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교회 속 공동체주의

필자는 25살 청년이다. 그런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공동체'다. 새로운 것만 하려고 하면, '공동체 파괴'를 운운하고는 한다.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리한 희생도 강요하고는 한다. 공동체의 질서가 교회에서는 이미 제일 중요해졌다.

어떤 일을 해도, 공동체주의를 말한다. 얼마 전, 필자가 셀 모임의 리더로 지원했을 때, 새롭게 하고 싶은 시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얘기를 들은 목회자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주제로든 토론하지 말 것. 둘째, 잘못된 것이 있어도 고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

이 비정상적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공동체가 새로운 시도를 할 경우에, 지금까지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공동체주의를 보면서 바리새파의 모습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교회 속 예수의 빈자리에 바리새파들이 가득하다.

예수를 대신한 바리새파들의 모임

'바리새파'라고 할 때, '바리새'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바리새파는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윤리적이며 정의감이 넘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파는 많은 대중들로부터 존경받았다.

바리새파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지켰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유대인의 길을 만들었다. 그 세세한 율법은 자부요, 의무였다. 그 율법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는 바리새파의 자긍심이었다. 세상과 분리됐기 때문이다.

반면 죄인들은 변두리에 있었다. 죄인은 유대 공동체 법칙에 따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죄인 가운데는 만지기만 해도, 죄를 짓는 것으로 치부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그들은 변방으로 소외됐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변방에서 소외된 작은 사람들을 하나님나라의 중심에 서게 하셨다. 예수님은 밥까지도 죄인과 함께 먹었다. 고상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민족과 현실에 대해 담소할 때 예수께서는 저주의 상징인 환자, 불온한 창녀, 매국노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셨다.

예수는 죄인들과의 '천박한 식사'로 상식을 뒤집었다. 그 식사는 예수를 '천박한 혁명가'로 여기기에 충분한 요건이었다. 예수님은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나님 사랑이 닿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엎어 치웠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에 바리새파는 분노한다. 모든 것을 참고 헌신한, 유대계 공동체에 대한 파괴였다. 유대인 공동체는 당연 토라를 지켜야 했다. 그것을 지키지 않은 이들과 율법을 철저히 지킨 본인들이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바리새파들은 예수님이 공동체 윤리를 파괴했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이 깨부숴 버린 '공동체주의'는 바리새파에게 목숨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더 중시하신 일은, 그 '공동체주의' 안에서 죄인인 이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율법에 목숨을 걸던 바리새파들과 달리 예수님이 목숨을 거셨던 것은 '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닮은 이들의 모임을 지항하며

나는 오늘날 교회를 보며, 정말 예수가 역사하시는 교회인지에 대한 의문이 강해졌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과연 교회 공동체 내에 있는지가 확신이 없다. "예수는 없다"라고 외치던 한 진보 신학자의 외침이 뇌리를 스친다.

교회는 바리새파처럼 분리하고 있다. 그들이 목숨을 거는 것은 교회 '공동체'다. 공동체 윤리를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깊이가 갈린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충성하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 바리새파들이 과거 공동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듯이 말이다.

공동체가 말하는 여러 규율을 못 지킨 이들을 미워한다. 셀 모임, 봉사 등이 그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없는 율법주의만이 교회에 남았다. 심지어 청년들이 보는 신앙의 잣대까지도 공동체 윤리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인식하고 있다. 얼마나 교회 모임에 참여를 잘하는가, 선교 여행을 몇 번을 다녀왔는가, 목회자 말을 얼마나 잘 듣느냐 등이 그것이다.

나는 교회에서의 수고와 헌신을 모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존중받고 사랑받는 데 있어서, 그리고 한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 특별한 것보다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면, 공동체 윤리를 철저히 못 지키는 이들까지도 혈루증 여인에게 "딸아"라고 이야기 했듯이, "너희도 내가 너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말씀하실 것이 확실하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닮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공동체 윤리를 못 지키더라도, 예수님이 애끓게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 세상 속에서는 '평범한 이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너무 귀한 그 '한 사람'을 존중하는 그런 공동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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