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통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기독교복음교회 교단 소속 이적 목사(민통선평화교회)가 지난 12월 22일 압수수색당했다. 2013년 11월 독일 포츠담 회의에 참석해 북한 측 인사와 회합·통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압수수색을 당한 이적 목사(사진 가운데)와 코리아연대 측이 12월 26일 경찰청 앞에서 당국의 공안 몰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 제공 이적)

지난 12월 22일 오전 6시, 김포시 군하리 월곶에 있는 아동복지센터(아동센터). 민통선평화교회 이적 목사(59)가 3층 철문을 열고 아동센터에 들어섰다. 연말이라 평소보다 바빠졌다. 언론사에 넘겨야 할 원고들과 문서 작업이 밀려 있었다. 오전 8시경, 한창 글을 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어요. 거기로도 갔어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통화가 끝난 지 10분 만에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경찰이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 목사는 변호사와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빠루(대형 장도리)를 가져다가 철문의 주리를 틀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문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이 목사가 문을 여니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소속 경찰 30여 명이 우르르 진입했다.

한 경찰이 '수색영장'을 내밀며 협조를 요청했다. 영장에는 국가보안법 위반(북한과의 회합 및 통신 등)과 관련해 수색을 허가한다는 서울지방법원 소속 판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법원은, 2013년 11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이적 목사가 "애기봉 등탑 점등은 남측의 대북 심리전"이라고 말하고 북측 인사들을 접촉한 것으로 봤다.

경찰은 55평 남짓한 센터를 8시간 동안 샅샅이 뒤졌다. 아동용 위인전과 세계문학전집 등 1000여 권을 하나하나 살폈다. 사용한 지 오래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범민련 회보, 시집, 소설책 등을 마구잡이로 압수했다. 경찰은 물품을 재정리한 뒤 돌아갔고, 일부 경찰은 민통선평화교회로 향해 압수수색 절차를 밟았다.

지난 2010년부터 애기봉 등탑 설치 및 대북 전단 살포를 반대해 온 이 목사는, 코리아연대와 함께 12월 26일 경찰청 앞에서 정부 당국의 공안 몰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 1998년 민통선평화교회를 개척한 이적 목사. 2010년부터 애기봉 등탑 점등 및 대북 전단 살포 반대 운동을 해 오고 있다. 이 목사는 "호전주의 세력을 막아 내고, 애기봉이 긴장 지역이 되지 않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최근 경찰의 압수수색은 애기봉 등탑 반대 운동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뉴스앤조이> 기자는 12월 28일 지역아동센터를 찾았다. 이 목사는 교인 네 명과 함께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일예배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하는데, 들어가는 길이 얼어 예배 장소를 변경했다. 밥상에 오징어 볶음과 된장국, 김치가 올랐다. 고봉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다음 인터뷰를 시작했다.

예장대신에서 안수를 받은 이 목사는, 1998년 김포시 군하리 월곶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교회 최초로 민통선 안에 예배당을 세웠다. 30여 명의 해병대원을 포함해 50여 명이 출석한다. 문인이기도 한 이 목사는 주중에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와 글을 쓰고 주말에는 설교를 한다. 현재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목정평) 평화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다.

압수수색 이야기부터 꺼내자 이 목사가 흥분한 듯 말했다.

"이번 압수수색은,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박근혜 정부가 공안 정국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애기봉 등탑 설치를 앞장서 반대해 온 제가 첫 번째 먹잇감이 된 것이죠. 박근혜 정부 종교인 탄압 1호인 셈이죠."

웃음기 없는 얼굴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경찰은 이 목사가 독일 포츠담 세미나에서 이적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목사에 따르면, 세미나는 해마다 개최되며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이번 세미나는 '한반도의 평화'라는 주제로 개최됐고, 이 목사는 애기봉 등탑 설치 및 대북 전단 반대 활동에 대해 발표했다. 북한 인사들도 접촉하지도 않고,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고 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목사의 말대로라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경찰은 왜 떼로 압수수색을 했을까. "압수수색은 애기봉 등탑 반대 운동과 맞닿아 있다"고 이 목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 대북전단살포와애기봉등탑반대공동대책위원회가 애기봉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이적)

