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월튼(John Walton)과 피터 엔즈(Peter Enns)는 창세기(창조 부분) 해석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존 월튼은 창세기를 원청중(original audience)을 고려하는 고대 근동의 배경 가운데 읽고 있고, 피터 엔즈는 예수와 바울로 대표되는 신약의 청중을 고려하는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고 있다. 이들이 열어 놓은 창조에 대한 최근 해석은 계속적인 연구서들의 등장을 통하여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 / 존 H. 월튼 지음 / 김인철 옮김 / 그리심 펴냄 / 251쪽 / 1만 3,000원

이 뿐만 아니라, 이 창조 부분은 문자주의(literalism)에 기반을 둔 창조과학적 관점과 긴 지구의 생성 연대를 전제로 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적 관점을 두고 논란에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헤르만 바빙크와 루이스 벌코프 등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제외한, 유명한 구 프린스턴 조직신학자들이 유신론적 진화론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창조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의 논란은 그 역사가 깊다.

본서는, 소제목이 말해 주듯이, '고대 우주론과 기원에 관한 논쟁'이다1. 저자는 창세기 1장이 물질 기원의 서술이 아니라, 우주의 기능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도 경험하듯이, 문맥을 떠나서는 그 어떤 단어나 심지어 문장도 바르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것은 19세기의 범(pan)바벨론주의처럼 "성서가 바벨론 문명을 전부 베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문맥 속에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적절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서는 이 원칙도 창세기 1장의 연구에서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대 근동적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의 건축과 왕의 등극에 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과 즉위"(창 1장)와 상응하게 "세상의 왕인 사람들과 그들의 거주처를 만드는 것"이 창세기 2장의 주요 골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물질적 창조에 대한 논란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유의 책들은 일반적으로 성경 장절로 주해하고 설명하고 논박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본서는 18개의 명제와 그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진행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가 제기하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1장은 고대 우주론이다. 2) 고대 우주론은 기능 지향적이다. 3) '창조하다'는, 기능들에 관한 것이다. 4) 창세기 1장의 시작 상태는 무기능적이다. 5) 창세기 1장의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기능들을 앉힌다. 6) 창세기 1장의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기능자들을 세운다. 7) 신은 신전에서 안식한다. 8) 우주는 성전이다. 9) 창세기 1장의 7일은 우주 성전의 낙성식과 관계있다. 10) 창세기 1장의 7일은 물질의 기원과는 관계없다. 11) '기능적 우주 성전'은 표면 가치의 주석을 제공한다. 12) 창세기 1장에 대한 다른 이론들은 지나치게 충분치 않다. 13) 과학과 성경의 기원 기사에 대한 차이는 본질상 형이상학적이다. 14) 창조주와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차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다. 15) 지적 설계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목적에 관한 것이다. 16)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들은 목적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있고 부당한 것이 아니다. 17) 창세기 1장의 이 견해로 인한 신학은 약한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다. 18) 공공 과학 교육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

창세기 1장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고대 근동의 창조에 대한 '서술' 장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다신론적 관점이 아니라, 유신론적 관점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술의 목적이 기능적(functional)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은 물질의 기원, 즉 심지어 세상 제작의 물리적 과정('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셨는가?')을 설명하지 않고 세상이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기능적 존재론'이다. 즉 "질서 정연한 세계 안의 역할이나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39쪽). 이와 같이 작동하는 고대 근동의 기능적 창조 이야기의 일관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기능적 창조를 증명하기 위해 신적 창조에만 사용되는 '바라'라는 동사의 용례를 살펴보고 '태초'의 상태와 창조의 진행 과정과의 상태를 대조하고 창조 6일의 전반 3일과 후반 3일의 구조의 기능을 살펴본다.

앞서 말한 대로, 고대 근동의 문맥에서 창조는 신전 건축의 목적을 지향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6일 창조 후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7일째에 안식하셨을까? 어째서 세상 창조의 끝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귀결되는가? 고대 근동에서 우주 창조는 신전 창조의 전제(前提)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면, 인간의 안식과 관련하여 그냥 비활성 혹은 휴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노동에서 풀려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6일간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 했다.

그러나 시 132:7-8, 13-14에 보면, 하나님의 안식처는 하나님의 성전과 보좌 위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그곳에서 안식하시는가? 하나님이 성전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말은 신적 통치의 안정성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신 12:10의 경우, 이스라엘에게 주는 안식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쉬는 것이다. "들어가서 쉬는 것"은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다. 본서의 내용을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는 말이다. 아담은 에덴이라는 정원(garden)이자 거대한 집으로 인도된다. 하나님은 '에덴'에서만 사람들과 대화하시고 만나신다.

신기하게도 왈튼이나 엔즈나 바울의 로마서 5:12의 해석에 관한 문제에서 만난다. 바울은 어째서 아담의 불순종 이후에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하는가? 과연 바울은 총체적인 죽음의 기원을 아담의 불순종으로 잡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의 모든 동물이 식물만 먹고 동물을 잡아먹지 못하게 하셨는가? 사람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세포의 죽음이나 노화나 살고 죽음과 퇴보가 없었다는 말인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자연적인 메커니즘으로서의 생명체(세포나 삶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이며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단절로 인한 죽음의 도입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한마디만 추가하고자 한다. 본서는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고 번역상 거칠고 완벽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창조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의 여정까지도 중요한 도전을 주는 저작임에 틀림이 없다. 독자들의 일독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각주1] 좀 더 학술적으로 이 논의를 이해하려면 <Genesis One as Ancient Cosmology>(John Walton, Winona Lake: Eisenbrauns, 2011)를 참조하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