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면서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두 영화가 개봉되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고무적인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보는 시각에서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다.

영화가 신학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나 적어도 신학적인 성찰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신학적인 내용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신학적이다' 라고 말할 때, 이는 그것이 특정한 신학자의 주장과 관련되어 있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과 행위 그리고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 영화 제작에 있어서 신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함은 영화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도, 특히 내용이 신학적인 주제의식을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중심적인 주제가 교회 비판일 때, 그 비판은 교회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당화된 비판이어야 한다. 만일 비신학적인 성찰과 비신학적으로 정당화된 비판이 될 경우는 결코 교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며 수용될 수도 없다. <쿼바디스>와 <제자 옥한흠>은 내용이 다르긴 해도 공통되는 점은 최종적으로 교회 비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각각의 내용을 살펴본 후에 영화를 통한 교회 비판의 방식에 대해 고찰해 보자.

2. <쿼바디스>(김재환 감독, 다큐, 15세, 2014)
한국교회의 모델은 민중교회를 제외하면 신학자의 연구를 통해 탐구된 결과가 아니라 대체로 대형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증거를 댄다면, 대형 교회에서 소위 한국교회를 섬긴다는 차원에서 시행하는 각종 세미나에 많은 중소형 교회 목회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그들의 프로그램을 수용하여 운영한다. 좋게 말한다면, 작은 규모에서 시작하여 대형교회를 일군 목회자의 목회 경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가 성장을 지향하다 보니 앞서 성장한 교회를 벤치마킹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결과다.

또한 대형 교회에서 성장 모델을 찾는 까닭은 성장한 교회에는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있다 해도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말씀이든 프로그램이든 아니면 특별한 사역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의 결과다.

한편,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대형 교회를 지향하며 모델로 삼는 이유인 이런 확신과 기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대형 교회로 옮긴 후에 교회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소문에 가까운 간증과 전도가 있었겠지만, 작은 교회에서 겪는 부담과 불편함을 피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시설과 규모에 끌려 대형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무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채 편안하게 성도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확신과 기대는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뿐, 신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옳았다고 판단해서 교회에 머물러 있든, 아니면 설령 처음 기대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거나 혹은 평소에 들어 알고 있었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하더라도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대형 교회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많다.

대형 교회 자체가 다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재고해야 할 점이 없진 않으나,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대형 교회와 인간 욕망의 결탁 관계이다. 일부 대형 교회의 반대로 개봉 자체와 관련해서 화제가 되었던 <쿼바디스>는 교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고 있는 몇몇 대형 교회들, 특히 목회자의 윤리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한다. 언론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평가할 정도다.

특히 대형 교회의 목회자 윤리, 목회자 세습, 성윤리, 교회가 기업화됨으로써 나타나는 재정 비리, 외형적인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혀 무리하게 빚을 내어 지은 교회 건축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부도 사태 등, 그간 여론에 회자하여 듣거나 혹은 읽었던 사실들을 다큐로 담아 냈다. 영화의 힘을 염두에 둔다면, 읽거나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교회의 압력으로 배급사와 상영관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하고 또한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는 상영 계획을 취소할 정도로 견제를 받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대형 교회의 비리를 영화로 표현할 생각을 실행에 옮긴 감독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분명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트루맛 쇼>나 에서 볼 수 있었듯이, 가상과 실제를 서로 섞어 놓음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편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한 연출 방식은 매우 돋보인다.

▲ 영화 '쿼바디스'와 '제자, 옥한흠'을 함께 이야기한다. 한국교회에 '어떤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3. <제자 옥한흠>(김상철 감독, 다큐, 전체, 2014)
고 옥한흠 목사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평생 목회 과제로 삼았던 제자도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살다 생을 마친 고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고인은 열정을 갖고 제자 교육을 시작했지만, 신학적인 근거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어려운 선택을 거쳐 유학을 갔고, 유학 생활 중에 교회론적인 연구를 통해 얻은 근거로 자신만의 독특한 제자 양육 방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영화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고인이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로까지 성장하면서도 결코 변질되지 않은 까닭이 한 사람 한 영혼에 대한 목자의 마음과 관심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내용과 상관없이 고 옥한흠 목사의 사역, 특히 제자 삼는 사역을 영화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논란이 클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염려를 했었다. 현재 '사랑의 교회'에 대한 상반된 입장들이 교회 안팎으로 난무하기 때문이다.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선,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에선, 어떤 편에 있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갈등을 잠재우기보다는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이럴 땐 침묵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고인에 대한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두고 사람들은 현 '사랑의 교회'를 비판적으로 겨냥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비록 오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내용을 담아 만들어지든 논란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본다면, 김상철 감독은 한경직 목사 혹은 김수환 추기경 혹은 법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작된 영화 같은 형태의 다큐 제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을 평생의 목회 과제로 삼고 제자 교육에 헌신한 고인의 모습은 여타의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독보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충분히 조명 받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 교육의 결과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현출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나(갈등 상황) 내용적으로 볼 때(특히 마지막 장면인 현 사랑의 교회에서 음소거 장면을 연출했을 때), 특정 교회에 대한 경고 혹은 비난으로 여길만한 장면이 있기 때문에 영화 자체를 심히 불편하게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런 까닭에 이 영화의 주 관람객이 '사랑의 교회' 성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당하고 또 비판을 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관객의 반응만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관객 동원에 있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즈음 해서 감독의 영화 제작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목사이기도 한 감독에게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작 의도에 있어서 신학적인 혹은 목회적인 전문성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혹은 목회적인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보다는 <쿼바디스>처럼 대형화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고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제자 교육에 대한 고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삶을 소개하면서도 정작 제자교육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고인이 목회자로서 그토록 절규하며 기도하며 살았다면, 제자 교육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 실제로 있었을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제자 교육과 고인의 관계를 하나의 신화로 여기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셋째, 제자 교육과 성도수의 상관관계는 사실 고인의 의도도 아니고 또 제자 교육의 철학도 아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제자 교육의 결과를 말하면서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숫자와 성장만을 제시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통해 고인이 기울인 헌신과 결과를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제자 교육을 교회 성장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게 했다는 것이다.

