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어느 목사님이 박윤선 목사님의 딸이 썼다는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고 소감을 쓴 내용 중의 하나이다.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변호하고 싶기도 하고 한국교회 내의 기복주의 사상을 뿌리 뽑고 싶기도 하여 이번 글을 쓴다.

"더 나아가 박윤선 목사는 샤머니즘적 기복주의에 사로잡힌 분이었다.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복을 얻는 것이 신앙의 기조였던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하나님을 잘 믿은 국가였기 때문에 화란이 잘 사는 나라이며 선진국이라는 천박한 생각이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듣던 철저하게 물질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생각이 별로 공부를 하지 못한 부흥사들의 입에서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그래도 당시에 가장 많은 학문을 했다고 생각되는 박윤선 목사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하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주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임을 잊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화를 내고 정성을 다하면 축복해 주는 샤머니즘적 신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한국 안에는 양복 입은 무당들이 가득하게 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일단 성경 전체를 보면, 구약과 신약 모두가 기복주의적인 흐름이 아니라 은혜주의적인 흐름이 강하다 할 것이다. 우선 구약의 흐름을 보자.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복을 선언하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3-5)."

여기에 내린 복은 아브라함의 행적에 의한 보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복으로 나타난다. 그 은혜를 받고 말씀을 좇아갔다고 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일방으로 복을 또 선언하신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여기서 '상급'은 후사 곧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역시 하나님의 일방적인 복으로 살게 된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거짓말로 뺏고 삼촌 라반의 집으로 달아나는 야곱에게 베델에서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당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3-15)."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의 복으로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성경의 약속들을 오늘날 교회에서 기복주의의 예언으로 활용하여 기복주의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모시고 있었던 담임목사님께서는 신학대학교의 총장까지 하신 분이었지만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나 말세 회복의 은총을 모두 기복으로 만들어 버렸다. 성구 한두 절을 써서 작은 액자를 만들어 주고 1년 동안 복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 마치 부적과 같은 것이 되었고 교인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복을 기다렸고 그것을 벽에 걸어 놓고 일명 기도라는 주제하에 섬기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신약의 흐름도 구약의 흐름처럼 인간의 노력에 의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그 대표자는 사도바울이라 할 것이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바울의 고백 속에는 지금 새사람으로 변화된 자신의 됨됨이나 변화된 후 이룬 업적이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감사뿐이지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일부 목회자들은 성경의 맥 속에 기복이 흐르고 있으니 기독교는 기복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심방 중에 꼭 성구 복을 빌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기복은 없다. 기복이란 내가 세운 업적 노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셨다는 보상의 복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박윤선 목사님께서 화란(네덜란드)의 복을 하나님을 잘 섬겨서 주신 복으로 이해한 부분도 그분 위의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나는 목사님의 직속 제자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웠기 때문에 그분을 기복주의자라고 내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영적인 복을 받는다는 독려 차원에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무튼 한국교회 안에는 기복 사상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이 사실이다. 특히 성전 건축을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건축하게 되었다고 하다가 무리하게 시작한 건축이 부도가 나고 이단에게 넘겨주는 현상들을 보면서 허무맹랑한 기복주의 꿈에서 깨어나기를 소망한다.

오직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고백뿐인 것이다. 우리의 신앙적 삶이 부족한데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선교를 하고 이웃과 나눔을 베풀고 하는 것이다. 자식이 유명 대학에 들어갔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자식이 노력했어도 내 노력이나 자식의 노력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돌림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적 고백인 것이다. 빌고 빌어서 노력하고 노력해서 얻은 보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입시철만 되면 전국의 교회와 사찰이 입시생 부모들로 넘쳐 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이다. 바로 그 기복주의적인 발상 때문인 것이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께 경배하려는 신앙으로 하는 것이다. 복 받으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경배하였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복을 주실 수는 있다. 내가 예배를 예쁘게 드렸더니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예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 예절을 다하여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이다. 보상적 차원에서가 아닌 은혜 받은 자의 자세로서 말이다.

이런 말 저런 말 다 하려면 끝이 없다. 보상적 기복주의에 빠지지 말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성경의 맥이요 성경의 가르침이며 바른 영성의 길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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