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이 '2014년 한국 사회와 교회를 되돌아보다'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손석춘 교수(건국대)와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가 각각 2014년의 정치·사회적 성찰, 목회·신학적 성찰을 주제로 발제했다. 허락을 받아 전문을 싣는다. (전체 기사: 올해 세상이 교회에 던진 과제)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절을 올해처럼 슬프게 맞이한 적이 없다. 부활주일 열흘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활주일 예배를 며칠 앞두고, 필자가 담임목회를 하는 교회의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은 추도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분들의 뜻을 받아들여, 올해 필자의 교회에서는 부활주일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도하며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예배'를 드렸다.

어린 생명들의 희생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했다. 성장, 그리고 시장경제의 허울 좋은 구호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탐욕과 생명 경시의 추한 발톱을 그대로 드러냈다.

필자에게 목회·신학적 성찰을 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 '신학적 성찰'을 거론하는 것이 무겁기만 하다. 그 아픔과 슬픔이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유가족과 시민은 온 힘을 다해 진실 규명을 요구했으나, 권력은 그 어떤 진실도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보여 준 우리 사회의 민낯

이윤 추구를 위해 달려온 우리는 생명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팽개쳐 버렸다. 사람이 물속에서 헐떡거리며 숨넘어가는데 두당 얼마이며 누가 꺼내 그 돈을 벌게 해 줄까를 셈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다 놓쳐 버렸다면 정말 이 죄악의 땅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농담하며 철떡같이 어른들의 말을 믿고 있었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너무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주어진 각본에 충실하게 따르는 거짓 언론은, 정말 중요한 시간에 바다에선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육해공이 연합해서 조명탄을 밝히고 밤샘 작업을 하고 수백 명의 잠수부와 수십 척의 배와 항공기가 연합해서 구조한다고 불러 주는 대로 거짓 방송하고 국민을 속였다. 그런데 실제는 고작 16명이 잠깐씩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아이들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가 아예 의지가 없고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겉으로 꾸며 대고 조작하는 데만 이골이 나 있구나 하는 이 정부의 맨 얼굴과 자율적으로 충실한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짓 언론 '기레기'들을 보아 버렸다.

획일적 언론은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공평성을 상실한 언론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알아차린 다음에는 백약이 무효하게 된다. 오히려 시민들은 언론이 발표하는 것을 뒤집어서 상상하게 될 것이고 대부분이 그런 상상이 맞는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면 국가와 거짓 언론이 공을 들여 만들어 낼수록 시민들은 거꾸로 사건을 뒤집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조작된 언론은 그것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리 오랜 세월을 가지 못하고 진실 앞에 무릎 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언론의 왜곡으로 인해 정부는 진실을 알리는 길이 모두 차단되고 그동안 왜곡을 일삼은 주체들이 자신들이 해 온 조작 칼날의 되치기 앞에 무방비로 맞서야 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2014년 말미에 나타난 12월 위기설, 남침 땅굴이 남쪽 깊숙이 들어와 있고 전쟁이 날 것이라는 위기설이 유트브 동영상을 통해 확대되고 국방부가 그런 일이 없다고 확인을 하고 교회 연합 단체가 공문으로 안정시키려 해도 진정되지 않고 확대되었다고 한다. 신뢰를 잃은 언론의 부메랑의 위험한 칼날이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언론을 믿지 못하게 될 때 유언비어는 더욱 힘을 얻는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일본이 고베 지역 한신대지진을 당하고 4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눈물, 분노가 넘쳐 났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정치를 바꾸고 새롭게 할 기회였다. 그러나 자원봉사, 성금 모금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자원봉사 열풍이 전 세계적인 봉사의 붐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치를 개혁하고 세상을 새롭게 할 기회를 놓쳐 버렸고 그때가 바로 후쿠시마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놓쳐 버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이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이다. 이것을 그냥 보내면 이보다 더욱 험한 일들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야는 모두 성장주의를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은 경제성장을 목표로 할 수 있지만 국가의 목표가 왜 성장이어야 하는가?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복지를 관리하는 것이지 정부가 생산을 하거나 무역을 하는 것이 아닌데 왜 성장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파헤쳐 보면 국민들 개개인의 것을 빼앗아 기업에 몰아주어 양적 성장의 지표들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가가 정책을 펴겠다는 뜻이다. 허울 좋은 성장의 구호 이면에는 기업을 위해서 우리들 개개인의 희생을 전제하는 것이며 재벌과 기업에 돈이 넘쳐 날 때 거기서 떨어지는 낙수 효과로 목을 축이라는 정책을 말한다. 기업은 어차피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니 성장을 목표로 하더라도 적어도 정부의 목표는 오직 국민의 생명, 국민의 안전, 국민의 행복(복지)이어야 한다.

