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은 한 흑인 소년의 죽음으로 인해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비무장 상태인 18세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쏴 죽인 백인 경관에 대해 11월 25일 퍼거슨 시 대배심원은 경관이 소년을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결정이 발표된 직후 퍼거슨은 거리는 성난 시위대로 가득했다. 지역 교회들은 소년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기도 하고 시위대의 피난처가 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미국 교회들, 폭동 우려해 피난처 자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 초, 미국이 또 한 번 인종차별 문제로 들끓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뉴욕 시의 5개 자치구 중 가장 보수적이며 백인 거주율이 높은 스태튼아일랜드 거리에서 한 흑인 남성이 사망했다. 43살의 에릭 가너(Eric Garner)는 불법으로 담배를 팔다가 경찰 단속에 걸렸다. 경찰은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 조르기를 시도했다. 평소 천식을 앓고 있던 가너는 경찰이 장시간 목을 조른 결과 사망했다.

12월 3일, 시 대배심원은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대니얼 판텔레오(Daniel Panteleo) 경관을 불기소하기로 결정했다. 대배심원의 결정 후 가너가 "I can’t breathe(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수차례 외치며 죽어 가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이를 본 많은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있고 미국 교계도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 대표적인 미국 보수 교단인 남침례교의 윤리와종교자유위원회 러셀 무어 위원장은, 대배심원의 불기소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 위원회 홈페이지 'Moore to the Point'에 글을 올렸다. 그는 교회가 흑인 형제자매들을 위해 나서야 할 때라고 했다(글 읽으러 가기). (남침례교 윤리와종교자유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보수적인 남침례교도 한 목소리에 동참

동영상이 공개된 다음 날, 미국 <릴리전뉴스서비스>는 가너 사건 이후에 보수적인 백인 목사들도 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남침례교 종교와윤리자유위원회 러셀 무어(Russell Moore) 위원장은, 가너 사건은 다소 충격적이며 할 말을 잃게 만든다고 12월 4일 위원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그는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이 다치면,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태껏 말로만 복음을 외쳐 왔다면 이제 몸소 실천해야 할 때다. 백인과 흑인을 나누고 있는 벽을 허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를 알아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상대방을 위해 싸워 주고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무어 외에도 SNS에는 대배심원의 결정을 비난하는 목사들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앨라배마 주에서 목회하는 남침례교 소속 스캇 슬레이튼(Scott Slayton) 목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경 말씀은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외치며 비참하게 죽어 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남침례교 소속의 또 다른 목사인 앨런 크로스(Alan Cross)도 자신의 블로그에 이제는 백인 기독교인들이 인종차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미국 역사 속에서 남부의 백인 기독교인들이 인종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앞장섰어야 했다는 의견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는 평소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치였다고 했다. 이제는 그런 이중적인 생각은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흑인 공동체의 사람들이 어떠한 일을 겪어 왔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 12월 8일, 프린스턴신학교 학생들과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 500여 명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행진 도중 길바닥에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바닥에 뉘어 목 졸려 숨진 가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플래닛프린스턴 홈페이지 갈무리)

신학교,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구심점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남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도 이번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조금 다르다. 대니 아킨(Danny Arkin) 학장은 SNS에 올린 글에서 에릭 가너의 남겨진 가족이 걱정된다고 했다. 졸지에 아빠를 잃은 여섯 아이들과 남편을 잃은 아내를 위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이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선한 일을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주에 남침례신학교는 인종차별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아킨 학장은 직접 이 기도회를 인도했다.

미국장로교(PCUSA) 소속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는 12월 8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다. 이 행사에는 크레이그 반스(Craig Barnes)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과 재학생 500여 명이 참여했다.

사건이 벌어진 뉴욕 주에서는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의 학생들은 에릭 가너 사건 이후 일어나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배심원이 백인 경관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한 직후, 학생들은 '저항 허브(Protest Hub)'라는 것을 결성해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뉴욕 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를 지원한다.

운동을 조직한 목회학 석사과정 1학년 캔디스 심슨(Candace Simpson) 학생은 자신들의 행동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운동 자체를 현실적인 목회의 현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반대로 믿음은 우리가 행동할 때 유지될 수 있겠죠. 학생들이 이 시위 현장을 사역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곳은 정말 배울 것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 뉴욕 유니언신학교는 판텔레오 경관의 불기소 처분 발표 이후 계속 길거리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학생 한 명은 자신의 SNS 계정에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을 올리기도 했다. (트위터 갈무리)

뉴욕 종교 지도자들, 시청에서 드러누워

판텔레오 경관에게 불기소 처분이 내려진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뉴욕 주를 비롯한 미국 곳곳에서 대배심원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허핑턴포스트>는 12월 8일, 뉴욕종교협의회 소속 회원 75명이 뉴욕 시청에 모였다고 보도했다.

각 교계를 대표하는 이들은 공개 기도회를 가진 후 바닥에 드러눕는 방법으로 시위를 벌였다. 에릭 가너를 체포한 판텔레오 경관이 그를 바닥에 눕힌 채 목을 조른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참석자들은 먼저 "God can’t breathe(하나님도 숨을 쉴 수 없다)"고 함께 외친 후 뉴욕 주 대배심원의 결정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사인했다.

이 시위에 참여한 뉴욕신학교 피터 헬첼(Peter Heltzel) 교수는 에릭 가너가 숨을 쉴 수 없다고 수차례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침을 무시한 경찰을 비판했다. 그는 목사이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이번 사태를 그냥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내 믿음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슬픔과 분노를 우리가 가진 믿음에 기반한 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운동은 이 나라의 무너진 범죄 정의 시스템을 회복하고 진정한 경찰 개혁을 위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뉴욕 시 디블래지오(de Blasio) 시장과 시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에는 유니언신학교 세렌 존스(Serene Jones) 학장과 이슬람 센터의 칼리드 라티프(Khalid Latif) 이맘, 미국 개혁교회 역사의 시초인 미들컬리짓교회 재클린 루이스(Jaqcline Lewis) 목사 등이 함께했다.

"우리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 이 시대의 증인으로 함께 살아가길 원한다. 우리는 믿음의 지도자로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창 1:27) 것을 믿는다. 미국에서 어린이들, 특히 유색 인종의 어린이들이 안전해지는 그날까지 교계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시위를 계속할 것이다."

▲ 12월 8일, 뉴욕종교협의회 회원 75명은 뉴욕 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로비에 드러누운 채 시위하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하기도 했다. (트위터 갈무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