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왕은 다윗 앞에서 소리 높여 울었다. 자신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찾아갔건만 정작 다윗은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사울은 다윗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것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멈추게 한 것은 다윗의 용서였다. 다윗 옆에 있던 사람들은 다윗에게 지금 사울을 죽여야만 사울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삼상 24:4),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행동이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사울을 멈추게 만들었다. 사울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온 세상을 장님으로 만들 것"이라고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복수는 복수를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키며, 복수를 멈추게 하는 것은 오직 용서뿐이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가 있다면 바로 다윗과 같은 태도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사상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이 세상의 법칙이 무엇인가?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권력이나 돈으로 위세를 떨쳐야 내가 무시당하지 않고 그나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해 주라고 가르쳐 주셨다(마 5:39-41).

물론 사울의 회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이 숨어 있던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삼상 26:2). 우리의 죄성(罪性)은 너무나도 강해서 단 한 번의 처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집트 왕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겠다고 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그 말을 번복하고 또 번복한 것처럼, 우리들은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짓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는 일이 필요하다(고전 15:31).

하지만 사울을 일시적이라도 멈추게 한 것은 다윗의 용서였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행동할 때, 이 세상은 감동을 받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살지 않고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어 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심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성도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바라볼 때, 자신들과 다른 점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기에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때로는 오히려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보다도 더 악랄한 모습을 보이는 성도에게서 심한 악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듣게 된 뉴스는 바로 우리 한국 크리스천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다. 회사원들에게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로 나갈 것을 열심히 권유하던 어떤 장로 사장님이 회사원들이 노조에 가입하고 단체교섭을 시작하자 갑작스레 사업장을 폐쇄하는 것으로 맞서 일자리를 빼앗아 버렸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또 어떤 장로님은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에 교회 성도가 차량을 무단으로 세운 것을 항의하여 견인시켜 버린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구청에 민원을 넣어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을 없애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뉴스도 듣게 되었다.

물론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들으면 안 될 것이고, 당사자들의 해명을 들어 볼 필요가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성도들이 양보하고 용서하고 손해 보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이 세상을 제압하려 들려 하고 조그마한 힘이 있으면 '갑질'하려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 이래서는 우리가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주일학교가 줄어 간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동을 주는 삶을 살지 못하는 점이다. 아니 교회 안에서조차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입으로는 주일학교와 젊은이들의 부흥을 염원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으로는 어른들의 갑질로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내쫓고 있으며 교회에 대한 반감만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왜 우리는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면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손해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첫째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다(마 5:43-44).

둘째로,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12:19).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원수를 사랑해야 세상이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도 원수였던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이다(롬 5:7-10). 하나님께서 해를 선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람에게도 비추어주시기 때문에(마 5:45), 악인이며 불의한 사람인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있음을 이 세상으로 알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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