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영화를 잘 만든 것 같다.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하여 예전에는 전혀 꿈도 꾸지도 못했을 일들을 영화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고, 출애굽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최신작 영화 엑소더스는 정말 우리를 압도하는 대작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게 되었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와 김상철 감독의 '제자 옥한흠' 영화 포스터. (사진 출처 Daum 영화)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영화를 볼 때에도 영화가 얼마나 성경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조금이라도 성경 이야기와 다른 모습이 나오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정말 잘 그린 그림은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 낸 그림이 아니라 대상을 보고 난 느낌을 인상적으로 그려 낸 그림이듯이 영화는 기초가 되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그려 내는 것이 잘된 영화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들은 영화가 성경의 내용을 곡해하고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영화의 목적은 사실을 그대로 그려 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성경 출애굽기 이야기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하늘에 던져 버린 후 자신이 이끌고 가는 플롯 속에 여기저기 심어 놓았다. 단순히 성경에서 말하는 순서대로 출애굽 이야기를 그려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적절하게 재배치하여 그럴듯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노아의 이야기로 전혀 새로운 영화인 노아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따라서 영화 엑소더스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만든 영화이지만 결코 성경적인 영화는 아니다. 노아라고 하는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엑소더스라는 영화도 감독의 세계관과 철학을 전달하는 감독의 이야기이다. 신앙적인 주제와 성경의 이야기가 사용된다고 해서 성경적인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언제나 성경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이용되어 왔고, 종교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서 언제나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나간 것은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의 탐욕의 반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를 하는 일에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성경적 주제를 가진 영화는 그저 감독의 생각을 반영할 뿐이지 성경적인 영화는 아닌 것이다 .

이 말은 우리가 이런 영화를 사탄적이라 규정하며 비난하자는 말이 아니다. 사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갈망을 담아낸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소망을 담아내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대리 만족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가장 아름다운 희생을 발견하게 되고, 가장 멋있는 짜릿한 승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엑소더스는 우리들에게 그런 요소들을 보여 준다.

영화에서는 미리암의 팔이 잘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인정하고 만다. 결국 그 일로 모세는 유배를 당하게 되는 희생을 당한다. 영화에서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음으로써 한 가정씩 죽임을 당하지만 결코 알리지 않는 희생을 치른다. 홍해 바다가 앞을 가로막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세는 칼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데 결국 바닷물은 얕아져서 무사히 건너게 된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왕국에서 해방되어 나가는 데 성공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의 반영으로 그려지는 것들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옥한흠도 마찬가지다. 다큐 영화인 영화 옥한흠은 제자 훈련에 목숨을 건 존경받는 목회자 옥한흠 목사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 엑소더스가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를 담아낸 것이 아니듯, 영화 옥한흠도 한국 땅에서 한 시대를 실재로 살았던 옥한흠 목사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옥한흠 목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감독의 철학 이야기이다. 사실 인간 옥한흠을 철저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해부한다면 많은 단점과 약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겸손의 목회자요 신실한 목회자 상을 그려 내고 있다.

일례로 옥한흠 목사의 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일화가 나온다. 마치 옥한흠 목사님이 목회에만 전념해서 가족들을 제대로 돌볼 시간마저 없었던 것으로 그려진 것이다. 가족보다도 교회를 위해 더 헌신했던 희생자적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옥한흠 목사님은 자신의 취미 생활인 사진 찍는 일에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한 분이셨다. 그런 목사님이 가족과 시간을 잘 내지 못하셨다는 것은 영화가 그려 내는 것과는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옥한흠 목사님의 장점과 단점을 그냥 객관적으로 그려 낼 필요는 없다. 영화는 영화이지, 한 사람을 평가하는 천상의 재판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옥한흠은 이 시대에 참된 목회자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의 갈망을 그려 주는 것이다. 영화 엑소더스가 힘들고 어려운 삶의 돌파구가 없어서 고통을 받는 우리들에게 구원자에 대한 갈망을 그려 주고, 참된 희생적 사랑을 만나지 못해 갈증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된 희생적 사랑에 대한 대리 만족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영화 옥한흠은 정말 희생적이고 신실한 광인이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우리들의 갈망을 그려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옥한흠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인간 옥한흠이 아니라, 우리의 참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참된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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