"애기봉 등탑 반대하니 국가보안법 들이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는 애기봉(해발 155m)에 오르면, 6km 떨어진 북한 마을이 보인다. 지난 1971년 정부는 이곳에 십자가가 달린 높이 18m 철탑을 세우고, 성탄절을 전후로 불을 밝혀 왔다. 2004년 남북 군사 회담 합의를 통해 대남·대북 선전을 중단하기로 했는데, 애기봉 등탑도 이때 소등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등탑은 점등됐고, 이 목사의 애기봉 점등 반대 운동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대북 전단 살포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크게 불편해졌습니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민통선 출입이 안 되고, 지하 대피로로 피신해야 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많은데 전단지를 살포하거나 애기봉 등탑을 점등할 때마다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생존권 문제도 있습니다. 올해 초 보수 단체가 대북 전단을 날리자 북한이 그 지역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주민들은 오히려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북 심리전을 펼치는 군 당국과 보수 단체들을 막지 않으면 생존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대 운동에 뛰어든 것입니다."

대북 전단 살포 문제로 보수 단체와 몇 차례 충돌을 겪고 나니 이번에는 보수 교계 단체들이 날뛰었다. 지난 10월 30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애기봉 등탑을 철거한 것을 놓고 호되게 꾸짖은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민주기독당 등이 들고 일어섰다. 한기총은 아예 애기봉에 9m 대형 성탄 트리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애기봉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북전단살포와애기봉등탑반대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책위)는 한기총을 향해 대형 성탄 트리 설치 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트리를 설치할 경우 남북 군사 충돌을 야기할 수 있고, 주민들이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목정평 등 진보 교계 단체도 반대하고 나섰고,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결국 한기총은 계획을 철회했다. 민주기독당은 12월 23일 애기봉에서 기도회만 진행했다.

▲ 국가보안법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하며 졸지에 빨갱이 목사로 낙인찍혔다. 그는 스스로 "박근혜 정권 종교인 탄압 1호"라고 칭하면서 조만간 구속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25년 전 아무 이유도 없이 삼청교육대와 청송감호소에 끌려가 4년 넘게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면서 두렵지 않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올해는 무사히(?) 넘겼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일단 이 목사는 외부 단체가 아닌 김포시와 시민단체, 주민이 주축이 돼 애기봉 등탑 문제를 이끌어 갈 생각이다. 2015년 김포시에 평화공원이 조성되는데 갈등이 아닌 '평화'에 초점을 맞춰 운동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최근 평화 운동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이 목사는 조선그리스도연맹(강명철 위원장)에 공개편지를 보내, 내년 성탄절에는 남북 교회가 진정한 자주와 평화, 통일을 의미하는 작은 성탄 트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25년 전의 기억, "공안 시대가 왔음을 느껴"

영문도 모른 채 압수수색을 당한 이적 목사는 25년 전 일이 떠올랐다. 1980년 11월 이 목사는 술집 외상값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파주 28사단의 한 부대로 끌려간 뒤 1년 동안 작업과 구타, 고문에 시달렸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온 이들 중에는 주검이 돼 부대를 나간 이도 있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일반 군인이 먹다 버린 짬밥(음식 쓰레기)을 먹어야 했다. 잔반을 먹었다는 이유로 맞았다. 구타와 고문으로 죽은 한 사람을 지켜보며, 이 목사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책으로 내겠다고 다짐했다. 이 목사는 청송감호소에서 추가로 3년을 복역한 뒤 풀려났다.

1987년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담은 <삼청교육대 정화 작전>을 펴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었던 고 김진홍 교수가 출판을 도왔다. 책은 보름 만에 3만 부가 팔렸고, 정국을 강타했다. 한국 최초 청문회인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에 나가 삼청교육대 학살을 증언했다. 이는 곧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신민당 김대중 총재와 인연을 맺었다. 수년이 흐른 뒤 김 총재가 "정치 한번 해 보라"며 이 목사에게 제안했다. 

이적 목사는 "목회자는 고통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양떼와 함께 싸워 주고 눈물을 닦아 줄 때, 기독교가 바로 선다"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는 12월 22일 이적 목사의 자택과 교회, 지역아동센터를 압수수색했다. 이 목사가 압수된 물품이 적힌 용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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