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장)

예루살렘 왕이자 회중을 모으는 지혜의 스승으로 솔로몬은 인생은 헛된 것이라 다섯 번씩이나 강조한다. 구약을 가르쳐 주신 내 신학교 시절 교수님께서는 이것을 단순한 다섯 차례의 탄식이 아니라 하셨다. 골자는 이렇다.

인생이 헛되다는 것은 누구든 그 정도는 깨닫는 헛됨이다. 그러나 인생이 헛되다는 깨우침으로부터 뭔가 진정성 있는 변화가 발생하려면 깨우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앎이 모자라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깨우침으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현 존재의 헛됨을 계속적으로 자각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인생의 진실인 헛됨의 기초위에 삶을 새로 세우는 방식이다. 하지만 헛됨을 깨우치기는 쉬운 일이라도 깨달은 것조차 다시 헛되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다섯 차례 헛됨의 반복은 인생의 헛됨뿐 아니라 그것을 자각했다는 깨우침의 헛됨을 다시 지적함으로써 헛됨의 각성이 다시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솔로몬 고유의 표현법이었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모든 것이 반복된다. 어제 있던 일이 오늘 다시 벌어진다는 것은 오늘 저지른 일이 내일 다시 반복되리란 증거다. 과연 만물을 피곤케 하는 피곤함 아니겠는가. 생각할 때마다 감탄은 하지만 역시 어려운 말씀이다.

폴 투르니에는 '단절 현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드시 해결을 봐야 할 인생의 숙제를 그대로 지나쳤다면 그놈이 미해결의 책임을 물으러 되돌아올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멀리 나갈 필요 없이 2014년 천엽에 똥 쌓이듯 밀린 숙제들이 현재라는 세월에 계류 중이다. 단절은 개인의 인생만이 아닌 것이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들로 인해 없어도 괜찮았을 민폐의 목록이 쌓여 간다. 밥상에 되물려진 상한 도루묵처럼 역사를 피곤케 하는 부메랑들이야말로 또 언제란 기약 없이 미해결의 책임을 묻고 있는 단절현상인 것이다. 그 해법을 찾으려 온 국민이 생고생 인생을 거기에 다 바치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해결책이란 고작 헛되다는 절망의 탄식뿐 아닌가.

80년대 후반에 청년기를 보낸 우리들에겐 가장 미워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대 보라 한다면 누구나 그 이름을 댈 만한 인사가 있었다. 그는 모든 악의 근원이었고 타도할 굴레의 상징이었으며 현상이 되어 되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단절이었다. 그러나 이제와 누군가 당신은 왜 그토록 그를 미워했는가 물어 온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 것인가? 생각나는 악행들만 댄대도 조목은 수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미움의 이유들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라 한다면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 그가 저지른 악행들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세대와 역사에 끼친 본질적인 악일 것이다. 그 본질로서의 악의 실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전두환과 제5공화국'이라는 단절을 회복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단서가 될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 한 가지 악의 본질을 뚜렷이 파악치 못한 채 20대와 30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핸지 누군가 나와 동시대인의 글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전두환이 왜 나쁜가? 그것은 그가 젊은 우리들에게 모든 희망에 대한 신뢰를 말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글을 읽는 순간 가슴에 박힌 칼 한 자루가 뽑히는 느낌이 들었었다.

2.

목회자들의 성범죄가 교회와 복음의 스캔들이 된 지 벌써 오래다. 작금 전병욱이라는 이름은 그런 미해결 단절 현상의 상징과 같이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면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는 누군가를 닮은 원망이 없지 않은 듯도 하다. 그 점에 있어 그는 사실 억울할 만도 하다. 필적할 문제를 일으키고도 멀쩡했거나 지금까지 멀쩡한 큰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명세에 비하면 그가 상대적으로 약체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면에서 그는 너무 젊었고 그만큼 위태롭게 보였었다. 나에게는 그가 전임 교회를 사임한 이후 보이는 행태 역시 여전히 경솔한 것인지 이제 본격적으로 노회해져 가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다만 그의 성추행에 관해서만은 지난 유명세를 생각할 때 비난도 민망한 정도 처량하단 생각이 든다. 이 점에서 그는 다른 노련한 큰 목사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져 보기까지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 희망 때문이다.