1972년 로만 클럽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석유 문제로 이상 징후가 생겨 1차 오일쇼크가 왔다. 성장이란 지구의 자원을 소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거늘 자원이 유한한데 무한한 성장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유럽의 근대 자본주의는 성장·확장의 문명을 450년간 지속해 왔다. 이들이 계속 성장 가능한 것은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점령이라든가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확장으로 성장이 가능했다. 또한 그들은 분업이란 명목 아래 강탈을 위한 산업조정을 했다. 지구 곳곳을 대규모 농장으로 플랜테이션화해서 현지인들을 고용했고 그들의 고유한 자급자족 문화는 파괴되었다. 그들이 생산한 작물, 예를 들면 사탕수수와 같은 것은 싼 가격으로 해외에 수출하고, 원주민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서구인들이 공급하는 시장에서 구입해야 했다. 그들을 자기들의 시장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이 바로 분업이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은 학살과 강탈의 역사이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15%는 혜택을 입었지만, 나머지는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장 시대는 제도적으로 민중이 모독을 당하는 시대이다. 어떻게 자원이 유한한데 무한한 성장, 계속적인 성장이 가능한가? 성장은 자원을 소비해야 하는 것인데, 계속 발굴하고 파헤치고 개발하고 가공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지구는 병들고 인간도 덩달아 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

모두 한목소리로 성장주의를 외치는 자들이 자리 잡고 있는 국회는 매우 위험하다. 그들이 진보 정치 세력을 어떻게 요리해서 쓰레기통에 구겨 버렸는지 우리는 보았다. 이런 성장주의자들이 국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나누어 먹기 식의 양당 기득권 체제 아래서는 새것이 나올 수 없다. 거대 양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의 개선, 특히 소선거구제 일등만이 살아남는 투표의 방식은 언제나 40%의 지지율을 가지고도 과반수가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하고 독재할 수 있는 거대 여당을 가능하게 해 주며, 또한 어떤 무능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제2야당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면 정권의 이중대로 생존할 수 있는 야당이 가능하게 해 주는 정치제도이다. 이들이 전횡하는 정치제도와 선거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은 2004년 아크라선언을 발표하고 2006년에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9차 총회에서는 아가페문서를 발표하여 신자유주의가 하나님의 정의에 정면 배치된다고 선언하고 이와 투쟁해 나갈 것을 선언하였다.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는 민중의 생존권을 빼앗고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 거대 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맞물려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시장의 탐욕이 민중의 생존권을 경시하며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기독교회는 가난한 자의 친구이며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셨던 예수의 정신을 받들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며 이와 싸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선언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교훈

예레미야는 위기의 상황이 낳은 신학자였다. 그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기 직전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예언했다. 바벨론과 전쟁을 하기 위해 동원령이 내리고 온 나라가 한판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민족은 망한다", "바벨론에 항복해라"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움츠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흔히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의 말씀이 범상치 않은 만큼 그의 생애도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의 친척들마저도 그를 죽이려고 했다.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고난을 자초하는 메시지를 전했을까? 이렇게 시대가 받아들이기 힘든 예언을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거대한 바벨론과의 전쟁에 백성들을 부추기어 몰아세운다. 유다 민족은 단결해서 이(異)민족인 바벨론 제국에 대항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바벨론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부득이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싸움을 부추기는 것은 결국 예루살렘 지배층이 자기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허울일 뿐이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중요시한 것은 지배층이 내세우는 명분 보다는 민중의 생존, 생명 자체였다. 예레미야의 관심사는 유다와 바벨론 간의 모순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지배계급으로부터 국민의 생명, 생존을 지키고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정부라면 국민도 그 정부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이다. 예레미야가 문제 삼는 것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아니다. 그보다는 민중이 유린당하며, 빈민들의 권리가 짓밟히는 백성들의 깊은 상처가 시급한 문제였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5:26-31)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민중의 생존이다. 그들의 생명 그 자체이다. 그 어떤 가치라도 민중의 희생을 토대로 이루겠다는 것은 거짓이다. 세월호 사건은 한 사건에 나타나는 실례이지만 그동안 사실 모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어떻게 처리되어 왔는가를 보여 주는 축소판이기도하다. 수권 의지가 없는 야당은 영원한 이중대가 될 수밖에 없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 복지보다는 성장 위주, 기업 중심의 강령 아래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해 온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문창극과 하나님의 뜻

