교회 스스로가 돈을 버는 수익 사업을 시작했다. 그 수익 사업의 성패와 축복, 그리고 믿음을 연계해 그들의 아버지께 기도하며 믿음이 큰 교회인 듯 나아갔다. 교회에는 돈을 주는 프로그램과 돈을 받는 수익 사업이 공존하게 되었고, 이런 교회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회개도 없었다. 오직 돈과 연관되는 성공과 축복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성공하는 법, 부자가 되는 법, 축복을 받는 법에 국한되게 되었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기보다는 특정 기득권자에게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 순종의 주된 요청은 헌금이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헌금은 물론, 새로운 명칭의 헌금들이 연이어 발굴되었다. 일천번제, 씨앗 헌금, 벽돌 헌금이나 한 평 헌금 등의 이름으로 둔갑한 건축 헌금, 만사 헌금, 오병이어 헌금,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 부자 청년 헌금, 사르밧 과부 헌금 등 이루 그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의 새로운 헌금이 생겼다. 교회는 돈을 주는 프로그램과 돈을 버는 수익 사업, 그리고 기득권층에 대한 순종과 헌금을 통한 축복과 성공의 매커니즘을 열정적으로 선포해 나갔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 왜 교회는 전도와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욕구를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받아들인 것일까?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래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돈이든 성공이든 간에 그것을 발판 삼아, 미끼 삼아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 아니면, 교회 스스로도 복음의 가치를 갖지 못한 채 자본의 가치를 좇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에서 이런 문제의 실상을 생각해 보고, 자본이 교회의 여러 영역에 얼마나 심각하게 침투되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자본의 극복 내지는 탈자본의 방향성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계속)

유창수 / 한 교회의 서리집사, 공립 중학교의 국어 교사, 1급 시각장애인

차례

1부

제1장 : 자본은 흐른다
제2장 : 교회는 왜 자본과 손을 잡았을까?
제3장 : 교회는 어떻게 자본을 뿌리는가? (돈을 주는 프로그램)
제4장 : 교회는 왜 자본을 벌어들이는가? (돈을 버는 수익 사업)
제5장 : 한국 교회는 자본의 포로가 되었다 - 교회 거래(매매, 세습, 교환)
제6장 : 출자본기(자본으로부터의 탈출)

2부

1. 기름을 주는 오아시스 마을
2. 예술을 사랑한 남자
3. 솔로몬은 딴 마음은 없었다
4. 내가 쓰는 출자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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