흔히 목회자들의 성추문을 대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부도덕이다. 신성한 성직자까지는 아니래도 대중 앞에 서서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부도덕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질타다. 다음 수순은 부도덕에 합당한 형벌에 집중된다. 비난하는 측이든 비난당하는 측이든 도덕적 결격이 정죄와 면피의 핵심 사항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들의 죄란 부도덕이 전부일까? 아니 그것이 그들이 저지른 죄의 본질을 정확히 달아 주는 저울의 반대쪽 분동일까? 내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에 비추면 누구든 동일하게 그 죄를 확연히 깨닫게 해 줄 거울이 있다면 피고는 거기서 자신의 합당한 벌을 발견할 것이고 그럴 때 형벌은 치유와 용서의 같은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에서 보여 주려던 주제였을 것이다.

이 '죄와 벌'이라는 번역은 아무래도 중량감이 부족하다. 러시아어에서 'Преступление'란 운명의 굴레와도 같이 무거운 죄의 실존적 형상을 표현한다. 'наказание' 역시 단순한 형벌의 개념으론 부족한 영구 처벌과 같은 형벌의 실존적 형상을 표현한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런 죄와 형벌을 온 몸에 짊어진 반항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정신적으로 공허한 인물로 치열한 내적 분열에 쫓기는 인물이다. 위장되고 과장된 명분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이러 갔다 그녀의 무죄한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된다. 처음 그는 확신에 찬 범죄자로서 자신의 죄를 결코 인정치 않으려 했지만 결국엔 인정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한 구원의 여신을 등장시킨다. 여주인공 쏘냐를 통하여 그는 인간으로서의 고귀함과 희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혹 러시아에 가 본 사람이 있다면 눈 쌓인 밤거리에 매춘부들이 한 백여 미터나 되는 줄을 선 채 손님을 기다리는 진풍경을 본 적 있을지 모르겠다. 쏘냐는 그렇게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였다. 그녀가 천한 창녀라는 사실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구원이 단순한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심혼의 구원을 제시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참혹한 죄인으로부터 위대한 죄인으로 변화하는 상징으로 가장 천한 육체에 가장 성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복음이라는 비유에 상응한다. 나는 가끔 도스토예프스키의 복음이 세상에 어떻게 읽히고 쓰이는지 궁금하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시대 저 왕궁과 정부 청사와 국회와 재판소가 표명하는 온갖 도덕들, 그것으로 다투는 현실이란 우리 자신들의 모든 '죄와 벌'에 관한 끝없이 비열하고 조악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과녁에 대고 쏘는 화살이라면 관중을 한다 해도 보람이 있을 리 없다.

3.

전병욱 사건이 알려진 이래 거의 모든 비난과 면피는 도덕과 부도덕에 바쳐지고 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이든 공히 그렇다. 정말 그럴까? 우리 모두는 도덕적이라서 그들을 정죄하고 경멸하고 혐오할까? 그들의 반론은 그것의 취약함을 말해 준다. "너는 얼마나 도덕적인가" 그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는 복음서의 한 줄을 인용하며 용서는 신의 권리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강변한다. 그들 중엔 더욱 대범해져 용서받은 훌륭한(?) 성 범죄자의 전범으로 다윗의 고사를 갖다 붙인다. "다윗을 보라. 그는 비록 간음을 저질렀지만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여전히 왕으로 건재하지 않았던가." 빗나간 과녁에 대고 쏜 화살이 거꾸로 날아온 격이랄까? 전병욱 사건에서도 김규동 사건에서도 그 이외의 사건들에서도 나는 이런 부메랑이 어지럽히는 혹세무민의 격쟁을 본다. 문제는 이 혹세무민 프레임 자체가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가령 전병욱을 목사직에서 면직시키고 홍대새교회가 노회에서 인가를 받지 못하게 한다면 이 사건은 원만히 수리되는 것일까? 물론 그 정도를 가지고도 이토록 진을 빼는 현실이니 어찌하겠는가 싶기는 하다.

