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 교수의 이사야 1:18에 대한 최근 기사[주홍 같은 너의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2014.10.9.)]와 관련하여 몇 가지 모호한 부분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어서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이민규 교수의 논점은 이 본문을 교리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다는 것이다(그의 기사에 보면, "번역에 교리라는 선입관이 문맥보다 앞설 때 성경 본문의 의도는 왜곡된다"는 증거로 사 1:18을 인용한다). -필자 주

들어가는 말

그는 이전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언급하면서, 1:18의 평서문 번역은 교리 때문이며 사실은 의문문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볼 때, 최근에 자신이 경험한 또 다른 사건이 그 기사를 쓰게 된 동기인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관련된 이 구절에 대한 적용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종교적인 선행을 통하여 자신들의 범죄를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인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무조건적' 용서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경향성을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필자가 볼 때 이민규 교수의 본문과 관련한 판단과 논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의 결론과 한국교회를 향한 문제 제기에는 동의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한 가지 본문, 두 가지 해석

이민규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이사야 1:18을 의문문("너희 죄가 주홍 같으니, 너희가 눈과 같이 희어질 수 있겠느냐?")으로 읽을 것인가, 평서문("비록 너희 죄가 주홍 같더라도, 너희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으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그런데 이민규 교수의 지적처럼 교리적 측면에서 이 본문이 후자를 지지하도록 해석되었다기보다는, 예언서 전반에 대한 이해나 1:18이 속한 문맥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해서 이 본문 해석에 대한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의문문으로 읽으려는 입장

히브리 본문에 불변화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문맥의 전체적 의도에 따라) 의문문으로 읽으려는 입장의 시작은 독일 구약학자들 마르티(Marti)와 둠(Duhm)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최근에도 그레이(Gray), 스캇(Scott), 블렌킨소프(Blenkinsopp) 등이 지지한다. 이들은 평서문으로 읽는 18절(하)이 직접적인 문맥에 부적합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이 문맥은 평서문으로 읽는 식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문법의 레벨에서 불변화사(즉 의문사)가 없더라도 의미론적인 레벨에서 의문문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서문으로 읽으려는 입장

그와는 반대로, 평서문으로 읽는 입장도 카이저(Kaiser), 스키너(Skinner), 오스왈트(Oswalt) 등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읽는 '전통적인' 독법을 지지한다. 사실 와츠 같은 경우(91, 93)는 문맥 자체가 의문문과 평서문의 독법 모두를 지지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후자를 지지하는 입장은 전자의 몇 가지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는 문장 자체가 의문문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델리치의 주장처럼, 고대 사본들 즉 MT와 LXX이 의문문으로 읽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번역본 중 가장 큰 권위를 갖는 LXX은 "너희 죄가 주홍 같다면(더라도), 내가 너희 죄를 눈처럼 희게 할 것이다"고 번역하고 있다. 이 고대역의 특징은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MT에서 사용되는 신적 수동태("너희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를 능동태("내가… 희게 할 것이다")로 바꿔 주고 있다는 데 있다.

둘째, 과연 이 단락과 18절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해 주는가? 즉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가?의 해석상의 문제가 남는다. 오스왈트의 주장처럼, 18절과 이 문맥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해준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를 회개한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즉 용서의 가능성은 회개의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실제적인 결과와, 실제적인 예상이다. 과연 이스라엘이 이 말을 듣고 회개할 수 있을까? 정말로 회개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불행하게도. 사실 이 구절과 문맥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인한 회개의 불가능성을 가정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가능해 보이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본 후에 한번 더 판단할 문제다.

본문 탐구

불가능인가? 가능인가? 이 구절은 '주홍과 진홍'의 색으로 염색된 옷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이 옷의 염색을 물로 씻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이전 단락에서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한 손에 묻은 피를 제거하려고 제의를 사용하는 상황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Blenkinsopp, 185). 그런데 문제는 다음과 같다. 너희의 범죄함이 염색한 옷과 같다는 말이므로, 완전히 제거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그냥 옷의 표면에 묻은 '단순한 오염'이 아니라, 태생적인 상태로 바뀌어 버린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세제라든지 약품들이 발달해서 색깔 있는 옷을 흰색 옷으로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은유가 얼마나 실제를 반영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세상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한스 빌트베르거의 주장(37)처럼,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두운가? 혹은 밝은가?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능성은 이스라엘의 미래와 관련하여 '회개를 전제로 한' 조건적 가능성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한' 무조건적 가능성인가? 이 문맥에서 말하자면, '가장 약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개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는가의 여부일 수 있다(카이저, 49). 과연 이스라엘은 스스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카이저의 주장(49, n. 22)처럼 임박한 징벌에 대면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는가?

사실 회고적으로 볼 때, 야웨와 이스라엘의 변론에서 이스라엘이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판명 났을 것이다. 이것은 이후의 포로의 역사를 통해 검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앞서 해석상의 문제라고 이야기했듯이, 바벨론 포로 이전의 예언자들이 절대적 심판만을 전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은혜는커녕 회개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가당치도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그들은 의문문의 해석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알고 있는 우리 해석자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당시에 회개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회개의 타이밍을 늦춰서 결국 멸망당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에, 1장의 (원래)문맥 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이들에게 (조건적인) 용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나가면서: 한국교회와 변론하리라

사실 우리가 예언서를 읽으면서, 조건적인 혹은 무조건적인 심판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멸망당한 이스라엘/유다의 과거사가 아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사는 한국교회에게 회개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멸망의 징벌만 남아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 혹은 태도가 궁금한 것이다. 도피가 답인가? 회개가 답인가? 무관심이 답인가? 우리가 당면한 해석학의 시작과 끝은 단지 본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적용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Joseph Blenkinsopp, <Isaiah 1~39: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New York : Doubleday, 2000).
John 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 1~39>(Grand Rapids: Eerdmans, 1986).
Hans Wildberger, <Isaiah 1~12: A Commentary>(Mineapolis: Fortress, 1991).
존 D. W. 와츠, <이사야(상)>(서울: 솔로몬말씀사, 2002).
옷토 카이저, <이사야(1)>(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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