넷째, 고인의 설교 내용을 편집하면서 유독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거의 전부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은퇴 후에 교계 활동을 하면서 했던 설교였지만, 그 이전의 설교 부분도 마찬가지다. 제자 교육을 받아 본 사람들은 알지만, 제자 교육은 교회 비판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먼저 나부터 시작해서 제자로서 바르게 살면서 교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제자 교육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고인의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감독이 끝까지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았던 제자 옥한흠 목사에게만 집중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고인의 생애와 사역 자체를 조명하거나 제자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고인을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적으로 현 한국교회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쿼바디스>처럼 영화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을 겨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곧 '옥한흠'을 기호로 삼아 현 한국교회 목회자를 비판하고 경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고인의 목회적인 열정에 감동을 받아 눈물과 함께 존경의 마음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설령 비판적인 의도가 현저하다 해도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필자를 포함해서 비록 채찍을 맞는다 해도 불평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사람의 생애를 고인이 된 후에 영화로 제작하려 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내용에서 많이 아쉽고 또 제자 사역을 통해 고인을 새롭게 조명하거나 고인의 목회 철학을 한국교회에 알리려는 의도를 발견하기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4. 영상 시대에 영화를 통해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방식
한국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은 유행이 되었다. 비판을 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에서 예스맨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의도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영화를 통해 교회를 비판하는 방식의 정당성에 대한 것이다.

먼저 <쿼바디스>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정부의 정책의 이면을 파헤치면서 고발하는 다큐를 제작하는 감독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무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화씨 9.11> <식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등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주제를 선택하여 그것의 현상 뒤에 감추어진 부분을 비판적으로 다루어 이미 그 능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이다. 김재환 감독 역시 특유의 비판 의식으로 무장된 감독임은 이미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알 수 있다.

<트루맛 쇼>는 맛집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기성을 폭로하고, 은 대통령으로서 MB의 정책을 비판적이고 코믹하게 추억하면서 그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마이클 무어를 가상적인 인물로 전면에 등장시킨 이유는 한국인으로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문제를 작정하고 파헤치고 또 비판하자는 것이다. 가상적인 마이클 무어의 시각은 대부분 목회 윤리 및 목회자 윤리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상식에 바탕을 둔 비판이기 때문에 굳이 무엇에 근거해 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상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한국교회와 목회자 윤리 부재를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영화를 보며 드는 질문이 하나 있다. 대형 교회의 문제는 단지 목회자만의 문제일까? 성도들에게는 없을까? 영화의 말미에 성도들을 깨우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함으로써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저항하는 성도가 없다는 사실만이 문제는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말 같아도, 말하는 방식이 달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앞서 말했듯이, 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성도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그것을 부추겼든 아니면 성도들을 교회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목회를 했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공범이다.

결국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목회자의 윤리 부재나 문제 있는 교회 정책과 목회자에게 저항하지 않는 성도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은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할 염려가 있다. 문제를 보면서 균형 있는 시각을 놓쳤다는 말이다. 만일 또 다른 <쿼바디스2>를 기획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안타깝게도 영화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교회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안티를 더욱 많이 양산해 내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회자하는 대형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와 성도 모두의 욕망이 만나 상승 작용하여 발생한 결과다. 비록 믿음으로 의인됨을 약속받았으나 여전히 죄인인 우리 모두가 개혁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제자, 옥한흠>이 교회를 비판하는 방식은 교계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인 고인의 모습을 부각시킨 것이다. 제자도를 올곧게 실천했던 고인과 참 목회자 상을 오버랩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제자로 살지 못하는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한다.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을 현재적으로 재현 혹은 부각시킴으로써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당대를 비판하는 일은 흔한 방식이다. 문제는 그럼으로써 한 인물이 원치 않게 정치적인 기호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안에서 이미 영화를 두고 이해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상반된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가 아닌 그저 누구의 편에서 해석되느냐에 따라 달리 이해되는 목사로 전락되었다. 생전에 얻었던 성도들의 존경심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고인이 원하는 길이었을까? 한 인간을 영화적으로 조명할 때는 시기와 방식에서 깊이 숙고해야 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두 영화를 통해 교회를 비판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비판은 현실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확한 관찰과 진단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신학적인 비판이 되거나 혹은 편파적인 해석이 이뤄져 설득력을 잃게 된다. 오히려 안티 기독교 세력에 의해 이용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인물을 부각시킴으로써 당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길 원한다면, 인물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적인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객관적인 조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인물 자체의 가치와 중요성이 추락할 뿐이다. 교회 비판이 유행처럼 일어나는 시기일수록 비판은 신중해져야 하며, 무엇보다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에 의한 교회 비판은 안티 기독교 세력에 의해 호재로 여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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