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전 세계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뉴스들 중에 소위 '땅콩 회항' 혹은 '땅콩 리턴'으로 알려진 사건이 있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 12월 5일,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 씨가 뉴욕발 대한항공 일등석에서 승무원의 견과류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아 승무원과 사무장에게 심한 욕설과 폭언·폭행을 하고, 이륙하기 위해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우고 탑승장을 떠난 거대한 여객기를 다시 탑승장으로 돌아가게 해서 사무장을 내리게 한 후 비행기를 출발하게 한 사건이다. 오너의 망나니 행동으로 인해 비행기가 20여 분 늦게 출발했지만 기장이나 승무원들은 누구도 승객들에게 사과 방송은 물론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 기가 막힌다. 피해 당사자였던 사무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땅콩을 제공하려던 여승무원을 조 전 부사장이 질책해 기내 서비스 책임자인 자신이 용서를 구했지만, 조 전 부사장이 심한 욕설을 하며 매뉴얼 내용이 담겨 있는 케이스 모서리로 자신의 손등을 수차례 찍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 전 부사장이 자신과 여승무원을 무릎 꿇게 하고 삿대질을 하며 기장실 입구까지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리고 기장에게 "당장 연락해서 비행기 세워. 나 비행기 못 가게 할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 올해는 유난히 힘 있는 자들의 갑질 횡포를 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자도 살렸던 예수는, '수퍼두퍼 갑'이시면서도 갑질은 고사하고 도리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기꺼이 내려놓으셨다.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을 내주셨다. 그의 제자인 우리는 한 해를 어떻게 살아 왔는가.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모범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미지는 Marten de Vos(1532~1603)의 '가나 혼인 잔치'(The Marriage at Cana).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사무장은 이 사건 이후 대한항공의 거짓 진술 강요도 폭로했다. 그는 "언론 보도로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자 대한항공 직원 5~6명이 집으로 찾아와 '사무장이 매뉴얼 숙지를 하지 못해 조 전 부사장이 질책을 한 것이고 욕설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비행기에서 내렸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했다"고 했다. 또한 "지난 8일 국토부로 조사를 받으러 가기 전엔 '국토부의 조사 담당자들이 대한항공 출신 기장과 사무장'이라 '조사라고 해 봐야 회사 측과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대한항공 측이 '입단속'을 위해 승무원들의 카톡까지 검열했다는 내부 증언도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이 보도된 직후 대한항공 측은 "사무장·승무원에 대해 폭언·폭행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함께 일등석에 탑승했던 다른 승객의 증언은 이와 달랐다. 검찰의 참고인 조사에서 그 승객은 "무릎을 꿇은 채 매뉴얼을 찾는 승무원을 조 전 부사장이 일으켜 세워 위력으로 밀었다"며 "한 손으로 승무원의 어깨 한쪽을 탑승구 벽까지 거의 3m를 밀었다"고 말했다. 그는 "승무원에게 파일을 던지듯이 해, 파일이 승무원의 가슴팍에 맞았다"며 "승무원을 밀치고서 처음에는 승무원만 내리라고 하다가 사무장에게 '그럼 당신이 책임자니까 당신 잘못'이라며 사무장을 내리라고 했다"고 했다.

이 사건은 국내 언론만을 달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언론들과 네티즌들이 마구 퍼 나르고 있다. 해외 기사를 보면 "Nuts or nothing!"(너트인가 아무 것도 아닌가!) 혹은 "Nut rage in first class"(일등석에서의 너트 격노) 등의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사실 여러 매스컴에서는 너트를 땅콩으로 번역했지만 문자적으로 너트는 땅콩을 포함한 밤, 호두, 도토리 등의 견과류를 말한다. 그런데 해외 매스컴들이 너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데는 너트에 대한 묘한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너트라는 영어 단어에는 견과류라는 원래 의미에 더하여 '닭대가리', '멍청이', '미치광이'와 같은 욕설 혹은 비속어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하필 이 사건이 너트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가진 자의 상상할 수 없는 오만과 횡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에 매스컴들이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이다. 위 문장을 직설적으로 번역한다면 '멍청이거나 또라이거나!' 혹은 '일등석에 앉은 닭대가리의 분노'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조현아 씨가 저지른 '사상 초유의 갑질'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금년에는 유난히 힘 있는 자들의 소위 '수퍼 갑질' 사건이 많았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이 골프장 캐디를 성추행했다고 고발을 당했는가 하면, 박희태 전 국회의장 역시 골프장 캐디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수년 전 전 삼일교회 목사는 여러 여자 교인들을 성추행하고도 아직까지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 일본 선교의 대부라는 사람도 자기 교회 여교역자들을 성추행해서 문제가 되었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은, 힘 있는 자는 아래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의 오너는 직원들을 고대사회의 몸종 정도로, 큰 교회 담임목사는 자기 교회 부교역자들을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금년은 유난히 힘 있는 자들의 오만과 방자함, 폭력과 전횡이 눈에 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자기 비움)가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오만 방자해지는데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마구 행동해도 되는 것처럼 관행화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수퍼두퍼(super-duper) 갑'이셨음에도 '갑질'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이 있으면 갑질하려고 혈안이 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수퍼두퍼 갑'이시면서도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가장 낮은 '을'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모양과 풍채만 흠모할 게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도리어 '을'에게 온갖 '을질'을 당하셨다.

선지자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다. 그분은 누구보다 힘 있는 분으로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지만, 죽어 마땅한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다. 사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선지자는 수퍼두퍼 갑인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수퍼두퍼 갑'이시면서도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가장 낮은 '을'이 되신 예수님을 주와 선생으로 고백하는 우리는 도대체 지난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성탄의 계절을 보내면서 나는 혹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내 가정이나 학교, 교회나 주변 사람들에게 '갑질'을 한 적은 없는지?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과 힘을 예수님처럼 섬기는 데 사용하기보다 갑질하는 데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땅콩 회항' 사건으로 세계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이때 '수퍼두퍼 갑'이시면서도 갑질은 고사하고 도리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기꺼이 내려놓으신 우리 주님의 모범을 다시 생각해 본다.

양승훈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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