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에 불이 나서, 7-B지구와 8지구 내 63세대의 집이 커다랗고 새까만 숯덩이로 변했다. 사고가 난 지 2주가 지난 11월 26일, 기자는 구룡마을을 찾았다.

화재 지역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새까맣게 탄 목재와 가구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은 당시 열기로 인해 코팅이 벗겨져 있었다. 구룡마을 8지구장 정관영 씨는 "여기 집들은 모두 목재로 되어 있는데다가 벌집처럼 붙어 있어요. 피해가 클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발화 지점은 도로변에 있는 한 고물상이었다. 누전으로 인한 건지, 방화범의 소행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 지난 11월 9일 화재를 입은 구룡마을의 모습이다. 63세대가 사는 집이 모두 타 버려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은 단 하나도 없다. 강남구청은 안전을 이유로 주민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날 임시대피소 앞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주민들은 구호품으로 들어온 쌀과 이불, 라면 등이 담긴 박스를 트럭에서 내리고 있었다. 대피소 안에는 네다섯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몇몇 할머니들은 한쪽 소파에 기대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이재민들은 일하러 가고 없었다. 아주머니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쏟아 냈다.

"구청에서는 우리 재해민들을 내쫓으려 해요. 다른 지역에 있는 임대주택을 줄 테니 가서 살래요. 주민들이 화재 지역을 정리하고 자체적으로 집을 짓겠다고 했는데도, 용역을 데려다 놓고 접근을 막고 있어요. 인근 단체나 교회에서 임시대피소에 구호품을 주겠다고 구청에 문의를 해도, 이곳은 구청에서 지정한 대피소가 아니라고 막는대요."

재해민은 강남구청에 대한 불신이 커 보였다. 강남구청은 서울시의 지원으로 재해민들에게 임대아파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화재 지역은 마을이 개발될 때까지 그대로 둔다고 했다. 임시대피소 내 주민들은 그동안 개발 문제로 마을과 대립해 온 강남구청이 화재를 계기로 주민들을 내쫓으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장 유귀범 씨는 "마을 주민들 대다수가 낮에는 강남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빌딩이나 목욕탕 청소를 하는 일용직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강북이나 도봉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이들은 구청에서 식사와 구호품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했다. 임시대피소에서는 인근 사회복지사들이 식사를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이들의 지원도 끊겨, 재해민들끼리 식사를 해결해야 할 판이다. 옷이나 생필품은 이웃 주민들이 구해다 주고 있다.

강남구청이 지정한 공식 대피소는 구룡마을 맞은편 개포중학교 체육관이다. 강남구청은 체육관이 넓고 쾌적하기 때문에 대피소로 지정했다고 했다. 현재 피해를 입은 130여 명의 이재민 중 90여 명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구청의 임대아파트 제공안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체육관에는 무료 식사와 재해구호협회·대한적십자가·푸드마켓·서울시희망마차 등이 마련한 구호품이 제공된다. 강남구청은 외부에서 들어온 구호 성금과 성품을 이곳에만 제공하고 있다.

▲ (사진 위) 기자는 11월 27일 구룡마을 임시대피소를 찾았다. 이날 극동방송은 쌀과 이불, 초코파이 등을 구룡마을 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사진 아래)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마을 주민 심 아무개 씨의 집을 방문해, 심 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유귀범 회장에게 인근 교회나 종교 단체의 도움은 없느냐고 묻자, 유 회장은 거의 없다고 했다. "화재가 있고 나서 사랑의교회와 강남순복음교회에서 라면과 속옷 등을 보냈어요. 그리고 오늘 극동방송에서 지원한 게 전부에요"라고 했다. 이날 극동방송은 쌀 4464kg과 이불 1032채 등을 이재민을 포함한 구룡마을 모든 주민들에게 지원했다.

이날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도 임시대피소를 찾았다. 재해민을 포함한 200여 명의 주민들이 김 목사를 맞이했다. 김 목사는 이들에게 "힘을 내고 용기를 잃지 말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국회의원, 동료 목사들에게 구룡마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알리겠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병주 목사(임마누엘순복음교회)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했다. 8지구에 위치한 이 목사네 교회도 화재 당일 전소되었다. 이 목사의 누나 이성금 원로목사가 25년 전 개척하고, 이병주 목사가 2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한 교회였다. 교회는 뼈대만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이 목사가 당일 주민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준비한 양파와 무 등의 채소가 까맣게 탄 채 뒹굴고 있었다.

이 목사는 화재 이후 기자나 정치인들이 구룡마을을 많이 다녀갔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형편은 나아진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인근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오늘처럼 찾아와 주민들을 위로하고,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지원해 줬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

보잘것없이 누추하더라도 고단한 몸을 뉠 수 있었던 안식처가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으니, 이들의 걱정은 태산처럼 높아만 간다. 화재가 났을 때 대부분이 몸만 빠져나오는 바람에 옷과 생필품이 부족하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하루빨리 폐기물을 걷어 내고 살 집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구청은 안전성 문제로 주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마을을 복구할 계획도 없어 보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재민들은 구청의 복구 계획을 두고 양분되었다. 이웃의 따뜻한 손길이 절실하다.

*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문의 : 02-579-9199
후원 계좌번호: 씨티은행 123-05790-268-01, 예금주: 진용미(구룡마을난방비나눔)

▲ (사진 왼쪽) 25년 동안 구룡마을과 함께한 임마누엘순복음교회가 화마로 뼈대만 남았다. (사진 오른쪽) 화재 당일 이병주 목사가 주민들에게 주려고 했던 야채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구룡마을은 지난 7월과 9월에도 화재 사건을 겪었다. 목재로 지어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통로는 성인 1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다. 집집마다 외벽에는 불에 잘 타는 '떡 솜'을 쉽게 볼 수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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