인간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순간은 그것이 충만한 기쁨이든,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든 당사자에게 더 없는 기쁨이리라. 그러나 제3자의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어떤가. 문창극 씨의 역사관이 어떻고 그의 사고방식이 어떤가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다. 단지 그가 한 말이 타당한가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KBS 보도에 의하면 그는 용산의 한 교회에서 행한 강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제시대는 이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너희들은 이조 오백 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에게는 시련이 필요하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받아 와서 우리가 경제개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질곡의 지정학은 축복의 지정학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남북 분단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당시 우리들의 체질로 보아서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다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4·3 폭동 사태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크리스천들이 즐겨 쓰는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것이다. 잘 쓰면 역경에서 큰 의미를 찾아오는 반전이 될 수 있는데 문창극 씨 본인은 그런 의미에서 한 간증이겠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그 어려움의 당사자들이라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에 있는 제삼자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말에 아픔을 겪고 있는 당사자가 동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이기 쉽다. 그것은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거나 그들의 마음에 다다르지 못한 채 오히려 당사자들을 욕되게 하거나 정죄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례에 가서 아무리 장수하고 생을 잘 마감하신 분이라도 '호상이다'는 말은 가족이 그렇게 말하기 전에 남이 먼저 말하는 것은 실례이다. 아무리 천수를 다하신 분이라도 그 가족에게는 아쉬움과 슬픔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아픔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붙이는 의미는 폭력이다. 사람에게 폭력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 된다. 전도서는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전 8:17).

문창극 씨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자리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만한 자리인가를 살펴야 한다. 공연히 이런저런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끼워 넣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삶의 자리가 아픔을 겪고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하지 않은 채 내뱉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결과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올해 최고의 사건인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거기에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의미 부여라는 것은 가족들의 아픔을 뒤집어엎는 반전이 담겨져야 하는데 자칫하면 그 반전은 폭력이 될 수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난다면 모를까 아직은 어떤 신학적 의미 부여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들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가족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조용히 함께하는 것이다.

이미 가족들은 충분히 의미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에서 나오는 신학화 작업이다. 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한풀이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제대로 된 한풀이를 하려면 그들의 죽음이 어떤 의미 있는 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사고로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정부 당국자의 말에 대해서 가족들은 극렬한 거부감을 표했다. 지난하게 생업을 포기하며 이루어지는 긴 싸움은 어린 생명의 죽음을 의미화하려는 신학적 싸움이기도 하다.

기독인의 시국 기도회에서 한 어머니가 증언하였다.

"왜 우리가 나서야 하나요 우리의 가슴도 메어지게 아픈데 왜 우리가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며 굶고 농성하며 거리에 나와 싸워야 하나요? 우리는 우리의 가슴을 추스르기에도 너무 아파 정신마저 혼미한데 왜 우리가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거리에 나와서 투쟁해야 하나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의 죽음이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 된다면 그 억울한 죽음은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 가족들 대부분은 그리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매일 일해야 먹고사는 평범한 시민들일 뿐이다. 그들은 다 생업에 바쁘고 자기 역할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8개월을 거리에 묶여 있을 수는 없고 빨리 정리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랄 부모들이지만 아이들의 영혼이 그 부모들을 붙들고 많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의미를 찾는 신학적 몸부림이다. 아이들은 살아서 외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외치고 있고 국민들은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아이들의 그 소리를 듣는 시민들은 아직까지도 "이제 그만 잊으라. 가만히 있으라"고 여전히 부모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무리들과 싸우고 있다.