다윗에 관한 논의를 끝맺고 싶다. 그들의 성범죄는 다윗의 간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성관계와 성추행, 더 나아가 성폭행은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남녀상열지사에 있어 결합에 이르는 과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전병욱 목사의 범죄의 본질은 그의 부도덕이 아니라 그가 더럽혔음에 있다. 그는 아름다움을 더럽혔다. 그의 부도덕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분노하게 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아름다워야 할 것을 그가 더럽힌 그것이 우리를 고개 돌리게 한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열왕기하 3장에는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 왕 여호사밧이 모압과 전쟁하는 대목이 나온다. 모압 왕은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닫자 근위병 칠백을 거느리고 퇴각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러자 맏아들을 성 위에서 산 채로 불태워 제사를 지낸다. 성경은 이 장면을 본 이스라엘 진중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임하여 이스라엘의 전군이 흩어져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한다. 아들을 태워 죽인 범죄자는 모압 왕인데 하나님의 진노가 어찌 이스라엘 진중에 내렸던가? 성경이라는 책이 그리 단순치 않은 것이다.

나는 전병욱 목사가 더럽힌 더럽힘의 내용을 여기서 다시 거론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범죄의 본질을 아는 것이 그 자신의 회복에도 힌트를 준다고 생각한다. 곧 그의 죄와 벌은 단지 목사로서의 부도덕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한 인간 본래의 훼손당하지 않을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회복이어야 한다. 그 치욕스런 사건을 두 귀로 전해들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비단 성문제뿐 아니라 이와 같은 도덕이라는 명분상 쟁론 속에 초점을 상실해버린 우리들의 기본적 가치에 관한 일깨움이다.

그들은 또 현대판 다윗으로 미국의 목사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의 사례를 든다. 그는 미국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비중 있는 인물이었지만 감춰진 성문제가 드러나 강단을 떠났다가 3년의 자숙 후 복직하여 여전히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의 처신은 전병욱 목사와는 달랐다. 성문제가 알려지자 그는 즉각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고 모든 교직을 사임한 다음 회개와 자숙의 기간을 충분히(?) 가졌다. 그 결과 교인들의 자발적 요청으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사례에 기대는 경우 전병욱 목사나 다른 성문제 전력의 목회자들은 자신들 역시 충분히 회개했고 자숙의 기간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추종자들도 그것을 지지해 주느라 때마다 고든 맥도날드를 다시 우려먹는 것이다.

이 점 나는 달리 생각한다. 고든 맥도날드가 교회에 복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의 성문제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진 모르겠다. 적어도 추행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집무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상담역으로 대통령의 내적 치유와 명예 회복을 도왔다고 들었다. 아마도 내 견해이긴 하지만 맥도날드는 클린턴 케이스 역시 자기가 겪고 극복했던 경험에서 얻은 같은 방식의 해법을 제시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정직한 인정, 회개, 회복, 용서 같은 순서를 밟는 과정이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정직히 인정하고 그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상당 기간 동안 회복을 위한 상담을 받고 그 진실함에 대한 공동체의 인정을 받으면 다시 현장에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락된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적으로 고독한, 혹은 고립된 상태에서 여자에게 빠졌다. 미안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기혼자들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자기가 빠져나가고자 자신들의 아내들을 모욕하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그것을 잘못이라 시인하지만 그 당시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해를 구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해해 준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회복과 용서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4.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성추행이든 성관계든 거기에는 성이라는 관계가 있었고 대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상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너무나 쉽게 범죄라 인정해 버림으로써 대상을 소외시켜 버린다. 혹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오리발을 내밂으로써 타인에게 다시 죄를 짓는다. 이게 다 도덕이 시키는 짓이다. 모름지기 성충동이란 본래 도덕과는 상관이 없다. 시쳇말로 건강한 남자는 3분에 한 번씩 여자 생각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성 충동이라는 기표가 어떤 기의를 지시하는 것인지에 관한 정신분석적 논의는 그만두고라도 이것이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없이 어떤 대상에게 매혹되어 몰두하게 만드는 인력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원초적으로 모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무의식적이고도 의식적인 동경이다. 도덕이나 윤리는 이 점에 있어 그것을 찍어 누르거나 왜곡시키는 억압 기제로 작동하는 수가 더 많다.

