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가리켜 아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성도를 가리켜서 변혁하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교회가 변혁하는 공동체인 것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인 것은 이 땅에서 사탄 마귀로부터의 시험과 시련은 계속되지만 성도는 하나님나라에 속해서 하나님나라의 신령한 평안과 신령한 기쁨은 계속 유지하고 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고 성령이 내주하여 천국이 우리 마음에 임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여 천국의 본질인 예수님이 옆에 임하셨음을 알렸고, 예수님 자신은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며 천국의 모형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천국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모심으로 이 땅의 불편함이 제거된 곳이다. 세상의 방법이나 제도로는 안 되는 것들이 하나님나라의 방법으로 변화되고 갱신되는 곳이다. 그것이 교회요 성도로서의 교회 공동체이다(성도 개인으로서의 교회이든지, 성도 집단으로서의 교회이든지, 성도로서의 노회이든지, 성도로서의 총회이든지 하나님나라의 방법을 사용할 때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는 죄의 영향으로 질병이 있고 죽음이 있다. 천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것을 주님은 치유를 통해서 천국의 일면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 세상 제도는 사람을 차별한다. 남녀노소를 차별하고 빈부귀천을 차별한다. 그러나 하늘나라 곧 주님의 천국이 임하게 되면 평등 사회가 되어 그런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린다. 사람의 면전에서 사람의 방식에 따라 차별하던 것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한 자로 동등한 입장에 있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특정인 레위 자손 중에도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산제사를 통하여 만인 제사장이 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런 동등 정신에 의하여 재산을 공동 분배하게 되었고 같은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가르치신 천국, 즉 하나님나라의 원리에 의하여 깨닫고 실천했다. 천국을 죽어서나 가는 나라로만 보지 않았고 현재 이 땅에서 체험하고 누리며 살아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알고 실천했다. 그리고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바로 그런 체험의 나라로 가는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소망의 신앙이라 한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천국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성령 충만한 곳에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고 그런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은 온 세상에 충만하게 전파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기는 하는데 성경에서 가르치는 실천 속에서 체험되는 하나님나라가 아닌 편협하고 차별적인 세상 제도나 율법주의를 가르치고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한 교회를 돕다가도 어떤 기준에 미달하면 돌보지 않거나 도태시켜 버린다. 세상이 하는 식인 상대주의거나 비교 의식주의에 따라 결정하는 그런 방법을 채택하며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그런 세상 방법을 사용하면 하나님나라라고 말할 수 없으며 비성경적이며 세속주의적인 저주 나라인 것이다. 만일 도와주어도 발전이 보이지 않으면 더욱 위하여 기도하고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적선이나 구걸이 아닌 사랑의 한계는 변함이 없는 끝까지이기 때문이다. 도와준다고 하고 기준에 미달한다 하여 비난과 비판이 먼저 앞서는 것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나라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는 다함이 없는 사랑과 긍휼의 나라인 것이다.

점수를 임의로 정하고 점수에 미달된다고 도려내 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나라도 아니고 성령의 역사도 아니다. 성경에는 그런 제도가 없다. 오직 힘을 다해서 도와주고, 도와주는 것 자체만으로 도울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것이다. 그 도움은 거지에 대한 적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의 사랑의 되쏘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계속 감사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성경에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때를 보면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드렸다. 바울은 그것을 감사했다. 나보다 약한 자들 돕는 일에 앞장선 것을 감사했고, 핍박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약자 돕는 데 풍성한 연보를 드렸다는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아름답게 시작했다가 아름답지 못한 결과로 끝나 버리면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받은 자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주는 자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나라의 방법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방법인 사랑과 긍휼의 방법이 아닐 때, 받은 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시적 동정을 받으며 걸식한 자가 되어 버려 부끄럽고, 주는 자는 형제를 사랑의 대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관으로 폄하하여 취급한 결과가 되어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부끄러움마저도 준 자가 진정으로 깨달을 때만이 오는 부끄러움인 것이다. 세속적 강자의 아량이었기 때문이다.

형제를(만일 형제라고 한다면) 하나님나라의 무한한 사랑의 인격으로 대할 것이냐? 스스로 된 강자의 입장에 서서 스스로 판단한 약자를 대하는 사고방식으로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관에 의해 취급하며 대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내 자신의 판단이 기준이 아니며 기분이나 환경에 따라 들쑥날쑥하는 세속적 가치관의 판단이 기준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기준이고 초대교회가 행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의 벽을 허물어 버린 것이 기준이며 성령 충만의 가르침을 오직 은혜와 감사로 실천하는 것이 기준인 것이다.

우리의 목회 사역 안에서도 하나님나라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하심이 아쉽고 또 아쉬운 시대이다.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우물로서 샘솟아 흘러넘치는 긍휼과 사랑의 아름다운 우물이 그립고 아쉽다. 하나님나라의 판단과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사랑과 긍휼의 우물이란, 영원히 마르지 않고 쇠하지 않으며 푸르고 번성하여 아름다운 열배로 가득하고 차별이 없는 우물이라고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령이 내주해야만 변혁된다. 그리고 차별 없는 평등의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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