가족들은 다양하다. 그들 중에는 새누리당 지지자, 박근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투쟁이 길어지자 한 어머니는 마음이 괴로웠다. 그녀는 갈등을 하는 중에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한 집회에서 전한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아들이 문득 집의 대문을 젖히고 들어왔다. 비몽사몽간이지만 아들의 모습은 너무도 생생했다. 어머니는 너무나 반가워서 '네가 어떻게 여기 왔니?' 하고 묻자 아들은 어머니에게 "엄마, 할 말이 있어요. 엄마는 지금 아주 잘하고 계세요"라고 짧게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다음에 그 어머니는 뒤돌아볼 여유 없이 힘차게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은 시민들이 억울함을 당한 영혼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게 되는 영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 영적 사건은 교회 안에서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어린 영혼의 소리에 응답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진정 영적인 민감성을 가진다면 눈과 귀를 열어서 그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음성을 듣고 그들의 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의 투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허탈해할 수 있다. 8개월을 싸워 왔는데 무엇을 이루었나? 제대로 된 진상 하나 밝히지 못하고 진상조사위원회마저도 진상을 밝히기에는 터무니없는 조건이니 앞으로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그나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상을 규명하고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지만 절망을 할 필요는 없다. 벌써 진상을 은폐하고 증거를 훼손하고 은폐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판에 참된 진상이 밝혀지는 것은 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나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정권 아래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봐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세월호 사건과 같이 넓게 국민들의 연대를 가져온 사건도 없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 하는 신학적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전통적인 전능의 신, 초월한 신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약자들의 하나님, 아파하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으로 본다면 다 되는가? 그렇게 힘없는 하나님을 과연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하나님을 약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냥 눈물만 흘리고 계시지 않았다. 지금 울고 있고 지금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그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시지만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고 계시다. 하나님이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함께하는 연대의 장으로 나오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체로 큰 성과이다. 나의 아픔이고 나의 눈물인데 거기에 누군가 함께 울어 주는 주체가 있고 함께 아파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으로 아픔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되는 것이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운다는 것은 그 약함을 고리로 하여 함께 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운동의 성과를 결과의 전리품으로만 셈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은 보다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으로 500만 명이 넘게 서명을 했다. 8개월 투쟁, 수많은 인파가 분향소로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매일매일 광화문에서 국회에서 각 지방마다 촛불을 밝히며 추모식이 이어졌다. 국민적인 동조 단식 운동이 번져 가고 팽목항으로 떠나는 희망버스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어느 운동보다도 큰 연대를 이루어 냈다. 세월호 투쟁의 기간 동안에는 다른 모든 운동이 중단될 정도로 온 국민의 마음이 그리로 모였다. 운동의 성과를 결과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연대의 틀 안에서 찾는다면 지난 8개월 동안은 역사에 드문 대단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가장 먼저 전국 교역자 대회를 열어 추모 기도회를 가지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서울 시내 거리를 행진하여 물꼬를 텄다. 광화문에서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전국 노회별로 돌아가며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KNCC 세월호 특위에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촛불 기도회를, 8월 26일(화)부터 매주 월요일~금요일 저녁에 촛불 예배를 드려 11월 4일까지 44차례 청운동 거리 기도회를 가졌다. 복음주의권은 매주 월요일에, 촛불교회는 매주 목요일에 기도회를 가졌다.

기독교는 처음으로 에큐메니컬 진영과 복음주의권이 합해서 여러 차례 집회를 이루게 된다. 기장 목사들이 성결교 목사들의 예배 인도와 설교를 듣고, 합동 측 목사들이 NCC에 속한 목사가 하는 설교를 듣고 함께 마음을 합쳐서 철야로 기도회를 했다.

방인성 김홍술, 두 목사는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에서 각각 40일, 42일 동안의 기나긴 단식을 했다. 두 목사가 단식을 하는 동안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막을 방문했고,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세월호 사건 이후 시민들이 보여 준 지지와 투쟁은 비록 지금 확실한 운동의 성과나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모아 냈고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를 이루었던 사건이었다.

이렇게 국민의 마음이 모아진 사건을 정치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한 한심하고 무책임한 정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 역시 일부를 제외한다면 이 영적인 사건에 무지하였고 그들의 아픔의 자리에 제대로 함께하지 못하였다. 국민들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자리에 정치도 없고 교회도 없었다.

