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권혁만 PD는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는 정도만 알다가 2012년 여수 엑스포 때 우연히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을 방문하고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방송인의 본능이 발동해 회사에 돌아와서 방송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뉴스 한 컷도 없었다는 데 놀랐다고 한다(2014년 11월 17일 KBS 아침마당).

"이런 세계적인 성자가 왜 그동안 한 번도 방송되지 않았을까?" 생각 끝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60년이 훨씬 지나 버린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위해 증인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도 손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나환자들 중 80~90대의 몇 분이 살아 있었다.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총살당하던 것을 목격한 사람을 찾게 되었고 손 목사님이 순교하던 것을 현장에서 목격한 목격자를 한국과 미국에서 찾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님의 나환자 사랑 이야기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의 증언이다. 

손양원 목사님이 돌보던 애양원에는 나환자가 1000여 명이 되었는데 제14호실에는 중증 환자가 있었고 그 모습들은 괴물과 같은 형상으로 비참했다고 한다. 치료할 약도 없었고 의사도 없었고 병원도 없던 시절에 환자의 피부에서 고름을 짜내야 하는데 고름이 잘 빠지지 않아서 환부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야만 했다고 한다. 나환자들의 입을 통해서 안 사실인데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1939년부터 여수 애양원에서 목회를 시작한 손 목사님은 안도라는 일본인에 의해 신사참배 안 하려면 애양원에서 모두 나가라 해서 쫓겨난 7~8명이 진주 남강 다리 밑에 있던 100여 명의 나환자들에게로 들어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를 하였고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 거부하다가(1945년 9월 25일에 일경에게 끌려가서 해방이 되기까지 5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 가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왕초는 울면서 전도를 받아들이고 손 목사님 가족을 돕기 위해 선포를 하였다. 얻어 온 곡식의 십일조를 양동이에 넣고 위는 된장으로 위장하여 밤중에 왜경의 눈을 피하여 전달해서 굶주림을 면하게 도왔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님의 원수 사랑 이야기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센 병자들을 돌보던 때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이 터졌다. 제주 폭동을 진앙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복음을 전하고 공산주의를 폭로하다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공산주의 이념에 넘어간 학생에 의해 총살되었다. 

동인과 동신을 총살한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는 입장에 있었다. 그 소식을 안 손 목사님은 계엄사령관에게 찾아가서 그의 석방을 간청했다. "나의 죽은 두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허락되어 양자로 입적시키고 교육시키며 믿음으로 양육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된다.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원수를 양아들로 삼겠다고 했을 때 펄쩍 뛰며 반대하였습니다.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삼겠다고 했을 때 펄펄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죽게 놔둬요" 했을 때 아버지는 또 달랬습니다.

"내가 1, 2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살이를 했고 너희들이 고생을 했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계명이다. 만일 이것을 안 지킨다면 내가 감옥살이를 한 것과 너희들이 고생한 것은 헛고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어린 동희는 거절했다. "용서하면 되었지 왜 아들을 삼는가요? 원수가 어찌 내 오빠가 되는가요?" 이에 손 목사님은 또 설득했다. "성경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어린 동희는 끝까지 거부했으나 아버지의 꾸준한 설득으로 인해 수그러지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목사로 사역하는 안재선 씨의 아들 안경신 목사가 말했다. 

고3이던 12월 16일 아버지의 소천 때 아버지는 나에게 신학교에 가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장례식 때 고모 가족(손양원 목사님의 딸들 가족)들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책을 보니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였습니다. 여순(여수 순천)사건이 나오고 두 삼촌(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의 순교 장면이 나오고 가해자인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나와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3~4년을 방황하였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반공교육을 받았고 주적이 공산당이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그런 공산당의 일에 몸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버지가 살고 내가 태어나 주님의 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손 목사님을 마음으로는 한없이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지만 남들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야 하니 그 일을 안 뒤 10여 년을 말 못 하고 살다가 2010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여수 애양원을 찾아갔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손동희 권사의 말이다.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으나 나는 용서가 안 되었는데 그분이 후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기 1일 전에 바짝 마르고 힘없는 몽으로 서울 여동생의 집에 와 있는 나를 찾아와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 불쌍해서 모두 용서한다고 말하고 서로 부둥켜 앉고 같이 울었습니다. 돌아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천국 간다. 너희 두 오빠에게 사죄할 것이다." 그리고 15일 후에 소천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이야기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손 목사님은 "잘 죽자"라는 특별 집회를 하였습니다.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님을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작들의 제직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님은 송별 예배를 드리고 함께 배에 올랐으나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가방을 들고 배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배에서 내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 11시에 여수 근교 미평에서 당시 48세의 나이로 총살당하여 순교하게 되었다. 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하신 것이다. 

필자는 이미 <사랑의 원자탄>을 읽었고 손 목사님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으나 나이가 든 지금에서 방송 매체와 여러 글들에서 다시 확인하면서 손 양원 목사님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손 목사님처럼 한센 환자들의 피고름을 빨아낼 정도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둘이나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자식을 삼아 가르치고 양육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겠는가? 전쟁의 상황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성도들을 지키며 돌볼 수 있겠는가?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들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가짜 목사이고 손 양원 목사님은 진짜 목사님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게 되었다. 나는 이 미달의 터널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매일 고민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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