옛날 읽은 책에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내용이 있었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그 당시 젊은 청년이었고 나 역시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황홀한 마음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범죄 이전, 도덕 이전, 혹은 억압 이전의 그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고 경외였다. 그것은 부도덕이니 비윤리니 성추행이니 따위가 범하기 이전의 에덴동산 같은 경이의 세계로 어쩌면 그 자체가 참도덕인 세계이다. 우리는 도대체 그런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양과 헌신에 관하여 배워 본 바가 있었던가? 누군가 그런 참답고 순결한 희열에 관하여 가르쳐 준 선생이 있었던가? 우리는 일찌감치 그 빛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침묵의 빛 Stellet licht Silent Light>(2007)은 메노나이트(Mennonites)들의 삶과 사상을 배경으로 인간의 사랑과 허무로부터의 종교적 구원을 추적한 예술영화다. 주인공이 자신의 불륜을 아버지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고통하다 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아들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아들의 고백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첫마디는 너무나도 의외였다. 그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부럽구나."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들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목사였다.

나는 성에 관한 추행과 폭행의 뉴스가 터져 나올 때마다 가장 귀히 여겨야 할 아름다움을 더럽힌, 그 더럽힘에 다시 더러워진, 그 더럽힘과 더러워짐을 면피하고자 다시 거듭거듭 서로를 더럽히고 있는 우리 사내들의 진정한 부도덕함을 본다. 관념적인 신(神)이 아닌 인간을 주제로 한 불멸의 예술 작품들은 인간(人間 사람 사이)의 에로스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모성적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양과 경외 혹은 그 아름다움을 박탈하고 금지하는 상황에 처한 상실감과 저항을 담고 있다. 거기 인간 남녀들은 가장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한다.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받고 몸을 나누어 사랑에 탐닉한다. 사랑엔 그렇게 위대한 마력이 들어 있다. 곧 아름다움으로서 끝까지 그 아름다움 속에 함몰되고자 하는 영원한 충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토록 음란한 범죄와 부도덕한 짓을 행하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청산유수 은혜로운 설교를 하고 청중을 동원하여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사람의 설교를 듣고도 은혜를 받고 용기를 얻고 힘을 내었던 것인가? 도무지 모르겠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 모든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은혜도 받을 수 있고 용기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중요한 게 뭔가? 도덕인가? 아니다. 타인이 보기에 얼마든지 부도덕하단 손가락질을 받아도 모자랄 인간들에게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훼손당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거기서 감동을 받고 위로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알면서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일깨워 주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게 지켜 주는 것은 도덕이 아니다. 상실해 버린 듯한 그것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전병욱이든 누구든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의 본질은 우리들의 모든 추구의 단순함과 선함 그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더럽혀 버린 데 있다. 그 때문에 비열하게 변명하며 끝까지 그것에 관하여 자신이 행동한 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다윗을 보라. 다윗은 자신이 죽인 우리야의 미망인을 왕궁에 들이고 모든 반대와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했으며 그 아들을 왕으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고든 맥도날드든 클린턴이든 나는 이런 면에서 다 하나같이 비열한 사내들이라고 생각한다. 용서와 구원은 자기 편의적 형식을 갖추는 것으로 충족되는 게 아니다. 애초 그들은 범죄임을 몰라서 빠져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여태 죄가 있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얻으려 미쳤었던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너무도 편리하게 스스로를 배신해 버린 비열함에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못하는 한 우리에겐 성범죄를 저지르신 목회자님만 있을 뿐 수치스러운 인간에게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훼손당한 피해 여성이나 그로써 함께 모욕당한 그의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여자들이 그 목사를 두둔하고 아내들이 자기 남편을 비호하고 나서는 것은 어떠한가. 당신들의 죄가 무엇인줄 아는가? 그야말로 용서받을 길 없는 추행 아닌가.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