큰 울림을 남긴 프란치스코 교종의 4박 5일

프란치스코 교종은 8월 14일부터 4박 5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공식 방한 일정은 대전 아시아 청년 대회 참석, 충북 음성 꽃동네 방문, 서울 광화문 시복 미사와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집전 등이었다. 그러나 주목받은 것은 오히려 그의 '비공식' 행보였다. 그는 공항에 평신도 환영단으로 나온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고 800km에 이르는 도보 순례를 한 이호진 씨를 만나 직접 세례를 주었고, 16일 광화문 시복 미사를 집전하기 전 카퍼레이드를 하던 도중 차에서 내려, 단식 34일 차이던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의 손을 잡았다. 방한 후 귀국길 기내 기자회견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받은 노란 리본을 언급하며,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라고 한 말도 잘 알려져 있다. 교종의 4박 5일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 강력한 울림을 남겼다.

2013년 3월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의 수장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저택이 아닌 게스트 하우스에 살며 직접 운전을 하는 등 교종의 소박한 생활 방식과 이웃 종교의 수장에게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부탁하는 등 몸에 밴 겸손함이 파격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종교가 없다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살면 된다'1), '아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다'2) '교회도 거리로 나가라. 불평등과 맞서 싸워라'3) 교종은 선의와 연민의 차원을 넘어 '과도한 소득 불균형을 넘어설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4)며 시장의 절대 자유와 금융 투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교종의 행보는 분명 파격적이다. 하지만 실은 교종의 지향은 예수가 걸었고, 그리스도교 전통이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이에 '파격'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제도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너무 멀리 왔음에 대한 반증이다. 그 자신이 소박하고 가난했으며, 늘 가난한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과 제도에 죽음으로 저항했던 예수의 삶은 작금의 교회에 낯설기만 하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장과 부(富)를 추구하고 배타성과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게 지금 한국 (개신교)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이런 교회에게 교종은 존재 자체가, 교종 방문 시 일부 개신교도들이 외쳤던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교종의 방문에 국민들이 감동하고 열광했던 것은 절망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에 위로해 줄 지도자가 없고 어른이 없다는 목마름의 반증이기도 하다. 교종의 행보는 종교의 역할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 예이다.

지도자는 고고히 홀로 서서 만인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봐야 할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자 해야 한다.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다른 이의 고통을 보고 같이 울고 가슴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2014년 상처 받은 대한민국의 국민은 그렇게 대통령을 한번 만나 보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프란치스코 교종이었다. 그는 참된 신앙인, 참된 지도자가 어떤 자리에 서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나가는 말

교종 방문으로 뜨거웠던 4박 5일의 여름은 끝났고, 우리는 손발이 얼어붙는 겨울을 맞이했다. 유민 아버지는 단식을 마쳤고, 수없이 많은 정치 싸움으로 세월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린다. 세월호 유가족은 여전히 외면받고 있으며 해고 합법 대법원 판결을 받은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여전히 싸우고 있는 강정과 밀양 주민들 등 우는 이들의 울음은 더 억울하고 깊은 그것이 되었다. 교종이 대한민국에 준 위로는 묵직하고 따뜻했으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고 거기에 신학적인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가족들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 생명의 희생에서 대한민국 전체가 안전한 사회로 거듭나기 위한 희생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로 해석되었듯이 대속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를 단순 교통사고로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묻어 버리려고 하는 세력들과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속의 숭고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아픔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 외에 제삼자가 그런 해석을 한다면 '왜 하필이면 우리 아이들이 그런 희생 제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답하기 어렵다. 여전히 그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폭력은 궁색한 변명 뒤로 숨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직은 어떠한 신학적 의미 부여도 조심스럽다. 그냥 그들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가족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조용히 함께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 부모들의 눈물이 흐르고 흘러 다다르는 자리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 부모들이 희생된 아이들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의미를 찾아내고 그 자리에 우리도 초청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찾아낸 그 자리에 함께 서서 그들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김경호 / 들꽃향린교회 목사

*주

1) 2013년 9월 12일 자 이탈리아 일간지 <라리퍼블리카> 기고문

2) 첫 권고문 <복음의 기쁨> 56항 중에서

3) 2013년 7월 25일, 브라질에서 열린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에서 그는 "거리로 나가서 파장을 일으켜라. 소란스러운  청년 대회를 기대하고 있다. 교회도 거리로 나가길 바란다. 불평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빈부 격차를 키울 뿐이다. 가난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를 회피하고 무시하는 사회에는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돈과 권력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행복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외쳤다.

4) 2014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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