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남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해 나갈까 고민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결정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 앞에 걸어 놓는 '새해 표어' 같은 것을 만들지 않기로 한 것도 나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지금까지 나는 목회를 해 오면서 새해가 될 때마다 새해 표어를 만들곤 했었지만, 이젠 표어 없이 가 보기로 했다. 굳이 표어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표어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불편한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새해가 되면 새로운 표어와 함께 온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달려 나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교회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오히려 멋진 표어를 가진 교회를 보면 옆에서 축복해 주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표어 없이 지내는 것도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해 보았다. 우선, 표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어를 잘 만들고 그래서 온 교우가 표어를 기억하며 함께 협력해서 교회가 잘된다(?)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잘되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은 표어를 잘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표어를 잘 만들어도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표어를 만드는 것이 혹시 목회자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표어가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곳은 북한 땅이다. 이런저런 자극적인 표어는 북한의 인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정해 준 목표를 보고 뛰게 하는 것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표어의 숫자는 줄어들고, 표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단체의 이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권이다. 혹시 표어라는 것이 목회자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성도들을 몰아넣는 방식은 아닐까?

사실 우리에겐 성경 한 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길 원하는 것이고, 이것은 매년 바뀌는 표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분명한 이유를 항상 기억하는 것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서로 돕는 것이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던 모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모세는 가장 짧은 최단 코스의 길을 선택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진하였을 뿐이다. 결국 그 길은 40년이 걸렸다.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사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광야에서 그런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행을 하면 가는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을 최상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해서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을 기념하는 '인증샷'을 찍고서는 금방 또다시 돌아가 버리는데, 어쩌면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다.

성경에서 뽑아낸 구절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반성경적일 수 있음을 아는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다가온 마귀는 정확하게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었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에서 뽑아낸 성경 구절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게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표어도 성경에서 뽑아낸다. 그렇지만 만일 잘못된 동기와 욕망이 반영된다면 그것 또한 성경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성경의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번제와 희생 제물을 드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번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된 인간의 욕망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나의 뜻대로 살아가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신앙의 원리를 말하면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를 말했다. 성경 어느 한 구절만을 뽑아서 그것에 따라 신앙생활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통전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표어가 없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려는 훈련의 길을 다 함께 걸어가고 싶다.

물론 표어를 잘 만들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며 헌신하려는 노력들을 하는 여러 다른 교회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지지를 보낸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 온 교우가 한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표어를 만들지 않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고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늘 해 왔던 방식대로만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넓혀 가는데 중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와 다르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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