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을 읽을 때 일반적인 독자가 갖는 의문은 '창조의 기간'과 '아담의 실체'(즉, 전통적으로는 역사적 실체로서 한 개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문자적 해석(literalism)과 상징적 해석의 대립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문자적 해석이라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단어와 문장이 말하는 표면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해석이라는 말은 문자적 해석의 반대말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많은 논의를 그러한 표현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나는 오히려 문맥적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 <아담의 진화> / 피터 엔즈 지음 / 장가람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펴냄 / 359쪽 / 2만 원

내가 다른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유명한 구약학자들 가운데서 존 월튼(John Walton)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고대 근동의 문맥에서 살피고, 이번에 살피려고 하는 피터 엔즈(Peter Enns)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구약 정경 완성의 동기와 예수 당시의 유대교적 입장에서 살피려고 한다. 사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창조 이야기를 읽고 있다. 우리(적어도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시대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 해석으로 과학을 이해하려는 창조과학과 긴 우주의 역사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이해하려는 두 가지 관점이 주류를 이룬다.

피터 엔즈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로 오래 봉직해 있다가 그의 오래전 저작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의 영감설>(CLC)이 뒤늦게 파문을 일으키면서 그 학교에서 퇴출되었고 본서는 그 후에 엔즈가 쓴 뜨거운 토론을 이끌어 가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엔즈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그는 아담(의 범죄)을 '보편적 죄악'의 기원보다는 이스라엘(의 반항적 성향)의 원형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창세기의 아담(제1장)은 이스라엘의 자의식의 투영이며, 바울의 아담(제2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지혜의 이야기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의 독자들 혹은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담의 역사성보다는 아담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 속에서 독서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엔즈의 책, <아담의 진화>는 '아담이 진화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담에 대한 관점이 진화되었다'는 의미다. 유럽보다는 미국(심지어 한국)의 독자들에게 아담의 '역사성' 논란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 이후로 도입된 창조과학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해석의 한 축을 구성하였고 요즘에 와서야 비로소 유신론적 진화론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엔즈는 아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지만, 아담에 대한 관점이 진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논의가 그 과정 중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축에 있는 사람(들)은 창세기 1~3장의 저자가 아니라, 사실은 바울로 대변되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다. 바울의 아담관은 문자주의를 지향하는가, 아니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망에 이르렀고 예수의 순종으로 생명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처럼, 예수도 역사적 실체(개인)이니 아담도 당연히 역사적 실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담이 처음으로 불순종으로 인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째서 예수가 성육신을 하여 속죄 행위를 해야 했다는 말인가. 저자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입장을 보수하거나 회귀할 게 아니라, 창세기와 바울의 견해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부: 창세기의 아담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로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59쪽). 저자는 창세기가 모세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들에 대한 논증을 제시하면서,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의 늦은 연대를 제안하면서("…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나 완성된 작품", 97쪽) 바벨론 유수와 그에 따르는 이스라엘의 자기 인식에 대해서 논의한다. 국가적 재난과 포로적 정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아울러 희망)을 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관점과 노력이 구약 전반과 창세기 1~3장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는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은 교회가 신학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문서"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예수도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본문을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종말론적으로' 이해했다고 보는데, 엔즈와 같은 사람들은 구약의 본문의 시각과 예수의 시각이 원래부터 불일치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저자의 '이스라엘 인접 국가들의 기원 이야기들'(3장)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이전 서평(서평 바로 가기: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364)이나 비일의 <성전신학>을 참조하라.

마지막으로 저자는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룬다. 어떤 저술(예, 희년서)은 아담의 기원을 이스라엘의 기원으로 이해하였다. 사실 아담의 불순종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신명기)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아담의 에덴은 제사장과 성막과 성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지어 아담의 추방은 이스라엘의 추방의 유비로도 이해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세상의 창조와 성전(소)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계시록 속에서 세상 종말과 회복의 유비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2부: 바울의 아담

엔즈의 바울의 아담에 대한 논의는 구약에서 아담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진노와 심판이 아담의 범죄라고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관심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범죄나 광야 세대이거나 가나안 세대이거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범했던 반역과 범죄와 우상숭배에 있었다. 이방 민족들의 자신들의 윤리적 범죄나 이스라엘과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이 말은 구약도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류의 보편적 범죄와 불의함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밖에 없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끊을 수 없는 죄의 성향이 육체적으로 유전된다고 믿었다. 엔즈는 아담 이야기를 잠언적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생명을 얻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는 생명을 얻으니, 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나온다. 그러한 면에서 아담은 불순종하는 자들의 선례이자 전형이다.

바울은 과연 구약을 '문자적으로만' 읽었는가? 바울을 이해하려면 당대의 유대인들의 해석 방법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 바울의 해석학의 특징은 기독론적 해석에 있는 것이지, 인류의 기원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은 아니다. 저자는 바울이 과연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사람들과 저술들에서 태초의 아담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양하게 해석하고 이해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바울이 아담 이야기만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혹은 바울의 구약 해석 방법론이 보여주듯이, 죄의 기원에 대한 그러한 해석(문자적)과 다른 해석(상징적, 예표적, 혹은 기독론적)을 구분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면 예수의 역사성은 아담의 상징성과 연관 지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와 관련해서는 복음서나 서신서의 저자들이 실제로 예수의 역사적 실체와 동행하거나 동시대에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아담에 대한 상징적 이해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의인은 없다"는 주장은 구약 본문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바울은 이 본문을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 즉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에 대한 온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을 언급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이신 것이며, 심지어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더라도 (하나님의 보편적 진노의 논리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혈통적 혹은 고유의 특징만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류의 보편성은 아담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들의 보편성에서 추구되며(롬 4:17)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혈통과 할례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반역의 씨앗은 아담(보편적이지만 특수한 개인)에게서, 구원의 씨앗은 아브라함(특수하지만 보편적인 개인)에게서 찾는다. 그래서 이러한 논의는 구약적 문맥과 유대교적 문맥과 기독론적 문맥에서 복잡하게 엉켜 있다.

결론을 내려 보자. 결국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이 모든 논란은 문자주의의 논란으로 돌아간다. 원죄론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도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했는가? 아니다. 이점은 문자주의를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원죄론자들에게도 '혼란'을 야기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약 본문에 대한 신약시대의 사람들의 해석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의 대부분은 고대 본문들의 본래 의미와 모호한 점에 대한 해명 혹은 당대에 필요한 입장에 대한 확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엔즈는 저술 내내 여러 가지 증거들과 논증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높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 확실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유비(類比)가 내포하고 있는 약점일 것이다. 과연 구약의 대부분의 저술이 바벨론 포로 시대의 저작이며 당시의 상황을 깊게 반영하는가? 이것은 적어도 엔즈의 주장만으로는 설득적이지 못하다. 이와 같은 필자의 평가는 엔즈의 책을 읽어 보면 쉽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엔즈가 잘 설명하듯이, 아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와 잠언 그리고 심지어 초기 유대교 문헌과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더라도 엔즈와 같은 '거꾸로 읽기'가 전가보도(傳家寶刀)로 사용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양자 사이의 유사성은 무조건적으로 '후대 저작의 증거'인가?

이러한 논의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아마 여전히 그럴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최근의 논의들을 서평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수천 년간 신앙의 공동체들이 지켜 왔고 수행하여 왔던 중요한 일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탐구하고 논의하고 적용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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